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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82화 (182/201)

[ 182 ] [181화] 스키피오 vs 필리포스 왕 (2)

“아라라라라이!”

전투가 시작되자 마케도니아의 팔랑기타이 부대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가호를 비는 함성을 지르며 언덕을 오르는 적을 향해 천천히 전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는 자신이 지휘를 맡은 부대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로마 군단병의 왼편에 자리 잡은 그리스 중장보병들과 함께 적군이 앞으로 내민 길이 4m가 넘는 창 사리사를 보고 중얼거렸다.

“잊고 싶은 기억을 생각나게 하는 광경이로군.”

뤼쿠르고스 왕은 스파르타가 다른 도시국가들과 연합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마케도니아와 싸우다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던 전투를 떠올렸다.

8년 전 스파르타의 전사 6천 명은 강력한 적에 대항해 용맹스럽게 싸웠지만, 코끼리의 돌진도 막아 내는 긴 창의 벽을 결국 뚫지 못했다.

당시 참혹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스파르타인은 고작 2백 명뿐.

그중 한 명이었던 뤼쿠르고스 왕은 그날 허벅지를 창에 찔려 입은 오래된 흉터가 다시 욱신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전장에 선 로마군 병사들도 아직 사리사를 사용하는 팔랑기타이 부대와 전투를 벌인 경험이 없어 시야를 가득 메운 창의 벽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로마―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 진영에서는 오직 스키피오만이 냉철하게 전장을 살피며 머릿속에서 적과 아군의 전력을 비교했다.

마케도니아군 진영 중앙의 본대는 2만 5천 명의 팔랑기타이 부대와, 그 오른편에 자리 잡은 검과 방패로 무장한 경보병 케트라티 1만 6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대의 앞에는 투창 여러 개와 작은 방패, 그리고 단검으로 무장한 경보병 펠타스트 5천 명이 마케도니아군에서 가장 먼저 적에게 달려가 투창을 던질 준비를 마쳤다.

또한 팔랑기타이 부대의 바로 왼쪽에는 마케도니아군에서 유일한 중장보병인 토라키타이 4천 명이 사슬갑옷과 타원형의 큰 방패, 그리고 길이 2m 정도의 짧은 창으로 무장하고 본대의 좌측면을 지켰다.

보병대의 좌익과 우익에는 마케도니아군의 최정예기병 헤타이로이가 각각 2천 기씩 배치되어 두 개의 큰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청동 투구를 쓰고 전방에서 다가오는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로마군 본대 대열의 맨 앞에서 마케도니아군 진영을 바라보며 곁에 있는 부관들에게 말했다.

“적의 보병대는 우리보다 수가 많지만, 중장보병이 별로 없다. 저 창벽을 뚫고 지나가 근접전을 벌이면 튼튼한 로리카 하마타를 입은 우리 군단병과 청동 흉갑을 입은 그리스의 창병이 적을 압도할 거다.”

그 말에 소시비오스가 대답했다.

“법무관님의 말씀대로입니다만, 정면으로 적에게 돌진했다가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나방과 같은 꼴이 될 겁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곧 전쟁의 신 마르스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실 걸세.”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양쪽 군대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자 먼저 투창을 든 경보병끼리의 전투가 시작됐다.

마케도니아군의 선봉을 맡은 펠타스트 5천 명이 적진으로 달려가며 일제히 투창을 던지자 로마군의 경보병 벨리테스 3천 2백 명도 산개 진형을 유지하며 적에게 응사했다.

수천 개의 투창이 갑옷 없이 작은 나무 방패만으로 몸을 가린 경보병들의 머리 위로 빗발치자, 전장의 곳곳에서 함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재블린이 날아온다! 머리와 가슴을 가려라!”

“으아악! 내 팔! 내 팔!”

몇 분간 치열한 사격전이 펼쳐진 끝에, 고지를 차지한 데다 수적으로 우세한 마케도니아군의 펠타스트 부대가 로마군의 벨리테스 부대를 압도했다.

마케도니아군 우익의 기병대를 지휘하고 있던 필리포스 왕은 아군의 경보병대가 서전에서 로마군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고 전 보병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승기를 놓치지 마라! 전군 속도를 올려서 적을 향해 전진하라!”

왕의 명령에 다시 한번 중후한 뿔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자, 펠타스트들은 마케도니아군 본대의 후방으로 빠지고 팔랑기타이와 케트라티 부대가 더 빠른 걸음으로 전방을 향해 나아갔다.

로마와 그리스 도시국가의 병사들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적군을 바라보며 방패와 무기를 움켜쥐고 총사령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렇게 양군의 본대 간격이 양 30m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마케도니아군은 곳곳에 바위와 구덩이가 널려 있어 지형이 울퉁불퉁한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일렬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던 팔랑기타이 부대의 진형이 흐트러지면서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창의 벽 곳곳에 빈틈이 드러났다.

스키피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등 뒤의 병사들에게 외쳤다.

“지금이다! 전군 적 진형이 흐트러진 곳을 향해 돌격하라!”

드디어 기다리던 돌격 명령이 떨어지자 2만 5천 명이 넘는 로마와 그리스의 중장보병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전방위에서 적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마케도니아군의 장교들은 적군이 갑자기 전속력으로 돌격해 오자 서둘러 흐트러진 진형을 바로잡으려 했다.

“뭣들 하냐! 적이 검을 들고 멧돼지처럼 달려오는 게 안 보이냐? 다들 제 위치로 돌아가서 창을 앞으로 내밀어라!”

그러나 팔랑기타이들은 너무 길고 무거운 창을 든 탓에 신속하게 진형의 빈틈을 다시 메꾸지 못했고 로마 군단병들은 앞으로 달려가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투창 필룸을 던졌다.

―휘익!

성인 남자 키만 한 투창 수천 개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팔랑기타이들이 한 팔에 고정시켜 놓은 작은 방패에 박혔다.

그러자 방패에 꽂힌 필룸의 자루가 땅에 닿아 끌리는 바람에 팔랑기타이들은 더욱 굼뜨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마케도니아군 진형의 빈틈은 더 크게 벌어졌다.

로마의 군단병들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미친 듯이 적의 가슴과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4m가 넘는 긴 창 사리사는 코앞까지 다가온 적과 싸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팔랑기타이 부대의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어쩔 수 없다! 창을 버리고 단검을 들어!”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군단병에게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천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단검을 든 병사가 철제 사슬갑옷을 입고 날이 두꺼운 검을 든 로마 군단병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이제 마케도니아의 본대는 양군의 기병들이 맞붙기도 전에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필리포스 왕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오! 아레스시여! 잠시 진형이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오다니! 당장 케트라티와 토라키타이 부대에 아군을 도우라고 전해라!”

그러나 검과 방패로 무장한 마케도니아의 경보병들은 아군을 도울 처지가 못 됐다.

뤼쿠르고스 왕이 이끄는 그리스의 중장보병대가 적진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고 마케도니아군의 경보병대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변변한 갑옷도 걸치지 못한 경보병대는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앞세운 중장보병대의 맹렬한 공격을 이겨 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필리포스 왕은 그 모습을 보고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로마에 아직도 저렇게 무서운 적장이 남아 있었다니! 지난 칠 년간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구나!”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패색이 짙은 전장을 한번 바라본 후 기병대만을 데리고 전장에서 도망쳤다.

* * *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가 마케도니아의 5만 대군을 궤멸시켰다.’

이 짧은 문장 한 줄은 암브라시아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가 끝난 후 순식간에 로마와 카르타고에 알려져 파란을 일으켰다.

마르켈루스가 전사한 후 실의에 빠져 있던 로마 시민들은 광장으로 몰려나와 스키피오의 이름을 외쳐 댔고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마케도니쿠스’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하사했다.

반면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강력한 동맹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타렌툼에서 필리포스 왕과 합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니발은 시라쿠사의 옛 부하 에피키데스가 보내온 서신을 읽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필리포스 그 멍청한 자식··· 처음 군권을 잡은 새파란 애송이에게 마케도니아가 멸망하게 생겼구나. 본국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작은 도시나 공격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겠군.”

그는 즉시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타렌툼의 성문을 나와 알프스산맥을 넘은 이후 늘 겨울을 나던 게루니움으로 향했다.

한편, 무역상을 통해 히스파니아에서 그 소식을 접한 공정한 하스드루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겨우 스물네 살 먹은 청년이 지휘관이었단 말이지··· 로마에도 내 동생들 같은 천재가 있었군. 하루라도 빨리 한니발을 도우려면 시칠리아 정벌에 모든 걸 다 쏟아부어야겠구만.”

그는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대리의 권한으로 바르카 가문이 그동안 노바 카르타고에 모아 둔 막대한 자금을 아낌없이 풀어 예정보다 더 많은 공성 병기를 신속하게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월이 중순에 접어들 때,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3만 명의 지원군과 막대한 보급품을 실은 수송선단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 시칠리아 북동부의 항구도시 타우로메니움에 도착했다.

그가 항구에 함대를 정박시킨 후 배에서 내리자, 부둣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스드루발이 눈물을 글썽이며 형제를 맞이했다.

“큰형! 이게 대체 얼마 만이에요!”

“우리 작은 하스드루발! 못 보던 사이에 덩치가 더 좋아졌네!”

“카르타고 노바에 있는 다른 가족들도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지요?”

“그럼! 두 제수씨가 독수공방하느라 외로워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지!”

“아··· 그러고 보니 아내 얼굴을 못 본 지가 벌써 오 년이 다 되어 가네요. 얼른 전쟁을 끝내야 할 텐데 마케도니아가 거의 망해 버렸으니······.”

“그건 안타깝게 됐지만, 로마도 그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어 왔으니 전세는 아직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한니발이 그동안 이탈리아반도에서 로마군을 몇 번이나 박살 냈잖아? 넌 전 지중해를 헤집고 다니면서 로마의 동맹국을 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고.”

“다 큰형이 히스파니아에서 보급을 든든하게 해 주셔서 가능했던 거지요 뭐.”

“나만 편하게 지내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좀 불편했는데,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구나. 이번에도 네가 좋아할 만한 걸 많이 가지고 왔다. 가증스러운 메사나인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동생과의 대화를 마치고 함대의 선원들에게 수송선에서 히스파니아에서 가져온 물자를 하역하도록 지시했다.

곧 항구의 하역장은 트레뷰셋의 부품이 실려 있는 수레 수백 대와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이 가득 들어 있는 커다란 나무통 수천 개로 가득 찼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는 하스드루발의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당연히 충분하죠! 이 정도면 트레뷰셋을 조립하고 일주일 안에 메사나를 점령할 수 있을 거예요!”

* * *

기원전 214년 10월 말.

하스드루발은 6만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의 마지막으로 남은 로마의 동맹도시 메사나를 포위했다.

그가 육군을 이끌고 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 도시를 에워싸는 동안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5단 노선 150척을 지휘하여 메사나의 항구를 봉쇄했다.

하스드루발은 포위망이 완성된 후 메사나의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마지막으로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메사나 원로원은 단 한 줄의 글귀가 적힌 답장을 사절에게 건네줘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메사나는 야만인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하스드루발은 손에 들고 있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찢어 버리면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렇게 나오겠다는 말이지! 좋다! 그럼 네놈들의 소원대로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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