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 [180화] 스키피오 vs 필리포스 왕 (1)
기원전 214년 9월 초.
하스드루발이 시라쿠사에서 작성한 서신은 무사히 지중해를 건너 노바 카르타고에 있는 공정한 하스드루발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적혀 있는 동생의 필체를 확인하고 기쁜 목소리로 곁에 있던 부관들에게 말했다.
“내 동생들이 시칠리아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전군에 소집령을 내리고 수송선의 돛을 손질하라! 내가 직접 지원군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떠날 것이다!”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은 총독 대리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의 명령에 따라 히스파니아 곳곳에 모병관을 파견하여 켈트족과 이베리아족의 병사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 * *
노바 카르타고로 수만 명의 병사가 모이고 있을 때, 로마는 갈리아 남부의 동맹도시 마실리아를 상실한 이후에는 히스파니아에 첩자를 파견하지 못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로마 원로원은 로마 해군이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상실한 이후, 히스파니아에 주둔하고 있던 바르카 가문의 병력이 언젠가 북 시칠리아나 이탈리아를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스키피오도 동료 의원들과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기에 서둘러 마케도니아 정벌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는 필리포스 왕의 함대와 해전을 벌여 승리한 후 암브라시아 만 동북쪽 해안지대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 한 곳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스키피오는 그곳의 항구에 육군을 상륙한 후 전군을 도시의 광장에 집결시킨 다음 연단에 올라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전투를 치른 직후라 피곤할 거다! 하지만 조국 로마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에게 느긋하게 쉴 시간 따위는 없다! 지금 당장 도시의 성벽 밖에 숙영지를 지어라! 전투 준비를 마치는 대로 북쪽으로 도망친 필리포스 왕을 추격할 것이다!”
사기가 오른 로마군 병사들은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젊은 법무관의 말에 우렁찬 함성으로 화답했다.
“마르스 신의 화신 스키피오 만세!”
“겁쟁이 필리포스의 엉덩이에 투창을 박아 버리자!”
2만 명이 넘는 로마군 병사들은 스키피오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도시를 약탈해 군량을 보충한 후 성벽 밖으로 몰려 나가 숙영지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인근 주민들은 그 소식을 입에서 입으로 옮겼다.
그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로마군이 마케도니아 남서부 해안지대에 상륙했고 이제 내륙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 그리스에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그러자 오랜 세월 마케도니아와 대립해 왔던 수많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스키피오의 활약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특히 마케도니아와 앙숙인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는 필리포스 왕이 로마군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마침내 이번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2천 명의 중장보병을 이끌고 스키피오에게 찾아갔다.
스키피오는 스파르타의 전령에게 곧 왕이 찾아갈 거라는 연락을 받고 소시비오스와 함께 직접 숙영지의 입구까지 나와 뤼쿠르고스 왕을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뤼쿠르고스 전하! 전설적인 용맹으로 유명한 스파르타의 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스키피오 법무관님. 저야말로 간악한 필리포스 왕을 물리치신 영웅을 이렇게 만나 기쁩니다.”
“제 막사 안에 주안상을 차려 놓았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셔서 여독을 푸시지요.”
스키피오와 뤼쿠르고스 왕은 웃는 얼굴로 함께 지휘관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뒤를 따라가는 소시비오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그는 8년 전 이집트의 재상 노릇을 하던 시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스파르타의 선대 왕 클레오메네스 3세를 자결하게 만든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메네스 3세는 왕좌에 오른 후 빈민의 부채를 탕감하고 국유지를 평민에게 분배하는 정책을 펼쳐 점차 쇠약해져만 가는 스파르타를 되살리고자 노력해 온 개혁 군주였다.
그러나 기원전 222년 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며 클레오메네스 3세는 이집트에 망명하게 되고, 명군이었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암군인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로파토르가 왕위에 오른 뒤 권력을 잡은 소시비오스는 고결한 인품을 가진 클레오메네스 3세를 눈엣가시로 여겨 궁지에 몰아 죽게 만든 것이다.
그가 클레오메네스 3세의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면 스파르타의 정예병이 필요한 스키피오가 그를 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소시비오스는 지휘관 막사 안으로 따라 들어가 입을 닫고 스키피오와 뤼쿠르고스 왕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다 술잔이 몇 번 오가며 뤼쿠르고스 왕의 볼이 취기로 붉게 물들자, 소시비오스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뤼쿠르고스 전하께서 마케도니아에 복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군대를 이끌고 나서신 사실을 알면, 스파르타의 선대 왕이신 클레오메네스께서도 지하에서 기뻐하실 겁니다.”
그러자 밝게 웃고 있던 뤼쿠르고스 왕은 불쾌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클레오메네스 그자의 이름을 짐의 앞에서 꺼내지 마시오! 그자는 스파르타의 수치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전투를 벌여 여러 번 이긴 스파르타인의 귀감이라는 소문을 언뜻 들었었습니다만······.”
“작은 공적이 부풀려졌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그자는 천민들만 감싸고 도는 위선자였지요. 짐은 스파르타의 유일한 왕으로서 신분 간의 질서를 바로 세우고 마케도니아를 무찔러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겁니다!”
소시비오스는 그의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스파르타는 전통적으로 전원 귀족으로 구성된 감독관단이 두 명의 왕을 선출해 나라를 다스리는 2왕제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방금 뤼쿠르고스 왕은 자신이 ‘스파르타의 유일한 왕’이라고 소개했다.
소시비오스는 뤼쿠르고스 왕이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약 8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스파르타의 2왕제를 폐지하고 동료 왕을 폐위시킨 뒤 세습군주제를 도입한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스파르타의 왕이 자신과 동류인 것을 알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벌써 전하의 용맹 앞에 마케도니아와 카르타고가 무릎 꿇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분명 전하께서는 생전에 강력한 군사 대국 스파르타를 재건하실 겁니다.”
* * *
기원전 214년 9월 말.
요새 도시 암브라시아의 성벽 뒤에 숨어 있던 필리포스 왕은 스키피오의 숙영지 근처를 정찰하고 온 기병대의 보고를 받은 후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망할 도시국가 놈들! 로마군이 굶주릴 때까지 기다리려 했더니 그리스 땅에 발을 들인 바르바로이를 돕다니!”
그는 이탈리아반도를 떠난 스키피오가 로마로부터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칠리아 속주 대부분과 동맹국 이집트를 잃은 로마는 군량이 부족해진 데다 얼마 전부터 카르타고의 동맹도시 타렌툼의 함대가 아드리아해를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를 뭉개 버리려는 듯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은 바다 건너 셀레우코스 제국의 위협에 대항하면서도 국고의 마지막 은화 한 닢까지 긁어내서 스키피오에게 지원군과 보급품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올해가 가기 전에 내가 가진 병력보다 적장의 병력이 더 많아지겠군······.”
필리포스 왕은 얼마 전 암브라시아 만 해전의 패배에서 전함 대부분을 잃었지만, 수송선단 대부분을 지켜 내며 여전히 약 4만 9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있었다.
반면 스키피오의 병력은 로마의 병사 2만 명에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의 지원군 1만 명을 합쳐 약 3만 명 정도였다.
그는 유명한 정복자인 피로스 왕의 군대를 무찌른 것으로 유명한 로마 군단병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영 불안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만만치 않은 적이 나날이 강해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다고 판단했다.
필리포스 왕은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전군을 이끌고 암브라시아의 성문을 나와 북쪽으로 진군했다.
스키피오는 정찰병에게 마케도니아군이 드디어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뤼쿠르고스 왕의 막사에 찾아가 말했다.
“뤼쿠르고스 전하! 드디어 필리포스 왕이 오늘 아침에 암브라시아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그 겁쟁이를 추격하도록 합시다.”
로마와 그리스의 연합군은 서둘러 숙영지를 철거하고 필리포스 왕의 군대를 뒤쫓았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꼬박 하루를 행군하여 앞서 나가던 적군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마침내 스파르타의 원수 마케도니아군과 마주한 뤼쿠르고스 왕은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중얼거렸다.
“필리포스 이 교활한 녀석! 퇴각하는 척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전장으로 우리를 유인한 거였군!”
필리포스 왕은 암브라시아에서 북쪽으로 6km 정도 떨어져 있는 언덕에 전군을 배치하고 로마―그리스 도시국가의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시비오스는 고슴도치처럼 긴 창을 세우고 있는 마케도니아의 장창병 수만 명을 보고 마른침을 삼키며 스키피오에게 말했다.
“스키피오 법무관님. 적군은 우리보다 수가 많은 데다 이미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일단 군대를 물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는 소시비오스의 말에 바로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두 사람과 달리 기세등등한 적군을 바라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쟁의 신 마르스께서 오늘 우리에게 위대한 승리를 선물하실 모양입니다.”
소시비오스는 그 말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스키피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법무관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지를 점령한 대군을 무슨 수로 물리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반나절만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걸세. 뤼쿠르고스 전하. 예정대로 그리스 중장보병대의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젊은 장군의 말을 듣고 청동 흉갑으로 가려진 뤼쿠르고스의 등줄기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렀다.
그러나 적에게 등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스파르타인의 자존심이 로마인에게 나약한 소리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치열한 전투가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겁쟁이 필리포스에게 등을 보이고 전 그리스의 조롱을 받느니 죽어서 방패에 실려 스파르타로 돌아가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해가 지기 전에 저와 전리품을 분배하시게 될 겁니다.”
스키피오는 두 사람과의 대화를 마친 후 등 뒤의 군단병들에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겁먹을 것 없다! 전군 적을 향해 전진하라!”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나발수가 즉시 뿔나팔을 입에 물고 힘껏 불었다.
―뿌우우우우우우.
우렁찬 나팔 소리가 나무 한 그루 없는 구릉 지대에 울려 퍼지자마자 검과 방패를 든 로마 군단병과 청동 갑옷과 철제 창으로 무장한 그리스인 중장보병대가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필리포스 왕은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보며 기뻐 날뛰었다.
“그래! 스키피오 이 자식! 미끼를 물 수밖에 없었을 테지! 여기서 퇴각하면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네게 실망해 지원을 멈출 테니까 말이야!”
그의 주변에 있던 부관들이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왕에게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폐하!”
“폐하의 지략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필리포스 왕은 그들의 아부가 싫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적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임을 잊지는 않았다.
“입발림 소리는 전투가 끝나고 듣겠다. 모두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라! 전군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왕의 명령이 전군에 알려지자 수만 명의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이 지른 전투의 함성이 지축을 흔들었다.
“아라라라라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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