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 [179화] 암브라시아 만 해전
기원전 214년 8월 초.
로마의 일곱 언덕이 맹장 마르켈루스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필리포스 왕은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의 왕궁에서 밝게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카르타고군의 기세가 정말 대단하군! 로마 해군이 거의 전멸했단 말이지!”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필리포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지난 7년 동안 로마를 공격할 보병 4만 5천 명과 기병 5천 기를 육성하고 5단 노선 15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조직해 마케도니아의 군사력을 강화해 왔다.
그러나 필리포스 왕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로마의 속주 일리리아를 점령했을 뿐, 이탈리아반도를 공격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는 17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7년 동안 궁정의 암투와 적대적인 주변국과의 마찰을 겪어 오면서 20대의 패기를 찾아볼 수 없는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필리포스 왕은 마케도니아의 수송선단이 이탈리아반도의 동쪽 바다인 아드리아해를 건너는 동안 지중해 최강의 로마 해군의 공격을 받는 것이 두려워 로마 해군이 카르타고 해군과 싸우다 약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얼마 전에 한때 5단 노선을 4백 척이나 보유했던 로마 해군이 지난 4년간 카르타고에게 거듭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전력이 전성기의 4분의 1로 줄어 버렸다.
게다가 로마의 남은 전함도 카르타고 해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대부분의 서쪽 해안 지대에 투입되었다.
또한, 약 한 달 전부터 셀레우코스 제국이 하스드루발의 도움으로 조기에 이집트 원정을 마치고 다시 마케도니아의 발목을 잡던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런 로마를 공격하기에 좋은 여러 조건이 갖춰지자 필리포스 왕은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이제 스파르타나 아이톨리아도 국경선에서 시비를 거는 걸 멈췄고 바닷길도 시원하게 뚫렸으니 카르타고와의 약속을 지킬 때가 됐군. 슬슬 한니발이 기다리고 있는 타렌툼으로 가 볼까!”
그는 마케도니아의 최정예 기병대 헤타이로이와 함께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 오르는 상상을 하며 5만 대군을 마케도니아 남서부의 대도시 암브라시아에 집결시켰다.
* * *
기원전 214년 8월 말.
스키피오는 이탈리아 북동부 해안도시 앙코나에서 2단 노선 2백 척과 휘하의 2개 군단을 태운 수송선단을 이끌고 마케도니아의 서남부 해안 지역에 있는 암브라시아 만을 향해 출항해 닷새 동안 항해했다.
스키피오의 참모로서 로마에 망명한 후 처음으로 전장에 서게 된 소시비오스는 기함의 갑판 위에 서서 순풍을 맞아 한껏 부풀어 오른 돛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행히 바다의 신 포세이돈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군. 로물루스의 후손들이 국고에서 마지막 은화 한 닢까지 쥐어짜서 마련한 함대와 군단을 측은하게 보신 걸까.”
그는 혼잣말을 한 후 한숨을 쉬며 기함 주변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는 함대를 바라보았다.
스키피오의 함대는 기함을 제외하면 전부 5단 노선보다 훨씬 작은 2단 노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수송선에 타고 있던 군단병들은 급한 대로 로마를 수비하던 병력을 많이 데려온 탓에 회전 경험이 없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기껏 알렉산드리아에서 탈출하고 시라쿠사에서 반란을 조장해 가면서까지 로마 시민권을 얻었건만··· 이대로는 며칠 뒤에 물고기 밥이 되어 버리든지 마케도니아군 팔랑기타이의 긴 창에 찔려 죽든지 둘 중 하나겠구나.”
본래 이집트의 간신이었던 그는 로마의 함대가 운 좋게 적의 함대와 바다에서 맞닥뜨리지 않고 무사히 육지에 상륙할 경우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필리포스 왕에게 투항해 버려? 아니다. 내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재상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바로 죽일 거야.”
그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는 소시비오스의 등 뒤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시비오스. 혼잣말을 즐기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그가 귓가를 스치는 서늘한 음성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외눈의 젊은 법무관 스키피오가 보였다.
소시비오스는 아직 발음이 어색한 라틴어로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 스키피오 법무관님.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려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께 우리를 지켜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곧 해전이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넵튠이겠지. 자네도 이제 로마 시민이 됐으니 로마식 이름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을 부르며 기도하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법무관님. 그나저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만······.”
“뭔가?”
“부끄럽지만, 저는 이 나이 먹도록 전장에 서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하물며 해전은 완전히 처음인지라 제가 법무관님께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자네의 역할은 마케도니아의 해안가에 상륙한 다음부터 시작일세. 그 전에는 눈먼 화살에 맞지 않도록 자기 몸이나 잘 지키게.”
소시비오스는 스키피오의 말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 법무관이 마치 마케도니아의 함대를 이미 물리친 듯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키피오가 20대의 젊은 혈기에 취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여기고는 로마 해군의 기함과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몸서리쳤다.
바로 그때, 기함의 선수에서 전방을 살피고 있던 선원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방! 거리 육 스타디온(약 1.1km)! 마케도니아의 함대로 추정되는 전함 다수 발견!”
스키피오는 선원의 외침을 듣고 빠른 발걸음으로 선수로 걸어가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갈색 눈동자에 마케도니아를 상징하는 문장인 베르기나의 태양을 돛에 그려 넣은 5단 노선과 수송선 수백 척이 로마의 함대에 다가오는 모습이 비쳤다.
필리포스 왕이 직접 이끄는 마케도니아의 함대는 폭이 좁은 암브라시아 만을 가득 메우며 벌집에서 기어 나오는 벌떼처럼 아드리아해로 몰려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로마 함대의 선원들은 적 함대의 위용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스키피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기함의 선원들에게 소리쳤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구나! 전 함대 초승달 진형을 짜라! 암브라시아 만의 출구를 틀어막아라!”
그 외침을 들은 기함의 기수가 커다란 깃발을 흔들어 전 함대에 법무관의 명령을 알렸다.
로마의 함대는 이탈리아반도를 떠나기 전에 지시받은 대로 돛을 내린 후 학익진을 펼쳐 좁은 만을 빠져나려는 마케도니아 함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필리포스 왕은 자신의 기함인 거대한 10단 노선의 갑판 위에서 자그마한 로마의 2단 노선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어이가 없군! 늑대 이백 마리가 모이면 사자 백오십 마리를 이길 수 있다던가? 정찰용으로나 쓰는 이단 노선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거지?”
그의 주변에 있던 부관들도 너털웃음을 웃은 후 젊은 왕의 말에 맞장구쳤다.
“한때 지중해를 호령하던 로마 해군이 완전히 몰락했군요! 저 초라한 함대는 우리 전함의 충각이 스치자마자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러질 겁니다!”
필리포스 왕은 부관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함의 돛을 내린 후 로마 함대의 초승달 모양 포위망을 향해 전속력으로 노를 저어 갔다.
고대 해전의 교과서와도 같은 흔한 전술이었지만, 전함의 체급에서 차이가 나는 로마 해군의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바라보았다.
스키피오는 마케도니아의 함대가 적당한 거리로 다가오자 전 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전 함대! 적 전함의 사이로 파고들어 공격하라!”
로마 함대의 각 전함 선장들은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지자 정면에서 돌진해 오는 적 5단 노선의 충각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적 전함의 옆면으로 배를 몰아 갔다.
기동성이 뛰어난 로마의 2단 노선 2백 척은 선회 능력이 떨어지는 마케도니아의 5단 노선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로마의 전함에 타고 있던 로마군 병사들은 적의 거대한 5단 노선 옆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화살을 쏘고 투창을 던지며 마케도니아의 갑판 위에 있는 선원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고요하던 암브라시아 만에 적의 투척 무기에 맞아 다친 마케도니아인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적에게 활을 쏠 틈을 주지 마라! 배를 붙여서 적선에 올라타!”
마케도니아 해군의 선장들은 로마의 2단 노선에 배를 붙여 백병전을 벌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 막 함대를 창설해 처음으로 해전을 치르는 마케도니아의 선원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해전을 치러 온 로마의 선원보다 배를 잘 몰 수는 없었다.
스키피오는 전세가 점점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마케도니아의 함대에 결정타를 날렸다.
“전 함대! 발리스타를 발사하라!”
다시 한번 기함의 갑판 위에서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자, 로마 함대의 선장들은 휘하의 선원에게 전함의 옆면에 설치된 소형 발리스타를 발사하도록 명령했다.
로마의 선원들은 발리스타에 타르나 기름을 묻힌 커다란 화살을 장전한 후 불을 붙인 다음 적함의 갑판 위로 발사했다.
―투웅!
수백 개의 불붙은 굵은 화살이 날아들자 마케도니아의 5단 노선 수십 척이 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필리포스 왕은 전열의 후방에서 그 장면을 황망한 눈빛으로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다 죽어 가는 줄 알았던 로마 해군에게 이렇게 고전하다니··· 상처 입은 맹수를 잘못 건드리고 만 것인가······.”
그의 주변에는 수십 명의 부관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해전 경험이 풍부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기에 마케도니아의 부관들은 그저 젊은 왕의 입만 바라보며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필리포스 폐하!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오오! 포세이돈이시여! 저희를 지켜 주소서! 이대로는 적의 전함이 곧 기함에도 도달하고 말 겁니다!”
필리포스 왕은 부관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소리쳤다.
“내 주변에 이렇게 많은 장수들이 있건만, 쓸 만한 조언을 하는 자가 어찌 단 한 명도 없단 말이냐!”
그는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전멸을 면한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필리포스 왕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
하나는 남은 함대를 한 덩이로 뭉쳐 전함과 수송선 양쪽의 희생을 감수하고 로마 해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한니발이 있는 타렌툼으로 향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까운 항구도시로 퇴각하여 수송선에 타고 있는 육군만이라도 지켜 내는 것.
그는 왕이 된 이후 항상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겨 온 자신의 행동수칙을 이번에도 충실히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애써 길러 온 육군을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 전 함대! 암브라시아 남쪽의 항구로 퇴각하라!”
* * *
암브라시아 만에서의 전투가 끝난 지 일주일 뒤.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 해군이 이탈리아반도로 향하던 필리포스 왕의 함대를 격퇴하고 마케도니아에 상륙했다는 소식은 시칠리아에 있는 하스드루발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한니발이 보낸 전령이 가져온 서신을 읽고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스키피오가 움직였나··· 설마 히스파니아가 아니라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줄이야. 이러면 필리포스 왕의 성격상 로마 정벌을 포기할 게 뻔하잖아······.”
원 역사의 필리포스 왕은 일리리아를 정벌한 후 함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를 공격할 준비를 하다 로마 함대가 자신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항구도시로 다가오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내륙으로 퇴각해 버린 겁쟁이였다.
하스드루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제 마케도니아의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가만··· 스키피오가 마케도니아에 가 있으면 큰형이 히스파니아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하밀카르는 지중해를 넘어 바르카 가문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로마군을 막기 위해 양자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에게 히스파니아의 수비를 맡겼다.
그러나 이제 로마 해군은 궤멸적인 손실을 입어 히스파니아로 병력을 실어 나를 여력이 없는 데다 가장 신경 쓰였던 스키피오는 동유럽에 있는 마케도니아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래! 큰형을 시칠리아로 불러서 함께 메세나를 공격하자! 마케도니아군 대신 내가 한니발 형을 도우러 가면 될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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