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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71화 (171/201)

[ 171 ] [170화] 하스드루발 vs 마르켈루스 (1)

바르카 가문이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지 4년째 되는 해인 기원전 215년.

지중해 전역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함성과 비명이 울려 퍼지던 피비린내 나는 한 해가 마침내 역사의 저편으로 흘러갔다.

지금까지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와 시칠리아, 일리리아의 영토 상당 부분을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에게 빼앗긴 데다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동맹세력까지 모두 잃었다.

그런 이유로 전 지중해를 휩쓸던 전쟁의 불꽃은 기원전 214년의 봄이 시작되자 오직 이탈리아반도와 시칠리아에서만 맹렬하게 타올랐다.

특히 시칠리아에서의 전황은 치열하기 그지없었다.

하스드루발이 시라쿠사의 왕 히에로니무스를 반란군에게서 지켜 내자 카르타고 정부는 육군 2만 8천 명과 5단 노선 150척을 동원해 시칠리아 서남부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 릴리바이움을 점령했다.

그 후 시칠리아의 남부 해안지대와 서부 내륙지역의 여러 그리스계 식민도시들이 카르타고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상처 입은 맹수 로마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작년 겨울 시칠리아로 건너온 로마의 맹장 마르켈루스는 봄이 시작되자마자 휘하의 2개 군단을 이끌고 카르타고 편으로 돌아선 북부의 그리스계 도시를 맹렬한 기세로 공격했다.

그의 치열한 노력 덕에 로마는 시칠리아 북부 해안지대 전체와 시칠리아 동부 내륙지역 일부를 카르타고에게서 탈환해 냈다.

그때 하스드루발은 시라쿠사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마음껏 날뛰는 마르켈루스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휘하의 육군 병력이 시라쿠사에서 벌어진 친로마파 귀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데려온 신성대 중장보병 2천 명과 누미디아 기병 5백 기뿐인 데 비해 마르켈루스의 병력은 2만 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즉시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4월 초쯤은 되어야 시라쿠사로 병력을 보낼 수 있다는 답변을 받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릴리바이움에 주둔하고 있는 카르타고군도 본래 시칠리아 속주를 지키고 있던 로마의 법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이끄는 군대의 견제 때문에 마르켈루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원전 214년 3월 중순.

하스드루발은 시라쿠사의 왕궁 서재에서 한니발조차도 애먹은 강적 마르켈루스를 물리칠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원 역사에서도 마르켈루스는 무모하게 직접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 한니발 형의 복병에 걸려 허무하게 죽었을 뿐, 한 번도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한 적이 없다. 어떻게 해야 저 불도저 같은 인간을 이길 수 있을까······.’

그때, 그와 함께 왕궁에서 지내고 있던 마실리족의 왕자 마시니사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함께 시라쿠사의 반란을 진압한 후 친구가 되기로 했기에 마시니사 왕자는 하스드루발에게 존대하지 않고 편하게 말했다.

“여기 있었구나, 하스드루발. 오후에는 같이 마상궁술 연습하기로 했잖아. 잊어버렸어?”

“아! 미안해 마시니사. 세상에. 벌써 해가 지려고 하네. 어떻게 해야 시칠리아에서 로마군을 몰아낼 수 있을지 생각하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뭘 그렇게 고민하고 그래? 바알 함몬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상대할 만한 장수가 로마군 중에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 적은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적 중에서 최강일 거야. 한니발 형과 다섯 번이나 전장에서 맞붙고도 살아남은 강적이거든.”

“전에 얘기해 줬던 마르켈루스라는 적장 말이구나. 그자가 시칠리아로 건너왔어?”

“맞아. 빨리 시칠리아를 평정하고 이탈리아반도로 건너가 로마의 성벽을 넘어야 하는데 골치 아프게 됐어. 회전을 벌이면 우리 측 피해도 만만치 않을 거고. 지략도 보통 이상인 자라 어설픈 함정에는 걸리지 않을 거고······.”

“음··· 그런데 말이야.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마르켈루스와 결전을 벌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아직 병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사냥은 많이 해 봤거든. 내가 잡은 사냥감 중에서 제일 사나운 맹수는 바바리 사자였어. 바바리 사자를 잡을 때 제일 중요한 게 뭔 줄 알아?”

“잘 모르겠는데.”

“일격에 죽이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야. 괜히 만용 부리다가 그 무시무시한 발톱에 찢겨 버리는 수가 있거든.”

“아······!”

하스드루발은 마시니사의 말을 듣고 그동안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맞다! 이제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건 우리가 아니야!”

로마는 지난 4년 동안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싸우다 전 로마 시민권자의 10%에 가까운 군단병을 잃었다.

그들은 대부분 로마 경제의 중추를 담당하던 자영농이었기에 이탈리아반도 내의 식량 생산량은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켈루스가 지중해의 곡창지대인 시칠리아 북동부의 일부 지역을 잘 지켜 내고 있지만, 그곳에서 생산되는 식량만으로는 아직도 4백만 명이 훌쩍 넘는 로마연합의 시민들을 먹여 살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반면 카르타고는 매년 국내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도 엄청난 데다 이집트와 시라쿠사에서 꾸준히 밀을 들여오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임에도 식량 사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그동안 로마군을 상대로 연이어 큰 승리를 거두며 로마의 영토와 인적자원을 갉아먹어 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이제 강력한 적장과의 전투를 피하면서도 강대국 로마를 고사시킬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즉시 시라쿠사의 재상이 된 한니발의 부하 에피키데스에게 전령으로 보낼 기병 수십 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스드루발은 에피키데스가 보낸 기병들을 시라쿠사의 병영 연병장에 모아 놓고 그리스어로 말했다.

“이제 한니발 장군이 적장 파비우스에게 당했던 집요한 괴롭힘을 로마에게 그대로 갚아 줄 때가 됐다! 당장 전 시칠리아에 있는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동맹도시로 떠나라! 가서 도시와 마을을 지키는 데만 전념하라고 전해라!”

* * *

기원전 214년 4월 중순.

마르켈루스는 자신의 막사에서 정찰병의 보고를 받은 후 울분을 터뜨리며 두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하스드루발 이 교활한 자식! 내 부대 주변을 파리처럼 맴돌면서 떠날 생각을 하질 않는구나! 내 전략을 나에게 그대로 써먹다니!”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에서 지원군 2만 2천 명이 도착하자마자 집요하게 마르켈루스의 군대를 뒤쫓으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르켈루스가 이탈리아의 캄파니아와 아풀리아 지역에서 한니발에게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전략으로 숙적의 발을 묶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하스드루발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누미디아 출신 궁기병과 투창기병을 3천 기나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켈루스의 발목을 잡기 위해 아군의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마르켈루스 휘하의 군단병들이 적지에서 마을을 약탈하거나 행군 대열에서 조금 뒤처지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마시니사 왕자가 지휘하는 누미디아 기병대가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와 쉴 새 없이 화살과 투창을 날려 댔다.

그렇다고 로마군의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누미디아 기병을 쫓아내려고 하면 누미디아 기병대가 시간을 끄는 사이 뒤쫓아 온 카르타고군의 발레아레스 투석병 부대가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며 납덩이를 비처럼 퍼부었다.

마르켈루스는 당장에라도 하스드루발의 기병대를 섬멸하고 싶었지만, 카르타고군에 비해 기병이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회전을 피하는 적군의 기병대를 추격하기 어려웠다.

그는 부하의 희생에 특별히 슬퍼하는 지휘관은 아니었지만, 휘하의 병사들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꾸준히 죽어 나가는 것을 계속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마르켈루스는 시칠리아 북동부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 메사나 부근에 높은 목책을 두른 숙영지를 짓고 그곳에 틀어박혀 벌써 일주일 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대대장 한 명이 불같이 화를 내는 집정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마르켈루스 집정관님.”

“뭐냐!”

“드레파눔에 주둔 중인 아피우스 전직 법무관님의 군대와 함께 카르타고군을 공격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적과 우리의 기병 수도 비등비등해질 겁니다.”

“카엘리우스 대대장.”

“예. 집정관님.”

“자네는 생각이 있나? 없나? 자네 드레파눔이 어디 있는 곳인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아직 시칠리아 전체의 지리까지는 잘······.”

“천백 스타디온(약 200km)이 훨씬 넘는다! 시칠리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이라고! 아군이 그 먼 거리를 행군해 오는데 릴리바이움에 주둔하고 있는 카르타고군이 가만히 내버려 두겠나!”

“죄송합니다, 집정관님! 시정하겠습니다!”

마르켈루스는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대대장을 보면서 혀를 차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쯧쯧··· 시칠리아에 도착한 지가 언제인데 대대장이라는 자가 아직도 현지의 대도시가 어디 붙어 있는지를 모른단 말이냐. 스키피오 대신이 저런 머저리란 말이지··· 그 녀석, 나이도 어린 게 덜컥 법무관에 당선돼 버렸으니 원.”

바로 그때, 그가 갑자기 밝은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신? 그래! 눈앞의 적을 물리치기 힘들면 대신 다른 쪽을 먼저 공격하면 되겠군! 카엘리우스 대대장!”

“네. 집정관님.”

“서신을 하나 적어 줄 테니 당장 아피우스 전직 법무관에게 전령을 보내서 전군을 이끌고 세게스타를 향해 천천히 진군하라고 전해라.”

그러자 다른 부관 한 명이 마르켈루스에게 말했다.

“집정관님. 감히 말씀드리면 세게스타는 농사는 잘되지만, 내륙의 평야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전략적 요청지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을 겁니다.”

“나도 알고 있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도시가 아니라 적의 부대를 섬멸하는 거다.”

* * *

마르켈루스의 숙영지에서 출발한 전령은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드레파눔에 도착했다.

로마의 전직 법무관 아피우스는 시칠리아의 집정관이 보낸 서신을 읽고 즉시 드레파눔의 옛 원로원 건물에 모든 부관을 소집해 군사회의를 열었다.

전직 법무관의 부관들은 마르켈루스가 보낸 ‘전군을 이끌고 세게스타로 침착하게 진격하시오.’라고만 적혀 있는 서신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의 군단장 중 한 명이 손에 들고 있는 서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전직 법무관에게 말했다.

“아피우스 전직 법무관님. 이게··· 정말 마르켈루스 집정관님께서 보내신 서신이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대로 집정관님의 인장이 찍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서신의 내용이 너무 날··· 아니, 간결한 게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럽니다. 적장 하스드루발은 워낙 교활한 자라고 하니 인장을 위조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군단장은 깃털에 잉크를 대충 묻혀 휘갈겨 쓴 게 분명한 짧은 악필을 보고 ‘날림’이라고 말한 뻔하다 순간적으로 단어를 바꾸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로마군 장교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피우스는 마르켈루스의 필체를 이미 본 적이 있었기에 서신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마르켈루스 집정관님의 필체는 그분의 성정만큼이나 대담하고 격정적이지. 그분께서 직접 작성하신 서신이 확실하니 걱정 말게.”

“그렇다고 해도 반드시 집정관님의 지시를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전직 법무관님께서는 독자적인 군권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병력으로는 세게스타를 공격하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서신을 잘 읽어 보게. 세게스타를 공격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써 있지 않네. 그저 그쪽으로 침착하게 진격하라는 말만 써 있을 뿐이지. 그분 성격에 일부러 ‘침착’이라는 단어를 쓰셨다면 아마 내 병사들을 미끼로 카르타고군을 유인해 내고 싶으신 게 아닐까?”

“네? 하지만 집정관님께서 계신 메사나와 세게스타까지 군대를 이끌고 행군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엿새는 걸릴 겁니다. 그 전에 릴리바이움의 카르타고군이 우릴 요격하러 오면 잘해야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겁니다.”

“젊은 친구들은 아직 잘 모르겠군. 마르켈루스 집정관님께서는 불꽃 같아 보이는 성정 속에 깊은 지혜를 숨기고 계신다. 이번에도 뭔가 계획이 있으셔서 이런 지시를 내리신 거겠지. 논의는 이걸로 마친다. 어서 전군에 출격명령을 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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