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 [175화] 하스드루발 vs 마르켈루스 (6)
히포크라테스는 하스드루발의 제안대로 에피키데스와 대머리 하스드루발, 그리고 카르타고와 시라쿠사군의 장교 전원을 병영에 있는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참석자 전원이 회의실 중앙에 놓여 있는 원탁을 빙 둘러앉자 히포크라테스가 입을 열었다.
“어제 우리는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시라쿠사를 공격해 오는 로마군을 통쾌하게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집정관 마르켈루스는 여전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로마군은 여전히 시칠리아의 포위망을 더 견고히 다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시라쿠사의 재상 에피키데스가 대답했다.
“허허, 이탈리아에서는 한니발 장군님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괴롭혔다더니. 적장 마르켈루스는 꼭 아프리카의 자라 같은 자로군요. 한번 물면 통 놓질 않는 모양이니 말입니다. 성벽 뒤에 서 있는 기중기로 로마의 전함을 몇 척 더 뒤집어야 눈물을 흘리면서 입을 벌리려나요?”
재상의 농담에 몇몇 장교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거렸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에피키데스의 농담에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자라··· 마르켈루스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네. 그래서 오히려 웃음이 나오질 않는구나.’
현재 에피키데스를 포함한 시라쿠사인 대부분이 아르키메데스가 만든 기상천외한 병기의 위력에 취해 로마군이 곧 포위를 풀고 물러갈 것이라며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그가 몇 년이 지나도 시라쿠사를 점령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원 역사의 마르켈루스는 많은 전함과 병사를 잃으면서도 2년 동안이나 시라쿠사를 공격하다 도시의 성벽에 높이가 낮고 경계가 허술한 곳이 있음을 눈치챈다.
그 후 그는 동작이 날쌘 정예병을 선별해 때를 기다리다 달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마르켈루스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어 그리스인은 대부분 아르테미스 축제 날 밤에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로마군 정예병 수백 명은 몰래 시라쿠사의 성벽을 넘어 술에 취한 초병을 처치한 후 도시의 성문을 연다.
그렇게 기원전 8세기부터 이어져 온 도시국가 시라쿠사의 5백 년 역사는 한순간의 방심 때문에 로마의 속주가 되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지금은 내가 도시를 지키고 있으니 시라쿠사가 그토록 허망하게 멸망할 일은 없겠지만, 마르켈루스에게 발목이 잡혀 몇 년씩이나 여기 묶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하스드루발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의 시선을 자신에게 모은 후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아직 안심하면서 적장을 비웃을 때가 아닙니다. 적은 아직도 육군과 해군을 합쳐 팔만 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해 도시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이제 적장 마르켈루스는 끈질기게 버티면서 도시의 보급망을 차단해 우리를 굶주림에 지치게 만들려 할 겁니다.”
그 말에 에피키데스가 대답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의 말씀대로 입니다. 하지만 시라쿠사에는 앞으로 두 해는 버틸 수 있는 군량과 보급품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로마군이 항구의 수문을 난파선으로 틀어막아도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막지는 못할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로마군이 아무리 방비를 철저히 해도 야밤에 시라쿠사의 해안가로 접근하는 작은 수송선까지 막을 수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보급 문제는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제 형님이신 한니발 장군님께서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외로운 싸움을 이어 나가셔야만 할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에피키데스와 히포크라테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사람은 지금은 시라쿠사의 재상과 장군이 되었지만, 본래 바르카 가문의 장교로서 한니발과 함께 이탈리아의 전장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카르타고군에 유능한 야전 사령관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에피키데스는 부끄러움에 낯빛을 붉히며 하스드루발에게 대답했다.
“제가 작은 승리에 취해 그만 큰 그림을 놓치고 말았군요.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혹시 이미 로마군을 물리칠 계책을 준비해 두신 겁니까?”
“한 가지 생각해 둔 작전이 있긴 합니다.”
“오오! 역시! 부디 저희에게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미리 함정을 파 놓고 마르켈루스를 시라쿠사 시내로 유인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에피키데스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하스드루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히포크라테스가 하스드루발에게 물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 장군님. 마르켈루스는 로마인 중 가장 용맹하고 지략도 보통은 넘는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자를 그렇게 쉽게 속여 넘길 수 있겠습니까?”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무리겠지요. 그래서 카르타고나 시라쿠사의 장교나 시민 중 한 명을 거짓으로 투항시켜 마르켈루스가 다시 한번 목숨을 건 도박을 하도록 부추길 필요가 있습니다.”
“허허··· 적장이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면 간담이 서늘해지겠군요. 장군님께서 아군이라 정말 다행입니다.”
“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아무튼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카르타고와 시라쿠사를 향한 충성심이 굳건하면서도 마르켈루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인물을 찾아야 합니다.”
“분명 좋은 작전이지만, 말씀하신 인물을 찾으려면 시간을 좀 들여야 할 겁니다.”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화를 듣고만 있던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니, 제가 가게 해 주십시오.”
하스드루발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장군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님께서는 명문 귀족 가문의 가주이시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르켈루스를 속이는 건 위험한 임무입니다.”
“저도 말씀하신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이번 작전에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부끄럽게도 전··· 이번 전쟁이 시작된 후 카르타고군에서 처음으로 로마군에게 큰 패배를 당했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런 저를 못마땅해하셔서 제게 치욕을 줬다는 소문을 내면 마르켈루스를 속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 형 한니발의 계책에도 잘 넘어가지 않던 마르켈루스입니다. 그저 뜬소문만 믿고 장군님의 말을 신용할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군요.”
“그렇다면 물증을 눈앞에 들이밀면서 적장을 속이도록 하겠습니다.”
“네? 물증이라니요?”
“앞으로 한 달 동안 저를 감옥에 가두고 때때로 등에 채찍질을 해 주십시오. 제가 시라쿠사에서 간신히 탈출했다면서 그 상처를 보여 주면 마르켈루스도 저를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스드루발은 그의 말을 듣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
본래라면 ‘사르데냐를 무모하게 공격하다 로마군에게 크게 패해 많은 병사와 전함을 잃었다.’는 기록 한 줄만 남겼을 역사의 조연.
그는 장수로서의 자질은 부족할지언정, 엘리사 여왕의 도시를 향한 충절만은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그에게 공손하게 경례한 후 대답했다.
“장군님의 숭고한 희생을 절대로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 * *
군사회의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시라쿠사의 광장에서 에피키데스의 지시를 받은 포고꾼이 연단에 올라 히에로니무스 왕의 인장이 찍힌 포고문을 목청 높여 읽어 내려갔다.
“모든 시민들은 시라쿠사의 적법한 지배자이신 히에로니무스 전하의 말씀을 들어라! 히에로니무스 전하께서는 카르타고의 장군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청을 받아들여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해 시라쿠사와 카르타고 양국에 위험에 빠트린 무능한 장군 하스드루발 마고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셨다! 앞으로 두 달 뒤 바로 이곳에서 형이 집행될 것이다!”
시라쿠사의 시민들은 포고꾼의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카르타고에서는 패장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다는 말이 진짜였네.”
“장군이면 고귀한 가문 출신일 텐데. 카르타고인끼리의 일이니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딱하게 됐어.”
그 자극적인 소식은 며칠 지나지 않아 로마의 첩자들에 의해 시라쿠사의 높은 성벽을 넘어 로마군의 군영에 닿았다.
마르켈루스는 첩자가 밤중에 화살에 묶어 성벽 밖으로 쏜 서신을 읽고 난 후 부관들에게 말했다.
“카르타고인은 하나같이 돈만 알고 인간의 감정이 없다더니. 전투에서 한번 졌다고 동포를 사형시킨단 말이냐? 시라쿠사를 점령하고 나서 개선식의 행렬을 장식할 중요한 포로가 한 명 줄어서 조금 아쉽구나.”
마르켈루스는 첩자가 보낸 정보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로마 해군은 전함을 산개하여 성벽에 접근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시라쿠사를 공격했지만, 여전히 많은 전함과 병사만 잃고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제 로마군은 아르키메데스의 수성병기에 대한 공포심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시라쿠사 성벽 위에서 밧줄 하나만 흔들거려도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시라쿠사를 둘러싼 양군의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어느덧 한 달이 지나 기원전 214년의 계절은 7월 초 한여름에 접어들었다.
마르켈루스는 자신의 막사에서 뜨거워진 지중해의 햇살만큼이나 점점 더 타들어 가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한니발은 캄파니아와 아풀리아에서 활개를 치고 있겠지. 올해 안에 시칠리아 정벌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생각이었건만, 이대로는 내후년에도 저 도시를 점령할 자신이 없구나······.”
그는 황동으로 만든 수통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켰지만, 가슴속에서 들불처럼 번져 가는 불안감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로마군 군영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 한 명이 막사로 들어와 그에게 오른팔을 대각선으로 들어 올리며 경례했다.
마르켈루스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병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마르켈루스 집정관님께 보고드립니다. 조금 전 스스로 카르타고의 하스드루발 마고 장군이라고 밝힌 자가 군영으로 찾아와 로마에 망명하고 싶다며 집정관님을 뵙게 해 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냐? 어서 그자를 내 앞에 데리고 와라!”
“알겠습니다, 집정관님.”
집정관의 재촉에 병사는 빠른 걸음으로 막사 밖으로 나가 대머리 하스드루발을 마르켈루스에게 데려왔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막사 안으로 들어서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집정관에게 인사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다니, 신들께서 제게 너무 가혹하시군요. 히밀코 마고의 아들 하스드루발이라고 합니다.”
마르켈루스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대머리 하스드루발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볼이 움푹 들어가고 초췌한 몰골을 한 모습을 보니 한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마르켈루스는 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반갑다고 말하고 싶지만, 네 의도가 의심스러워 아직 그럴 수가 없군. 카르타고에서는 국법에 따라 패장이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구차하게 나에게 찾아와 목숨을 구걸한단 말인가?”
“죽음이 두려웠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국법에 따르면 백인회의 재판을 거쳐 카르타고의 광장에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지요. 비열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저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참아 내지 못하고 국법을 어겨 가며 저를 고문하고 타지에서 십자가형을 집행하려 했습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말을 마친 후 옷자락을 들추어 채찍에 맞은 상처를 마르켈루스에게 보여 주었다.
마르켈루스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끔찍한 상처를 보고 대머리 하스드루발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군. 하지만 로마가 그대를 받아들여서 얻을 게 뭐란 말인가? 내가 너를 노예로 팔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나?”
“제게 저를 모욕한 바르카 가문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신다면 로물루스의 나라에 시라쿠사를 바치겠습니다.”
“대체 무슨 수로?”
“시라쿠사의 성벽에서 높이가 낮고 경계가 허술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저와 제 가족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신다고 약속하면 직접 집정관님의 병사들을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마르켈루스는 그의 말을 듣고 입꼬리가 귓가에 닿도록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로마 시민권으로는 대가가 부족하겠군요! 정말 시라쿠사를 점령하게 되면 로마 원로원에 그대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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