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 [177화] 또 다른 덫
기원전 214년 7월 15일.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전장을 거침없이 누비던 로마의 검은 장렬하게 부러졌다.
또한 그와 함께 시라쿠사에 침입한 로마―메세나 연합군 병사 5만 4천 중 약 3만 명 정도가 전사하고 나머지는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난폭하게 밤새도록 일렁이던 광장의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은 전투를 마친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병사들이 미리 준비해 둔 모래와 소변을 쉴 새 없이 뿌려 댄 덕에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를 때 즈음에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검게 그을린 전사자들이 널려 있는 광장의 모습은 불이 꺼지기 전보다 한층 더 참혹했다.
하스드루발은 그 끔찍한 광경에서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업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십 대 시절부터 지겹게 전장을 떠돌아다녔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참혹한 장면이구나. 삼국지연의에서 남만의 병사들을 태워 죽인 제갈공명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때, 하스드루발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대한 승리를 거두신 다음 날에 왜 그리 울적한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그가 뒤돌아보자 전장을 정리하기 위해 시라쿠사의 병사들을 데려온 히포크라테스의 모습이 보였다.
하스드루발은 억지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슬슬 전쟁에 염증이 느껴져서 청승을 떨고 있었습니다.”
“저런··· 그러셨군요. 그러고 보니 장군님께서는 열네 살 때부터 전장에서 병사를 지휘하셨다지요. 그 어린 나이부터 저런 참혹한 장면을 보아 오셨다니··· 저 같은 자는 마음이 닳아서 예전에 전장에서 도망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러다가도 한나절쯤 지나면 다시 기운을 찾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여긴 이제 제가 정리할 테니 어서 왕궁으로 돌아가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곧 다음 전투가 벌어질 테니 오랜만에 단 며칠 동안이라도 휴가를 보내시지요.”
하스드루발은 히포크라테스의 말을 듣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숙적 마르켈루스와 그가 지휘하던 로마의 육군은 대부분 물리쳤지만, 시라쿠사를 해상에서 포위하고 있는 로마의 함대는 아직 건재했다.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완전히 장악하려면 아직도 150척에 가까운 전함을 보유하고 있는 시칠리아의 로마 해군을 일소해야 한다.
하스드루발은 해전 경험이라고는 단 한 번, 큰 매형 보밀카르가 지휘하는 전함에 타 봤을 뿐이었기에 되도록 대규모 해전을 치르지 않고 로마로부터 시칠리아를 탈환하고 싶었다.
그때, 한 가지 계책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스드루발은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더니 히포크라테스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전투의 영웅이신 하스드루발 마고 장군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왕궁에서 히에로니무스 전하와 에피키데스 재상님의 환대를 받으시면서 식사를 하고 계실 겁니다.”
“저도 어서 왕궁으로 돌아가 봐야겠군요. 그럼 이곳의 정리를 부탁드립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와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시라쿠사의 왕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스드루발은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맞이하는 궁전의 하인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마고 장군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히에로니무스 전하와의 식사를 마치시고 객실에서 쉬고 계십니다.”
“당장 나를 그리로 안내해 주게! 한시가 급한 일이네!”
하인은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해 대는 카르타고의 장군을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쉬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하스드루발은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자신과 이름이 같은 중년의 장군에게 인사했다.
“장군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렇게 무사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 장군님! 겨우 일주일 만에 뵙는데도 몇 년 만에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군요! 어젯밤에 마르켈루스에게서 도망쳐서 광장 근처의 건물에 숨어 장군님께서 전투를 지휘하시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봤습니다! 시내에서 화공을 사용할 생각을 하시다니! 다시 한번 장군님의 지략에 감탄하고 말았지 뭡니까!”
“전부 장군님의 희생 덕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젯밤의 승리에 대해서 말씀을 더 나누고 싶지만, 사실 지금은 로마 해군을 상대할 방법을 궁리하다 장군님께 여쭤보고 싶은 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셨군요. 해전이라면 저도 어느 정도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로마군의 군영에서 지내실 때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점령하고 나면 마르켈루스가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로마의 함대를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었는지 들으신 게 있습니까?”
“그자에게서 일단 수문을 막고 있는 난파선을 치운 후에 시라쿠사의 군항에 함대를 정박시킬 계획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입에 귀에 걸릴 정도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랬군요!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서 우리를 돕고 계신 게 분명합니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머리 하스드루발을 남겨 둔 채 서둘러 객실 밖으로 나왔다.
하스드루발은 왕궁을 나와 카르타고군의 군영에서 한창 마르켈루스의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마르켈루스가 끼고 있던 반지를 당장 내게 가져와라. 그리고 불타지 않은 로마군의 군기(軍旗)가 있으면 잘 챙겨 두고. 둘 다 앞으로 써먹을 데가 많이 있을 거다.”
* * *
시라쿠사 광장에서의 전투가 끝난 날 오후.
로마 해군의 선원들은 집정관에게 전날 받은 지시대로 시라쿠사의 수문으로 조금씩 함대를 몰아가면서 초조함과 두려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장엄한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만약 집정관 마르켈루스가 이끄는 군대가 항구 쪽의 성벽을 점거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 뒤에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기중기가 다시 한번 자신이 타고 있는 전함을 취객이 술잔을 던지듯 내동댕이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거인의 팔처럼 보이는 기중기 여러 대가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리리리리릭!
로마 해군의 병사들은 그 소름 끼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실성한 사람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5단 노선의 갑판 위를 뛰어다녔다.
“으아아아아아! 이제 다 끝났어! 육군이 시라쿠사를 점령하지 못했나 봐!”
“멍청한 땅개 새끼들!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고 했어! 배 돌려! 물고기 밥 되기 싫으면 잽싸게 배 돌리라고!”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거대한 기중기는 항구의 수문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얕은 바다에 가라앉아 선수만 내밀고 있는 난파선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기함의 갑판 위에서 있는 한 선원이 손가락으로 성벽 위에 우뚝 서 있는 감시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봐! 감시탑 위에 아퀼리페르가 군기를 들고 서 있다!”
그 외침을 들은 로마 해군 병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선원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치켜들고 감시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금으로 도금한 독수리 모양 군기 아퀼라를 오른손에 높이 들고 있는 로마군의 기수(旗手) 아퀼리페르의 모습이 보였다.
3만 명이 넘는 로마 함대의 선원과 병사들은 아퀼리페르의 당찬 모습을 보자마자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 댔다.
“와아아아아! 마르켈루스 집정관님! 만세!!! 시라쿠사를 점령했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
그들이 승리의 기쁨에 취해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아르키메데스의 기중기는 수문을 막고 있던 난파선을 모두 치워 항구의 한구석에 쌓아 두었다.
로마의 5단 노선 150척은 눈앞의 장애물이 사라지자 의기양양하게 시라쿠사의 항구로 들어서서 부둣가에 배를 정박했다.
그러나 로마 해군의 선원과 병사들이 웃고 떠들며 배에서 내리자마자 마주친 것은 정복자를 환영하는 시라쿠사의 시민이 아닌, 전 함대가 정박하자마자 항구로 달려 들어오는 완전무장한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병사들이었다.
“와아아아아아!”
로마인들은 수만 명의 적군이 물밀 듯이 부둣가로 몰려오자 기겁하며 다시 배 위로 뛰어 올라가며 소리쳤다.
“속았다! 적의 복병이 몰려온다!”
“다시 배에 타! 어서 출항해!”
몇몇 로마의 전함이 급히 출항하며 항구의 수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수문은 이미 시라쿠사의 병사들이 쳐 놓은 통나무처럼 굵은 쇠사슬로 굳게 닫혀 있었다.
로마 해군의 병사들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에게 저항해야 할지 투항해야 할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든 채로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그때, 하스드루발이 카르타고군 병사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로마 해군의 앞으로 나서면서 라틴어로 말했다.
“너희들 마음대로 시라쿠사에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내 허락이 필요할 거다. 이미 너희들의 집정관은 전장에서 전사했다.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면 심한 대우는 하지 않겠다.”
그 말에 울상을 짓고 있던 로마인들이 고개를 돌려 하스드루발을 바라보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젊은 카르타고군 장군의 오른손에 집정관이 늘 손가락에 끼고 있던 굵은 금반지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금반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로마의 군통수권자인 집정관이 공문서에 도장을 찍을 때 사용하는 인장 반지였다.
로마 해군 병사들은 집정관과 로마 육군이 이미 완패했음을 깨닫고 무기를 땅에 던지고 순순히 카르타고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하스드루발은 현재 로마가 보유한 전함의 약 절반인 5단 노선 150척을 나포하고 포로 3만 5천 명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붙잡았다.
로마의 대함대와 처절한 해전을 치를 각오를 하고 있었던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병사들은 강력한 적군이 순순히 항복하자 우레같은 승리의 함성을 질러 댔다.
“하스드루발 바르카 장군 만세!”
“자비로운 타니트 여신이시여! 당신의 도시를 위해 싸우는 젊은 장군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그와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글썽였다.
“아아! 저는 어린 시절 로마에게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통째로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이나 침실에 틀어박혀 베개에 얼굴을 박고 울었었습니다! 이제 괴물 같은 마르켈루스가 사라지고 강력한 로마의 함대도 반토막이 났으니 로마가 쓰러질 날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하스드루발도 기쁜 표정으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 섣부른 말을 하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드디어 긴 전쟁의 끝이 보이는 것 같군요.”
“지난 한 달 동안의 고생이 결실을 맺어서 정말 기쁩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군님. 장군님께서 카르타고를 위해 해 주실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남겨 두신 계책이 있습니까?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장군님의 말씀이라면 뭐든 따르겠습니다.”
“그럼 사흘 뒤에 배를 타고 카르타고로 돌아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고향에 도착하시면 제 계획을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카르타고에 말입니까··· 장군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하스드루발의 계책으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의 로마 해군을 일망타진한 지 엿새가 지난 날.
대머리 하스드루발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젊은 장군의 말대로 5단 노선을 타고 오랜만에 카르타고에 도착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가족들이 사는 고향 땅을 밟았음에도 그의 등줄기에는 굵은 식은땀 한 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국법대로라면 나는 조만간 십자가에 매달리겠지··· 내 실책으로 카르타고 시민이 몇천 명이나 죽은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하스드루발이 자신을 카르타고로 보낸 게 마지막으로 가족을 만나게 하려는 젊은 장군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울상을 짓고 있던 중년 장군은 항구 밖으로 나서자마자 두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거리로 몰려나온 카르타고의 시민들이 기쁨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러 댔기 때문이다.
“고결한 하스드루발 만세!!!”
“시칠리아 탈환의 일등공신 하스드루발 마고 만세!”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영문을 몰라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올해의 수페트로 당선된 보밀카르가 그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하스드루발 마고 장군님! 전 카르타고 시민이 장군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보밀카르 수페트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패장인 저를 보고 시민들이 환호하다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군요.”
“제 처남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사흘 전 연락선을 보내 장군님께서 엘리사 여왕의 도시를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지 자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카르타고인 중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처남이 개선장군의 명예를 장군님께 양보했습니다. 어서 전차에 오르시지요.”
하스드루발은 대머리 하스드루발의 희생에 보답을 해 주는 동시에 그를 전쟁영웅으로 만들어 카르타고 시민들이 군대에 자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의 계획은 예상보다도 크게 성공해 카르타고 시민들은 그 대신 큰 희생을 치른 대머리 하스드루발을 개선장군으로 삼자는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제 대머리 하스드루발에서 고결한 하스드루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중년의 장군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개선장군으로서 전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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