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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73화 (173/201)

[ 173 ] [172화] 하스드루발 vs 마르켈루스 (3)

전장에 난입한 마르켈루스의 기병대 2천 기는 가장 먼저 카르타고군 좌익에서 눈앞의 적을 몰아붙이고 있던 북아프리카 중기병대에게 달려들었다.

기병대장 멜카르트샤마는 적에게 배후를 잡혀 당황하는 부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외날검 팔카타를 높이 들고 소리쳤다.

“겁먹지 마라! 로마의 기병들은 하나같이 약해 빠졌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적에게 분수를 가르쳐 주자!”

그가 호기롭게 외친 후 말머리를 돌려 등 뒤에서 덮쳐 오는 적을 향해 달려가자 주변에 있던 북아프리카 중기병 수백 기가 함성을 지르며 대장을 따라 맹렬히 돌진했다.

“엘리사 여왕의 도시를 위하여!”

만약 적이 일반적인 로마 기병대였다면 기병대장 멜카르트샤마의 판단은 옳은 것이었다.

로마인 중에는 마상전투 기술이 뛰어난 자가 드문 데다 북아프리카 중기병대는 우츠 강철로 만든 무구와 등자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번 상대는 명장 한니발과 여러 번 사투를 벌이고도 살아남은 로마의 검 마르켈루스와 로마군의 최정예병이었다.

―투콱!

마르켈루스가 말을 달리며 내지른 창이 기병대장 멜카르트샤마의 얼굴에 명중하면서 소름 끼치는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그의 뒤를 따르던 카르타고 기병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적장의 일격에 비명도 질러 보지 못하고 전사하자 너무 놀란 나머지 적에게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마르켈루스의 기병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우렁찬 함성을 지르면서 얼어붙은 적을 향해 돌격했다.

“로마 인빅타!”

로마 기병들은 말을 달리며 긴 창을 머리 위로 들었다가 능숙한 솜씨로 북아프리카 중기병들의 갑옷으로 가려져 있지 않은 신체 부위를 세차게 찔렀다.

“크아악!”

얕보던 적에게 선수를 빼앗긴 카르타고의 기병 수백 명이 허벅지나 팔에서 피를 흘리며 낙마하고 말았다.

결국 본대 좌익을 지키던 카르타고군 기병대는 마르켈루스의 사나운 기세를 이겨 내지 못하고 전장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전직 법무관 아피우스는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고자 했다.

그가 직접 돌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 뿔나팔을 불려 하자 마르켈루스 다가와 아피우스를 말렸다.

“아피우스 전직 법무관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지금은 저놈들을 쫓을 때가 아닙니다!”

“마르켈루스 집정관님! 역시 집정관님이셨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치는 적을 쫓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전장을 넓게 보시죠! 중앙의 보병대와 반대편 측면에서는 아직 우리가 밀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아피우스는 고개를 돌려 전장의 중앙에서 분투하고 있는 로마 군단병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끄러움으로 볼을 붉힌 후 마르켈루스에게 대답했다.

“말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능력이 모자라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그런 말은 전투가 끝나고 합시다. 전직 법무관께서는 어서 본대로 돌아가 군단병들을 지휘하세요. 그동안 전 제 부하들과 함께 적군의 사령관을 공격하겠습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마르켈루스 집정관님께서 제 기병대도 함께 지휘해 주십시오.”

그 말에 마르켈루스는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아피우스에게 대답했다.

“풋내기들이 옆에서 얼쩡거리면 방해만 됩니다.”

그는 그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아피우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휘하의 기병 2천 기와 함께 카르타고군의 총사령관을 처치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그러자 본대의 후방에서 지휘에 전념하고 있던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곧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오! 바알 함몬이시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멜카르트샤마가 적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분명 적이 복병을 숨길 만한 장소는 전부 뒤졌거늘!”

그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믿었던 기병대장의 부대가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로마 놈들이 등자를 사용하다니!”

마르켈루스는 작년에 한니발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면서 등자의 효용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등자를 양산해 기병들에게 나눠 주자는 그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대부분의 로마 시민이 야만인들이 사용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발받침을 자랑스러운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로마 기병대가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법상 병사 개개인이 자신의 무구를 직접 장만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도 로마의 보수적인 정치인들이 등자 보급을 꺼린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재를 털어 자신이 지휘하는 기병들에게만이라도 등자를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이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재능 면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무장이었지만, 나름 수십 년 동안 전장을 누빈 경험으로 눈앞의 적장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섣불리 맞서 싸웠다가는 2만 8천 명의 아군이 전멸한다.

그는 자신의 직감이 보내오는 다급한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 * *

“릴리바이움이 로마군에게 함락당했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기원전 214년 5월 중순.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막사에서 시라쿠사에서 히포크라테스가 보낸 서신을 읽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는 시라쿠사군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 북동부에 있는 로마의 동맹도시 메사나를 포위할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숙적 마르켈루스의 군대가 그 도시에서 거의 한 달 가까이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 가둬 버렸다고 생각한 맹수가 어느새 시칠리아 북부의 해안선을 따라 항해해 대머리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물리치고 시칠리아 남서부 끝자락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 릴리바이움까지 점령해 버린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다시 자리에 앉아 마음을 다스리며 전령에게 물었다.

“릴리바이움은 해군과 육군이 협공을 해야 함락시킬 수 있는 도시이지 않나. 그 도시에는 본국의 대함대가 정박 중이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마르켈루스가 그 큰 도시를 함락시켰지?”

“적장이 메사나에서 시칠리아 서부로 데려온 건 기병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자가 끌고 온 함대는 겨우 오단 노선 스무 척이긴 했지만, 시칠리아 북서부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해군의 함대와 힘을 합쳐 릴리바이움의 아군 함대를 몰아냈다고 합니다.”

“하아··· 기가 찰 노릇이구만.”

그가 생각하기에 마르켈루스의 과감한 군사작전은 도박 그 자체였다.

시칠리아 북부 해안은 아직 로마의 영역이긴 하지만, 사르데냐에 주둔하고 있는 바르카 가문의 함대가 수시로 해안 지대의 항구도시를 공격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런 위험한 곳을 겨우 전함 20척과 기병 2천 기를 태운 수송선으로 구성된 로마의 함대가 항해하다 보면 최소 50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적 함대와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하스드루발의 생각에 그곳을 마르켈루스의 함대가 무사히 지날 확률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반반.

로마의 맹장은 자신과 부하 2천 명의 목숨을 판돈으로 건 도박판에 과감하게 주사위를 던졌고 승리를 쟁취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한니발이 그토록 마르켈루스에게 고전한 이유를 실감했다.

‘형이나 나는 적장의 생각을 완전히 읽어서 백 프로 승리를 확신하지 않으면 전투를 피하지. 그래서 마르켈루스 같은 임기응변에 엄청나게 강한 적장은 상대하기가 까다로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겨 버리니 이거 원. 1차 포에니 전쟁 때 아버지를 상대하던 로마군의 기분이 딱 이랬겠는데.’

하스드루발은 간신히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한번 전령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군의 피해 상황은 어떻게 되나?”

“릴리바이움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이만팔천 명 중 약 만팔천 명이 로마군에게 죽거나 사로잡혔습니다. 해군 쪽은 전함 백 척 중 마흔한 척을 잃었습니다. 생존자들은 릴리바이움이 함락되기 전에 배를 타고 시라쿠사로 도망쳤습니다. ”

“그나마 생각보다 살아남은 병력이 많아서 다행이군.”

그는 전령의 말을 들은 후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앞으로의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제 시칠리아의 로마군은 바다와 육지 양면에서 시라쿠사로 몰려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스드루발의 병력과 대머리 하스드루발의 잔존 병력, 그리고 시라쿠사군에서 회전에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까지 합치면 대략 4만 명.

현재 마르켈루스가 이끌고 있는 로마군과 거의 비슷한 숫자였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이 마르켈루스의 승전 소식에 고무돼서 그에게 지원군을 보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또한 다른 시칠리아의 식민도시들과 달리 주민 대부분이 라틴인인 메사나도 로마군에게 힘을 보탤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로마 최고의 맹장이 이끄는 군대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회전을 벌이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시라쿠사를 공격할 마르켈루스에게 불의의 역습을 날릴 계책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하스드루발은 즉시 군사회의를 열었다.

모든 장교가 막사 안의 자기 자리에 앉자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당장 메사나를 둘러싼 포위망을 풀어라! 최대한 빨리 레온티니에서 요양 중이신 히에로니무스 전하를 모시고 시라쿠사로 돌아가야 한다!”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시니사 왕자를 비롯한 부관들이 군영 곳곳으로 흩어져 숙영지의 천막을 해체하고 군수품을 수레에 실었다.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연합군은 전령이 도착한 다음 날 아침까지 모든 채비를 마치고 남쪽의 레온티니를 향해 행군했다.

원 역사의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에서 북쪽으로 약 50km쯤 떨어진 곳의 내륙에 있는 도시 레온티니를 순식간에 함락시킨 다음 그곳에 사는 친카르타고파 시민 수천 명을 잔인하게 학살한다.

하스드루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히에로니무스 왕을 피신시키면서 왕의 입을 빌려 레온티니의 시민들에게도 도시를 버리고 대피할 것을 명령했다.

마시니사 왕자는 당나귀의 등에 가재도구를 실은 후 피난길에 오르는 레온티니 시민들을 보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씁쓸한 광경이구만. 시팍스 왕이 이끄는 마사에실리족의 군대가 내 부족을 공격했을 때도 많은 백성들이 저렇게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났었지.”

“너무 상심하지 마, 마시니사. 굴욕은 잠깐이지만, 우리가 마르켈루스를 물리치고 얻게 될 명예는 영원히 역사에 남을 거다. 사냥감이 강력해야 큰 명성을 얻게 되지 않겠어?”

“하스드루발. 여전히 자신만만하구나. 시라쿠사의 성벽이 높고 튼튼한 건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성벽은 적군을 막긴 해도 죽이진 못하잖아.”

“아. 너 아직 시라쿠사의 성벽에는 올라가 본 적 없구나.”

“아직 없지.”

“시라쿠사에 돌아가서 성벽에 올라가 보면 내 생각을 알 수 있을 거야.”

하스드루발은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로 돌아온 후 마시시나 왕자와 함께 도시의 남쪽 해안선을 둘러싼 성벽에 올랐다.

마시니사 왕자는 계단을 올라 성벽 위에 서자마자 두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뜨고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세···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신들께서 만드신 물건인가?”

그곳에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거대하고 기괴한 모습의 다양한 기계가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마시니사 왕자의 모습을 보고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르키메데스 선생님께서 예전에 만들어 두신 수성병기(守城兵器)들이야. 나와 만나기 전에 시라쿠사의 선대왕 히에론의 명령으로 만드셨다고 하더라.”

“과연··· 이런 물건이 있으면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시라쿠사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하겠어!”

“점령하지 못하게 하는 것 정도로는 부족하지. 마르켈루스가 이 병기에 부하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평정심을 잃었을 때가 그자가 마지막으로 햇빛을 보는 날이 될 거야.”

하스드루발은 마시니사 왕자에게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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