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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72화 (172/201)

[ 172 ] [171화] 하스드루발 vs 마르켈루스 (2)

기원전 214년 4월 말.

로마의 전직 법무관 아피우스는 휘하의 병사 2만 명을 이끌고 최근 카르타고의 편으로 돌아선 그리스계 식민도시 세게스타를 향해 동쪽으로 진군했다.

시칠리아의 서쪽 지역을 정찰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의 기병들은 로마군이 벌써 한 달째 굳게 닫혀 있던 드레파눔의 성문을 열고 몰려나오는 모습을 보고 릴리바이움에 머무르고 있는 사령관에게 즉시 그 사실을 알렸다.

시칠리아 서쪽 지역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는 카르타고의 장군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적장 아피우스가 세게스타를 향해 행군하고 있다고? 대체 뭐 하려고? 섣불리 그곳을 공격하면 내게 배후를 공격당한다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텐데?”

릴리바이움에서 세게스타까지의 거리는 말을 타면 빠르면 반나절, 중무장 보병이라도 강행군을 할 경우, 이틀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게다가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거느리고 있는 병사는 2만 8천 명으로 아피우스의 군대보다 수가 많았다.

아피우스가 세게스타를 공격하다 뒤쫓아 온 카르타고군에게 역포위당한다면 로마군은 전멸을 면치 못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의 기병대장 중 한 명이 사령관에게 말했다.

“장군님, 어쩌면 적장 아피우스는 세게스타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시칠리아 동쪽 끝에 있는 마르켈루스의 군대와 합류하려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 물론 로마로서는 시라쿠사 탈환이 가장 큰 목표겠지만, 드레파눔도 저렇게 버려 두기에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데. 적장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군. 일단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적을 추격한다. 당장 전군에 출격명령을 내려라.”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릴리바이움에 주둔하고 있던 카르타고군 중 2만 8천을 모두 데리고 성문을 나와 동쪽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아피우스의 로마군의 뒤를 쫓은 지 이틀째 되던 날, 드디어 양군은 서로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두고 마주 보게 되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이 시칠리아의 나무 한 그루 없는 드넓은 평원에 행군을 멈추고 진을 치자 기병대를 보내 주변에 다른 적이 없는지를 정찰하게 했다.

아침에 정찰을 나갔던 기병대는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 즈음에 숙영지로 돌아와 장군에게 보고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지시하신 대로 적장 아피우스의 숙영지 부근에 매복을 시도할 만한 곳을 철저히 뒤졌지만, 복병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수고했다. 숙소로 돌아가서 푹 쉬어라.”

기병들은 그의 말을 듣고 장군에게 경례한 후 막사 밖으로 나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가 결연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말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아침을 먹자마자 적진을 공격한다.”

그의 말을 듣고 한 기병대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군님. 적군의 거동이 아무래도 수상쩍습니다. 조금만 더 두고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도 그 점이 의심스러워서 정찰병에게 적진 부근에 말을 타고 하루 거리에 있는 곳은 작은 촌락까지 샅샅이 뒤지게 했다. 그런데도 적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는군. 아무래도 마르켈루스와 아피우스가 연합작전을 펼치려다 손발이 안 맞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음···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신들께서 내게도 조국에 명성을 떨칠 기회를 주신 건지도 모르겠군. 요즘 바르카 가문의 가정교사 실레노스를 따라서 역사책을 집필하는 카르타고인이 늘어났다는 소문을 들어 봤나?”

“예. 저번에 보급품을 가져온 선원들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가들이 역사책을 집필할 때 우리 카르타고인 중에는 워낙 동명이인이 많아서 이름 앞에 칭호를 붙여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더군. 그중에서도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에게는 ‘용맹한 한니발’이나 ‘지혜로운 하스드루발’ 같은 칭호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네.”

“그 두 분이라면 그럴 만하지요. 이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승리하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럼 나는 후세에 어떻게 기록될 것 같나?”

“아··· ‘관대한 하스드루발’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

“하하! 멜카르트샤마! 자네 여기 들어오기 전에 혀에 올리브유라도 발라 뒀나? 아주 아부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군? 내 생각에는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해 보고 전쟁이 끝나면 난 ‘눈부신 하스드루발’이나 ‘머리에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지는 하스드루발’ 같은 이름을 남길 것 같은데 말이야.”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타조알처럼 매끄러운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기병대장 멜카르트샤마는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풋!!! 아! 죄송합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괘념치 말게. 처음부터 웃으라고 한 말이었네. 애초에 난 신들께서 내게 주신 몸을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네. 하지만 우리보다 수가 적은 적군이 눈앞에서 훤히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데 지레 겁을 먹고 엉덩이를 뭉개다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장군의 말을 듣고 막사 안에 있는 모든 장수들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부하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날 잘 안다. 분명 나는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지휘관이지. 그렇지만 나 같은 자도 조국을 위해 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다. ‘지혜로운 하스드루발’이 될 수 없으면 ‘과감한 하스드루발’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장군의 솔직한 말을 듣고 카르타고의 장수들은 눈앞의 로마군을 물리치기로 굳게 결심했다.

* * *

군사회의를 마친 다음 날 아침,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전군을 이끌고 법무관 아피우스의 숙영지로 다가가 적을 도발했다.

아피우스도 이에 지지 않고 숙영지 밖으로 몰려나와 카르타고군과 회전을 벌이기 위해 진을 쳤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의 진영을 바라보며 부관들에게 말했다.

“적은 기병이 얼마 없군. 로마 군단병의 기세가 무섭긴 하겠지만, 우리 군의 수가 훨씬 많으니 이기지 못할 싸움은 아니다.”

그는 북아프리카산 전투 코끼리 12마리를 전열의 맨 앞에 세우고 코끼리 부대 바로 뒤에는 투창과 작은 방패로 무장한 경보병 4천 명을 산개시켰다.

그리고 리비아 창병 1만 7천 명을 본대로 삼고 그 좌우에 누미디아 출신 궁수를 각각 1천 5백 명씩 배치했다.

카르타고군의 좌익과 우익에는 북아프리카 중기병과 누미디아 투창기병을 각각 2천 기씩 배치되어 수가 적은 로마의 기병대에게 돌격할 준비를 마쳤다.

아피우스는 이에 맞서 경보병 벨리테스 3천 2백 명을 전열의 맨 앞에 세우고 그 뒤로 중무장한 로마 군단병과 동맹도시 보병대 1만 4천 8백 명을 본대로 삼았다.

로마군 본대의 좌익과 우익에는 로마 기병대와 동맹도시 기병대가 각각 1천 기씩 배치됐다.

수적으로 우세한 카르타고군은 진을 치고 꿈쩍도 하지 않는 적군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갔다.

양군의 거리가 50m 정도로 좁혀지자,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투 코끼리 부대를 내보내라!”

장군의 목소리가 시칠리아의 평원에 울려 퍼지자 기수를 목 위에 태운 전투 코끼리 열두 마리가 고막을 찢을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적을 향해 달려 나갔다.

―뿌우우우우우!

그러자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벨리테스들이 커다란 사냥감을 사냥하는 늑대무리처럼 돌진해 오는 코끼리를 피하며 투창을 던져 댔다.

“죽어라, 이 괴물들아!”

“다른 곳은 맞아 봐야 별 소용없다! 코와 귀를 노려라!”

빗발치는 투창이 코와 귀에 꽂히자 코끼리가 네 마리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목 위에 타고 있던 기수를 내동댕이치고는 전선을 이탈해 버렸다.

그러나 집채만 한 짐승이 지축을 울리며 돌진하는 모습을 보고 침착하게 창을 던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머지 코끼리 여덟 마리는 앞을 가로막은 벨리테스들이 겁을 먹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들의 사이를 통과해 로마군 본대를 거대한 발로 짓밟고 코로 후려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군 본대는 코끼리를 피해 도망치는 병사들 때문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크아아악!”

“코끼리가 미쳐 날뛴다! 도망쳐!”

아피우스는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도 겁에 질린 병사들을 지휘하며 본대의 혼란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코끼리 주변에서 떨어져라! 떨어지면서 투창을 던져!”

법무관의 침착한 대처에 수가 적은 코끼리들은 군단병들이 사방에서 던져 대는 로마군의 투창 필룸과 필라를 맞고 하나둘 쓰러져 갔다.

하지만, 로마군 본대의 진형은 이미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상태였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코끼리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뿔피리를 불어라! 전군 적에게 돌격하라!”

장군의 명령을 들은 나발수가 허리에 차고 있던 뿔피리를 입에 물고 힘차게 불었다.

―뿌우우우우우!

중후한 뿔피리 소리가 봄바람을 다고 평원 곳곳에 울려 퍼지자 2만 8천 명의 카르타고군이 무기를 높이 들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적을 향해 돌진했다.

먼저 전투 코끼리를 돌격시킨 후 전투를 벌이는 것은 카르타고군의 지휘관들이 가장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전술이었다.

아피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카르타고군과 전투를 벌여 본 경험이 없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기세가 오른 카르타고군의 맹렬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점차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전열의 맨 뒤에서 아군이 승기를 잡아 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을 호위하는 부관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서 명예로운 승리를 선물해 주시는구나!”

그러나 바로 그때,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평원에서 갑자기 우렁찬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화들짝 놀라며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 쪽을 바라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저 기병대가 대체 어디서 나타났다는 말이냐!”

그의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에 갑자기 나타난 로마군 기병 2천 기가 굶주린 늑대무리처럼 카르타고군의 배후로 돌진해 오는 모습이 비쳤다.

마르켈루스는 하스드루발의 견제에 지쳐 항구도시 메세나의 성벽 안에 틀어박힌 척을 해 카르타고군을 속이고는 기병 2천 기와 함께 수송선을 타고 시칠리아 북서부 해안에 몰래 상륙한 것이다.

로마의 맹장 마르켈루스는 기병대의 대열 맨 앞에서 검을 들고 돌진하면서 우레같은 목소리로 적진을 향해 소리쳤다.

“전장에서 장수의 모습을 살피시는 번개의 신 유피테르시여! 모든 로마인 중에서 가장 대장다운 저를 눈여겨보아 주소서! 이 전투에서 얻을 위대한 승리를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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