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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77화 (177/201)

[ 177 ] [176화] 하스드루발 vs 마르켈루스 (7)

기원전 214년 7월 중순.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로마군에게 거짓으로 투항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아침.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로마군 숙영지에 마르켈루스가 내준 커다란 천막에서 군의관에게 진료를 받았다.

그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은 채로 군의관에게 상반신을 감고 있던 붕대를 풀도록 한 후, 채찍에 맞아 상처가 난 등을 보여 주면서 물었다.

“어떤가? 아직도 진물이나 피가 나고 있나?”

“아닙니다. 이제야 상처가 다 아물었군요. 그래도 당분간은 격하게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때, 마르켈루스가 군의관의 천막에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 하스드루발 장군님께서는 오늘 밤 많이 바쁘실 예정이거든.”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마의 집정관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마르켈루스 집정관님.”

“좋은 아침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는 통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새벽이 돼서야 간신히 잠들었지요.”

“별일이군요. 집정관님께서는 지난 일주일 동안 상당히 규칙적인 생활을 해 오셨지 않습니까?”

“드디어 오늘 밤 우리가 시라쿠사를 손에 넣고 교활한 적장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응징할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너무 기대된 나머지 다음 날 장가가는 청년처럼 잠이 오질 않더군요. 그래.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집정관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도 무장 나부랭이라 이 정도면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오늘 밤이 지나가 버리면 내년 타르겔리온의 달(현대의 5월에서 6월)에 열릴 아르테미스 축제 날까지 거사를 미뤄야 할 테니 말입니다.”

“말씀대로입니다. 바로 오늘 밤 히에로니무스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리다니. 신들께서 제 복수를 앞당겨 주시려는 모양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시라쿠사인들이 내일 아침 술에서 깨고 나서 도시의 주인이 바뀐 사실을 알고 경악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 통쾌한 기분이 드는군요.”

“동감입니다. 저와 함께 성벽을 오를 병사들은 준비를 마쳤습니까?”

“물론입니다. 군단병 중에서 가장 몸놀림이 재빠른 오백 명을 선별해 놨습니다. 그 정도면 시라쿠사의 북문을 점거하는 데 문제없겠지요?”

“내일은 성벽 위를 지키는 초병들도 술에 취해 있을 테니 충분할 겁니다.”

“좋습니다. 성벽을 무사히 올랐을 때와 성문을 점거한 직후에는 횃불을 흔들어 제게 신호를 보내는 걸 잊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마르켈루스는 대머리 하스드루발과의 대화를 마친 후 시라쿠사의 성벽을 오를 병사 5백 명에게 딱딱한 고급 빵과 고기를 하사해 아침 점심으로 배불리 먹였다.

그날 밤 자정이 지나자 드디어 로마군은 대머리 하스드루발의 안내를 받으며 시라쿠사 잠입작전을 개시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먼발치에 보이는 낡은 감시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로마군 병사들에게 말했다.

“바로 저기가 목적지다.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처럼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움직여라.”

그가 말을 마치고 앞장서자 몸집이 작고 날렵한 로마군 병사 5백 명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대머리 하스드루발과 로마군은 약 두 시간 동안 기어가다시피 시라쿠사의 성벽으로 다가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약 4m 높이의 성벽 위로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던졌다.

―카앙!

철제 갈고리가 성벽의 요철에 걸리면서 돌과 쇠가 부딪치며 난 요란한 소리가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로마군 병사들은 적의 초병이 그 소리를 들었을까 두려워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성벽 위에 서 있는 낡은 감시탑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가장 먼저 밧줄을 타고 성벽을 오른 후 휘파람을 불어 아래에서 대기 중인 로마군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삐이익!”

로마군 병사들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자마자 일제히 밧줄을 머리 위로 던진 다음 재빨리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로마군 병사 5백 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다음 지시를 내릴 카르타고인 장군이 아니라 성벽 아래에서 보이지 않도록 자세를 낮춘 채 검을 들고 있는 시라쿠사군 병사들이었다.

시라쿠사군 병사 1천 명은 맹렬한 기세로 함성을 지르며 성벽을 기어오르느라 지친 적에게 덤벼들었다.

“히에론 왕가를 위하여!”

이백 명이 넘는 로마군 병사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시라쿠사군 병사가 내지른 검에 찔려 쓰러지거나 적의 공격을 피하려던 아군의 등에 떠밀려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으아악!”

“적의 기습이다! 대머리 카르타고인이 우리를 배신했다!”

로마군 병사들은 수가 거의 반으로 줄고 나서야 품에서 로마군의 폭이 넓은 단검 푸기오를 꺼내 적에게 저항했다.

별이 가득한 여름 밤하늘 아래에서 장검에 베인 로마의 병사와 단검에 찔린 시라쿠사의 병사들이 흘린 뜨거운 피가 차가운 돌 성벽 위에 흘렀다.

로마군의 정예병들은 적의 함정에 빠지고도 물러서지 않고 분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수적으로 열세였던 데다 성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무거운 갑옷을 입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시라쿠사군의 공세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성벽을 오른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모두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낡은 감시탑 위에서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황이 종료된 것을 확인하고 횃불에 불을 붙인 다음 로마군의 군영에 신호를 보냈다.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의 성벽 위에서 흔들리는 횃불을 보고 들뜬 목소리로 부관들에게 소리쳤다.

“선발대가 무사히 잠입에 성공했구나! 서둘러 시라쿠사의 북문 쪽으로 이동한다! 군영을 지킬 트리아리를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

집정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로마군의 최고참병인 트리아리 6천 명을 제외한 5만 4천 명의 로마―메세나 연합군이 시라쿠사의 성문을 향해 진군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미리 시라쿠사의 북문 쪽 성벽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대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횃불을 흔든 후 아래로 내려가 로마군으로 위장한 시라쿠사군 병사 몇 명과 함께 성문을 열었다.

그는 마르켈루스가 대열의 맨 앞에서 성문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집정관을 반겼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겨우 반나절 만에 다시 만나는데도 이렇게 반가울 줄은 미처 몰랐군요. 그나저나 다른 병사들은 어디 갔습니까?”

“성벽 위에 있는 감시초소를 차례대로 들르면서 시라쿠사의 초병들을 처치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지시로군요. 이제 시라쿠사의 왕궁을 점령하러 갑시다. 어린 왕을 사로잡으면 나머지 시라쿠사인들도 저항을 포기할 겁니다.”

“대로를 쭉 따라가다가 광장과 신시가지를 지나면 바로 왕궁이 나옵니다. 제가 앞장설 테니 그리스어를 못하는 다른 병사들에게도 저를 잘 따라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조치해 놨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치자 5만 4천 명의 로마―메세나 연합군이 시라쿠사의 대로를 가득 메우며 왕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배신자 히에로니무스를 잡아라!”

아무도 파도처럼 몰려가는 대군을 가로막지 않았기에 마르켈루스는 금세 시라쿠사의 광장에 도착했다.

그때, 그를 호위하고 있던 열두 릭토르 중 한 명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르켈루스 집정관님··· 뭔가 이상합니다.”

마르켈루스는 뒤를 돌아보며 릭토르에게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아무리 한밤중이고 시라쿠사인들이 축제를 벌이느라 술에 취해 있다고는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시라쿠사 시민을 한 명도 못 만났······.”

바로 그때, 마르켈루스의 릭토르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로마군의 대열 한가운데서 요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콰앙!

마르켈루스는 폭발음이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이냐!”

그러자 그의 눈에 몸에 불이 붙은 로마군 병사 다섯 명이 바닥에 쓰러진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였다.

“끄아아아악!”

“살려 줘! 으아악!”

마르켈루스는 황급히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하스드루발 장군! 이게 대체···! 하스드루발 장군?”

그는 자신을 안내하던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잠시 한눈을 파는 새 사라지고 없자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런 빌어먹을! 두 카르타고인에게 감쪽같이 속았구나! 전군 후퇴하라! 최대한 빨리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오랜 준비 끝에 함정으로 유인해 낸 적장을 곱게 보내 줄 마음이 없었다.

그는 미리 광장에서 로마군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발사!!!”

그러자 카르타고군 병사가 쏜 자주색 신호탄 하나가 공중에서 폭발하더니, 둥근 광장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5층 건물의 옥상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을 넣은 후 불을 붙인 항아리 수백 개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시내에서 화공을 펼쳐도 평민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시라쿠사의 넓은 광장으로 마르켈루스를 유인했다.

마침내 로마군이 광장에 들어서자 하스드루발은 미리 광장 주변의 건물 옥상에 설치해 둔 소형 투석기로 적군의 머리 위로 인화 물질이 가득 담긴 불붙은 항아리를 쏘아 댄 것이다.

광장 곳곳에서 항아리 깨지는 소리와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로마와 메사나의 병사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적의 화공이다!”

“여기 있다간 다 타 죽는다! 골목으로 도망쳐!”

그러나 광장을 가득 메울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을 피해 도망치던 로마군 병사들은 이미 골목마다 매복해 있던 중무장한 카르타고군의 공격을 받고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마르켈루스는 붉은 화염이 일렁이는 광장과 그곳에서 쓰러져 가는 부하들을 황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내가 쓰러지면 로마의 운명은 어떻게 되단 말이냐! 위대한 번개의 신 유피테르시여! 이게 정녕 당신의 뜻이란 말입니까!”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피테르의 뜻은 아니겠지. 바알 함몬이면 또 모를까.”

그 말에 마르켈루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분노로 핏대가 선 눈에 하스드루발과 그를 호위하고 있는 신성대 병사 50여 명의 모습이 보였다.

“하스드루발! 뱀처럼 교활한 녀석들! 내가 네놈들의 비열한 계략에 넘어가고 말았구나!”

“여기서 당신과 말싸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면 포로로서 카르타고에 압송되겠지만, 당신의 지위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

“웃기는군! 새장에 갇혀서 사는 독수리도 있다더냐! 하스드루발 바르카! 여기서 너라도 길동무로 삼고 위대한 선조들께서 기다리고 계신 엘리시움으로 떠나겠다!”

마르켈루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검을 들고 상처 입은 사자처럼 적장에게 달려들었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무기를 드는 대신 조용히 오른팔을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건물 옥상에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마르켈루스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쐐애애애액!

“크으윽!”

마르켈루스는 온몸에 화살이 꽂히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다 하스드루발의 세 발자국 앞에서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그를 씁쓸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곁에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적이지만 영웅이라 부를 만한 자였다. 정중히 장례를 치른 다음 화장을 마치면 유골을 로마로 보내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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