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 [178화] 릴리바이움 탈환 작전
기원전 214년 7월 18일 한낮.
대머리 하스드루발이 개선식이 자신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카르타고로 가는 배에 오르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시라쿠사 주변의 로마군 군영에 남아 있던 군단병 6천 명을 공격해 거의 전원을 붙잡아 포로로 삼았다.
그는 그들의 처우를 시라쿠사의 장군 히포크라테스에게 맡긴 후 아직 시칠리아에 남아 있는 로마의 세력을 몰아낼 준비를 하는 데 전념했다.
“대도시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이 전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기 시작하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 그렇게 되면 내년 가을쯤은 돼야 시칠리아를 전부 정복할 수 있겠지.”
마르켈루스가 이끌던 로마군이 하스드루발의 연환계에 걸려 전멸한 후, 시칠리아에 남아 있는 로마군은 채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칠리아의 다른 작은 도시나 마을은 시라쿠사를 포위하고 있던 로마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스스로 성문을 열고 카르타고군에게 항복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시칠리아 서남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릴리바이움이나 북동쪽 끝에 있는 로마의 동맹도시 메사나는 사정이 달랐다.
두 항구도시는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도시인 데다 적어도 7천 명 이상의 수비병력이 배치되어 있어 수만 명의 군대를 끌고 가도 반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특히 릴리바이움의 경우에는 정공법으로 공략하려면 마르켈루스가 카르타고 해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곳에 남겨 둔 5단 노선 5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물리쳐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때, 시라쿠사의 재상 에피키데스가 카르타고군의 지휘관 막사 안으로 들어오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편히 쉬고 계신지요?”
“에피키데스 재상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아··· 하스드루발 장군님. 부디 저와 단둘이 계실 때는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와 히포크라테스의 바르카 가문과 한니발 장군님에 대한 충성심은 여전히 변함없습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에피키데스 재상님. 제가 재상님과 히포크라테스 장군님을 하대하는 것을 우연히 누가 보고 듣게 된다면, 좋지 못한 소문이 전 지중해에 퍼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역시 매사에 주도면밀하시군요. 그렇다면 장군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제 뜻을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그저께 부탁드린 가짜 로마군 전령은 목적지로 출발했는지요?”
“말씀하신 대로 라틴어를 잘하는 시라쿠사인 장교 두 명을 뽑아 위조문서를 줘서 릴리바이움과 메사나로 보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시라쿠사에서의 전투가 끝난 다음 날, 릴리바이움의 로마군과 메세나 정부에 보낼 가짜 승전보를 서둘러 작성한 후 마르켈루스에게 빼앗은 인장 반지를 사용해 집정관의 직인을 찍었다.
두 위조 서류에는 모두 마르켈루스가 시라쿠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 로마 해군은 릴리바이움으로, 육군은 메세나로 돌아갈 거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적군을 그 위조 서류로 속인 후 로마 해군의 5단 노선을 타고 군단병의 사슬갑옷 로리카 하마타를 입은 카르타고군 병사들을 보내 스스로 항구의 수문을 열게 한다는 계획을 짜낸 것이다.
“부디 로마와 메사나의 적군이 잘 속아 줘야 할 텐데··· 이제 로마군으로 위장할 함대와 병사들은 카르타고인 중에서 차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도시의 지도자가 제대로 속았는지 가짜 전령이 돌아오고 나서 군대를 움직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번 작전은 우리의 승리가 두 도시에 알려지기 전에 적을 속이는 겁니다. 괜히 시일을 끌면 로마군으로 위장한 우리의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적들은 농성전 준비를 마치고 성문을 걸어 잠그겠지요.”
“과연··· 분명 수는 적지만, 로마군 패잔병 몇 명이 전장에서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장군님께서 군대를 준비하시는 동안 저는 로마 해군에게서 빼앗은 전함에 보급품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하스드루발은 에피키데스와의 대화를 마친 후, 이번 작전에 동원될 카르타고군 병사들에게 로마군의 무구를 몸에 걸치도록 지시했다.
* * *
기원전 214년 7월 20일 아침.
릴리바이움의 항구 수문을 지키고 있는 초병 두 명이 감시탑 위에 서서 아침 햇살이 사금처럼 반짝이는 지중해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잡담을 하고 있었다.
두 병사 중 아직 신병 티를 벗지 못한 젊은 병사가 중년으로 보이는 선임병에게 말했다.
“오비디우스 십인대장님. 혹시 요즘 릴리바이움 시내에 떠도는 소문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문 말이냐?”
“시라쿠사를 공격하고 계신 마르켈루스 집정관님께서 고전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저도 얼마 전에 시칠리아 동부에서 온 그리스인 상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시라쿠사 출신 천재 기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만들어 둔 거대한 병기가 오단 노선을 낚아채서 무슨 취객이 술잔 던지듯 뒤집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되냐? 신이 아닌 이상에야 어지간한 집보다 훨씬 큰 전함을 무슨 수로 던져 버린다는 말이냐?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경계나 잘 서라.”
“시··· 시정하겠습니다.”
그때 한 로마군 병사가 숨을 헐떡이며 망루 위로 뛰어 올라오더니 십인대장에게 경례하며 말했다.
“오비디우스 십인대장님께 군단장님의 지시사항을 전달해 드립니다!”
“백인대장님이 아니라 군단장님의 지시사항이라고? 뭔가 착각한 거 아니냐? 나 같은 병사에게 군단장님께서 직접 지시를 내리실 리가 없잖아.”
“사실입니다! 조금 전 시라쿠사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마르켈루스 집정관님께서 드디어 시라쿠사를 점령하신 다음 함대를 이끌고 릴리바이움으로 돌아오고 계시니 항구의 초병은 아군의 함대가 보이면 즉시 상관에게 알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세상에! 그게 정말이냐!?”
“군단장님께서 마르켈루스 집정관님의 직인이 찍혀 있는 승전보를 직접 확인하셨다고 합니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야! 겨우 한 달 만에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리던 시라쿠사를 점령하시다니!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보구나!”
그로부터 한나절이 지난 후 석양이 지기 시작할 때 즈음에 정말로 릴리바이움의 앞바다에 5단 노선 1백 척과 수송선 1백 척으로 구성된 대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 초병들은 로마 해군 특유의 폭이 넓은 5단 노선을 보고 즉시 감시탑 아래에 있는 아군들에게 집정관의 함대가 도착한 사실을 알렸다.
도시를 지키고 있던 로마군 병사들은 마르켈루스가 보급품을 잔뜩 가지고 릴리바이움에 돌아온 줄 알고 기쁨에 취해 환호성을 질러 댔다.
“로마의 검 마르켈루스 만세!”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로마의 적 한니발을 물리치자!”
그러나 함대가 항구에 정박한 후 배에서 병사들이 내리자 웃는 얼굴로 마중 나왔던 로마군 장교와 병사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말았다.
2백 척의 커다란 배에서 내린 병사들은 로마군의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같이 턱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정관을 맞이하기 위해 환영단의 맨 앞에 서 있던 로마군의 군단장은 즉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적의 기습이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로마군 병사들은 군단장의 날카로운 외침을 듣고 황급히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왼손에 들고 있던 뿔나팔을 힘껏 불었다.
―뿌우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1만 4천 명의 신성대 병사와 리비아인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우와아아아아아!”
“바알 함몬을 위하여!”
로마군은 전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겨우 1천 명 정도만이 항구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큰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카르타고군의 맹렬한 공격을 버텨 낼 수 없었다.
로마의 군단장은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결국 신성대 병사들에게 붙잡혀 부둣가에 무릎 꿇려졌다.
그 모습을 본 로마군의 백인대장들은 항구 밖으로 도망치면서 휘하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항구 밖으로 도망쳐라! 전군에 아크로폴리스로 퇴각하라고 전해라!”
릴리바이움처럼 그리스인이 건설한 도시는 도시의 중앙에 높은 언덕 위에 성벽을 두른 도심부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스드루발은 그곳에 로마군이 숨으면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는 데 몇 달을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항구에서의 전투가 끝나자마자 전군을 아크로폴리스로 이끌었다.
“이제 아크로폴리스로 진격한다! 도시의 지리를 잘 아는 자들은 앞장서도록!”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르켈루스에게 릴리바이움을 빼앗기기 전에 그곳의 수비병으로 있었던 병사들이 앞장서서 아군을 아크로폴리스로 이끌었다.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도시의 대로와 광장을 급류처럼 휩쓸고 지나가 순식간에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성문으로 몰려갔다.
그때는 마침 시내에 있던 로마군 병사 수천 명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라 성문이 열려 있었다.
성벽 위의 로마군 초병들이 적군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남쪽! 거리 이 스타디온(약 360m)! 적의 대군이 몰려옵니다!”
그 말을 들은 로마군 장교가 다급한 목소리로 성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성문을 닫아라! 아크로폴리스에 적군이 들이닥치면 끝장이다!”
그러자 성문을 지날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 병사들은 카르타고군 병사들이 대로를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문을 닫으려는 동료를 밀치며 서로 아크로폴리스로 몰려 들어가려고 했다.
“이런 미친! 너희들만 살겠다는 거냐!”
“나 들어간 다음에 문 닫으라고!”
하스드루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력을 아크로폴리스 안으로 이끌었다.
“지금이다! 적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치고 들어가는 거다!”
로마군 병사들은 결국 아군의 두 배가 훨씬 넘는 병력이 성문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잠시 저항하다 곧 무기를 버리고 카르타고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 * *
기원전 214년 8월 초.
로마의 시민 백만 명은 지중해를 건너온 전령이 침통한 표정으로 전한 소식을 듣고 하나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하스드루발의 계책에 넘어가 로마가 시칠리아 전선에서 잃은 병력은 약 10만 명.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연합이 입은 손실 이상의 병력과 시칠리아의 남부와 중부를 한순간에 잃고 만 것이다.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모인 로마 원로원 의원 중에는 침통한 표정으로 한 달 전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말을 입에 담는 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올림포스의 신들께서 로마를 저버리신 게 틀림없습니다. 이만 카르타고에 항복하고 평화협정을 맺읍시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의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원 역사에서는 작년인 기원전 215년에 집정관직을 맡았을 정도로 로마의 귀족파 의원 중에서 영향력 있는 의원이었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그가 로마가 결코 적에게 패배한 채로 평화협정을 맺지 않는 로마의 전통을 져버리자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료 집정관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달려온 파비우스는 포스투미우스의 말을 듣고 그답지 않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포스투미우스 의원님! 대체 그게 무슨 망언이란 말입니까! 북아프리카의 야만인들이 로마 시내에서 개선식을 벌이며 카피톨리노 언덕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겁니까!”
그의 말에 다른 원로원 의원들의 얼굴에 분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선뜻 파비우스의 말에 힘을 실어 주는 자도 없었다.
로마는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그들 중 전사자는 3만 명이 조금 넘는 정도고 나머지는 카르타고에 포로로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약 7만 명의 포로 중 절반 정도는 로마 시민이니 그들을 구하고자 카르타고에 항복하자는 의견이 로마 원로원 내부에서 커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카르타고에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다행히 메사나인들은 적장 하스드루발의 간악한 계략을 눈치채고 적에게 성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시칠리아 북부는 우리 로마가 다스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드리아해를 건너올 준비를 하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어떻게 막으실 생각입니까?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가 곧 타렌툼에 대군을 이끌고 상륙해 한니발의 군대와 합류할 예정이라는 첩보는 이미 들으셨겠지요?”
포스투미우스의 말에 파비우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로마는 시칠리아 전선에 투입했던 5단 노선 200척을 모두 잃었다.
이제 남은 5단 노선은 이탈리아반도 서부의 항구도시 오스티아에 정박 중인 1백 척뿐.
그 정도 규모의 함대로는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에서 공격해 올 카르타고 해군을 막기에도 벅찰 것이 분명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키피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동료 의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많은 동포가 명예롭게 전장에서 엘리시움으로 떠났지만, 로마에는 여전히 팔십만 명이 넘는 로물루스의 후손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이 전쟁을 포기하기에는 이릅니다.”
그 말을 듣고 포스투미우스가 조소를 띠며 대답했다.
“존경하는 스키피오 법무관님. 법무관님께서는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전쟁은 사람 수가 많은 쪽이 무조건 이기는 게 아닙니다. 그 병사를 먹일 식량과 적의 함대를 막을 배가 부족하니 문제인 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당장 한니발과 합류하려는 필리포스 왕의 군대를 막을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제게 두 군단과 이단 노선 이백 척을 몰 해군의 지휘권을 맡겨 주십시오. 이달 안에 마케도니아의 야욕을 꺾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