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 [186화] 치킨 게임 (1)
하스드루발의 시대를 앞선 전술 덕에 라티움 지역 최남단의 도시 시누에사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는 카르타고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개전 초기부터 일찌감치 사기가 떨어진 로마군은 집정관 그라쿠스가 퇴각 명령을 내리자마자 앞다투어 전장에서 벗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의 전투를 치르지 않아 체력이 남아돌았던 누미디아 궁기병 6천 기는 집요하게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며 화살통에서 화살이 동날 때까지 열심히 활을 쏘았다.
―피유우웅!
날카로운 활시위 소리가 앞만 보며 도망치는 로마 군단병들의 귓가를 스치자, 수천 개의 화살이 그들의 머리 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으아아악!”
곳곳에서 몸 여기저기에 화살을 맞은 로마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그라쿠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포기하지 말고 달려라! 모두 살아서 언젠가 카르타고인에게 복수하는 거다!”
로마 군단병들은 말에서 내려 병사들과 달리는 집정관의 외침을 듣고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그들은 시누에사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 민투르나이 부근에 도착해서야 도시 수비대의 도움을 받아 카르타고군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고 민투르나이의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그라쿠스는 잠도 별로 자지 못하고 꼬박 이틀을 달렸기에 쉬고 싶었지만, 로마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지금 집정관인 그에게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는 없었다.
그는 도시 근처에 숙영지를 짓고 곧바로 살아남은 장교들을 불러 이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 정도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의 막사에서 살아남은 대대장 전원의 보고를 받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로 절망에 빠졌다.
“오오, 유피테르 신이시여··· 겨우 반나절 정도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렇게 많은 병력을 잃었단 말인가······.”
로마군은 6만 대군에서 5만 4천 명의 보병 중 약 3만 명과 6천 기의 기병 중 약 1천 기를 속절없이 잃고 말았다.
게다가 두 전직 집정관은 다른 장교들에 비해 눈에 띄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좋은 말을 타고 있었던 탓에 누미디아 궁기병의 눈에 띄어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평민 출신 집정관 그라쿠스는 오히려 말에서 내려 병사들 틈에서 군대를 지휘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라쿠스는 잠시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마음을 다잡은 후 서신 하나를 적은 다음 기병 한 명에게 그것을 전해 주며 말했다.
“당장 로마로 달려가 이 서신을 원로원에 전해라! 하루빨리 파비우스 집정관님과 마케도니아에 있는 스키피오 마케도니쿠스 법무관을 로마로 불러들여야 한다!”
* * *
한편 집정관 그라쿠스가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며 탄식하고 있을 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전장에서 전리품을 수거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카르타고군 측의 사상자는 2백 명 미만.
그 자리에 있는 카르타고군은 누구나 승리를 만끽하며 기뻐했지만, 특히 하스드루발의 기쁨은 남다른 것이었다.
“마시니사가 적장 리비우스를 사살하다니! 역사가 확실히 바뀌려나 보구나!”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그는 원 역사에서 6년 후 다시 한번 집정관으로 선출돼 하스드루발을 전사하게 만든 인물이다.
원 역사의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에게 정복당한 히스파니아에서 마지막 남은 바르카 가문의 병력 5만 명을 이끌고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는다.
그러나 그는 결국 11년 전 헤어진 형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이탈리아 북동부의 메타우르스강 유역에서 집정관 리비우스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협공을 당해 목이 잘리고 만다.
한니발은 그런 하스드루발의 속내를 알지 못했지만, 그로서는 드물게 밝은 표정을 지으며 기뻐하는 동생에게 말했다.
“아직 전투 경험이 적을 텐데도 마시니사 왕자의 활약이 대단하구나! 마시니족 제일의 기병대장이라는 명성이 사실이었어! 이번에야말로 로마 원로원이 성문에 올리브나무 가지를 걸고 우리에게 항복할 거다!”
그 말을 듣고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던 하스드루발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정말 로마 원로원이 항복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 로마는 북진하는 형과 나를 막을 방법이 없잖아.’
이번 전투로 이탈리아반도에 남아 있는 로마의 야전군 중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부대는 집정관 파비우스의 4개 군단뿐이었다.
그라쿠스가 이끄는 패잔병들은 앞으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추격을 피해 로마로 도망치기 급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파비우스가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그라쿠스와 합류하면 다시 한번 두 형제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회전을 벌여 볼 만한 병력이 모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진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하밀카르의 군대를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벅찰 지경이었다.
하스드루발은 마음을 정한 후 한니발에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늘 해 왔던 것처럼 적장의 장례를 마친 다음 다시 북진할 거잖아? 두 집정관의 시신을 로마로 보내면서 로마 원로원에 항복하라는 서신을 전해 보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로마의 전직 집정관 리비우스와 포스투미우스의 시신을 수습해 정중히 장례를 치른 후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두 형제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 원로원은 여전히 결사 항전을 다짐하며 카르타고의 사절을 성문 밖으로 쫓아낸 후 즉시 파비우스와 스키피오에게 전령을 보냈다.
이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행군 경로에 있는 도시를 점령하며 라티움 지역 북서쪽 끝에 있는 로마를 향해 진격했다.
로마의 전령은 이탈리아 북동부 해안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4월 중순 즈음에 스키피오에게 원로원이 보낸 서신을 전했다.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던 스키피오는 자신의 막사에서 서신을 읽자마자 깊이 탄식했다.
“또 우리 로마군이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에게 패하고 말았구나! 정녕 올림포스의 신들께서는 내게 아버지의 복수를 허락할 기회를 주시지 않을 작정이신가!”
스키피오가 이끄는 병력은 현재 처음 그리스 서부 해안에 상륙했을 때의 약 2만 명에서 총 4만 명 정도로 불어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중 로마 군단병은 절반 정도고 나머지는 절반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이 보낸 지원군이었다.
각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숙적 마케도니아를 토벌하는 데는 스키피오에게 힘을 보태 줬다.
하지만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아직 셀레우코스 제국의 위협을 물리치지 못한 상황에서 먼 이탈리아반도의 카르타고군을 토벌하는 데에도 지원군을 보내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스키피오의 곁에 있던 소시비오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필리포스 왕의 항복을 받아 내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끝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자는 분명 법무관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지. 내 집이 불타고 있는데 도적 소굴을 토벌한다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자네가 필리포스 왕과 협상을 해 주게. 전쟁 배상금을 최대한 많이 받아 내야 하네.”
“맡겨만 주십시오. 마케도니아 국고에 남은 마지막 은화 한 닢까지 받아 내겠습니다.”
소시비오스는 스키피오에게 호언장담한 대로 사흘도 지나지 않아 필리포스 왕에게 무조건 항복과 10년 분할로 은 4천 달란트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는 필리포스 왕이 이번 해의 전쟁 배상금으로 준 은 4백 달란트를 수레에 실어 로마군의 숙영지로 돌아왔다.
스키피오는 오랜만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협상을 잘 진행한 소시비오스를 칭찬했다.
“정말 잘해 주었네, 소시비오스! 이걸로 꽤 많은 군자금을 얻었군그래!”
“과찬이십니다, 스키피오 마케도니쿠스 법무관님. 필리포스는 영악한 편이지만, 심지가 약하지요. 제 정적이었던 이집트의 왕비 아르시노에에 비하면 쉬운 협상 상대였습니다.”
“그럼 바로 다음 준비를 해야겠군.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우리가 그리스를 떠난다고 하면 자국의 정규군을 빌려주지 않을 걸세. 그동안 모은 전리품을 다 팔아서 그 돈으로 그리스인 용병단을 최대한 많이 고용해 주게.”
“용병을 고용하신단 말씀입니까? 로마인은 용병을 고용하는 걸 꺼린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명예로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 거지, 국법으로 금지하는 건 아니네. 지금은 이것저것 따져 가며 전쟁을 치를 때가 아니지 않나.”
“알겠습니다. 마케도니아에게 받은 배상금도 있으니 꽤 많은 병사를 고용할 수 있을 겁니다.”
소시비오스는 스키피오와의 대화를 마친 후 즉시 전 그리스 지역을 발로 뛰며 용병을 고용했다.
약 한 달이 더 흘러 5월 중순이 되자 로마와 동맹을 맺은 그리스 최남단의 항구도시 메세에 약 3만 명 정도의 그리스인 용병이 모여들어 젊은 로마인 장군이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스키피오는 마지막으로 보급품을 점검하고 드디어 마케도니아를 떠날 채비를 마친 후 항구까지 마중을 나온 소시비오스에게 말했다.
“소시비오스, 그동안 수고 많았네. 군단 하나를 자네에게 맡길 테니 그 병력으로 총독 대리로서 일리리아 속주를 다스려 주게.”
“그 말씀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원로원의 승낙도 없이 의원도 아닌 저를 총독 대리로 임명하실 수 있는 겁니까?”
“불법이긴 하지만, 지금은 위급 상황이지 않나? 이번 임무를 잘 해내면 원로원 의원 자격이 주어지는 것도 꿈은 아닐 걸세. 하지만 로마를 배신하면 전 지중해에서 자네를 받아 줄 나라는 없다는 걸 명심하게.”
“걱정 마십시오. 간신히 찾아온 재기의 기회를 걷어차 버릴 만큼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잘 아시겠지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지금까지 싸워 오셨던 적보다 훨씬 막강한 적수입니다.”
“아,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었군. 난 이탈리아가 아니라 북아프리카로 간다.”
“네?!”
“내 휘하의 병사 4만 명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돌아간다고 간다고 해도 이미 기세가 오른 카르타고군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지금은 카르타고의 영토를 직접 공격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카르타고로 불러들이는 게 최선이다.”
그 말을 듣고 소시비오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스키피오의 말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카르타고는 지난 수백 년 동안 대체로 적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면 파죽지세로 영토를 유린하는 적에게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해 보고 평화협상을 벌이기에 급급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오랜 세월 동안 북아프리카의 피정복민이 사는 도시와 마을에 성벽 등 방어시설을 건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하스드루발이 카르타고에서 국내파를 몰아낸 후로는 다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속주 도시 주변에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인구가 부족한 카르타고가 십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 많은 도시와 마을의 성벽 공사를 완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시비오스는 과감한 도박을 결심한 젊은 장군에게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전쟁의 신 마르스께서 법무관님과 카르타고 원정군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법무관님께서는 아마 신의 가호가 필요하실 것 같으니 말입니다.”
“말에 뼈가 들어 있군. 나도 자네를 다시 로마에서 볼 날이 오기를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기도하겠네.”
스키피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대화를 마치고 4만 명의 병사를 태운 수송선단의 기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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