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 [187화] 치킨 게임 (2)
“보급품을 다 싣는 대로 출항한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펼 준비를 해라!”
기함의 선장이 큰 소리로 외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군단병과 그리스인 용병 4만 명을 태운 수송선단이 메세의 항구를 빠져나왔다.
스키피오는 기함의 뱃머리에 서서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기도했다.
“바다의 신 넵튠이시여. 부디 저희에게 폭풍우 대신 순풍을 보내 주소서.”
지금껏 로마는 너무나 많은 병사와 영토를 잃었지만, 5백 년 이상 이탈리아반도에서 자라 온 거목의 뿌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를 떠나는 로마군 최후의 함대가 악천후를 만나 좌초되기라도 한다면, 만신창이가 된 로마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 줄 마지막 희망이 허무하게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질 것이었다.
스키피오는 자신이 이토록 무모한 도박을 하게끔 몰아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를 잃은 티키누스강 전투에서 마주쳤던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고 활을 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했다.
“분명 화려한 자주색 갑옷을 입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덤벼든 두 장수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었겠지. 그 두 놈은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치가 떨리는구나!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께 맹세코 카르타고를 불바다로 만들어 이 원한을 갚아 주리라!”
그때, 스키피오의 등 뒤에서 굵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수를 하시려면 이탈리아나 카르타고로 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함대는 정남쪽으로 항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스키피오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의 모습이 보였다.
스파르타는 국력이 쇠한 이후 타국에 용병을 파견하는 것을 국가의 주요 산업으로 삼고 있었다.
뤼쿠르고스 왕은 지난 마케도니아와의 전투에서 스키피오의 뛰어난 능력에 흥미를 느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용병으로서 이번 원정에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스키피오는 몸을 뒤로 돌려 스파르타의 왕과 마주 보며 대답했다.
“뤼쿠르고스 전하.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대체 뭐가 문제인 겁니까?”
“얼마 전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전령에게서 받은 서신에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카르타고 해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고 하더군요.”
“잘 아시겠지만, 완벽한 해상 봉쇄라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바다 위에 목책을 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닙니까? 과감하게 가시죠. 과감하게.”
“전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최대한 위험부담을 줄이고 싶군요. 우리는 크레타섬의 서부에 기항해서 보급품을 보충한 다음 카르타고의 리비아 속주 동부에 상륙할 겁니다.”
“리비아 속주 동부라? 아! 그렇군요! 법무관님께서는 처음부터 카르타고의 성벽을 무너뜨릴 생각이 없으셨던 거군요!”
“맞습니다. 카르타고의 성벽은 시라쿠사의 성벽만큼이나 높고 튼튼합니다. 게다가 이제 아르키메데스의 제자들이 만든 기괴한 병기까지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 난공불락의 도시를 이 정도 병력으로 포위하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그럼 이번 원정은 리비아인이 득실거리는 도시와 농장을 하나라도 더 약탈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겠군요.”
스키피오는 뤼쿠르고스 왕의 말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로마의 세르빌리우스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카르타고인의 인내심을 무너트리는 겁니다.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이 없는 북아프리카를 불태우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도 저를 막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 * *
로마군 최후의 함대는 메세를 떠난 후 이틀 동안 쉬지 않고 항해해 지중해 동부에서 가장 큰 섬 크레타에 도착했다.
크레타섬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몰락하고 셀레우코스 제국도 아직 해군이 미비해 크레타 원정을 뒤로 미룬 덕에 섬의 여러 도시는 다시 도시국가가 되어 찰나의 자유를 만끽했다.
스키피오는 크레타섬 북서부의 항구도시 말레메의 원로원에 허가를 받은 후 그곳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그저 보급품을 보충하기 위한 기항이었지만, 말레메에는 지중해 최고의 용병 궁수인 크레타 궁수 1천 명을 고용할 수 있는 행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레메에서 고용한 궁수들은 카르타고군의 크레타 궁수처럼 하스드루발이 개발한 각궁이나 철궁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사슴뿔로 만든 크레타의 전통 활을 사용해 로마군 궁수의 두 배가 넘는 사정거리와 높은 명중률을 자랑했다.
스키피오는 100m 밖의 과녁을 명중시키는 크레타 궁수의 시범을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대단한 활 솜씨구나! 이제 벌떼같이 몰려오는 누미디아의 투창 기병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겠어!”
그는 추가로 고용한 용병을 빈자리가 많은 수송선에 나눠 태운 후 말레메의 항구에서 출항했다.
로마 최후의 함대는 남서쪽으로 사흘 동안 200km 정도를 항해한 끝에 이집트의 영토인 북아프리카 해안가에 도착했다.
스키피오는 주변 해안가를 둘러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예상대로 이 주변에는 적의 정찰선 한 대 안 보이는군! 전 함대!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항해하라!”
젊은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로마군의 함대는 순풍을 등에 업고 카르타고의 영토를 향해 바람 같은 속도로 나아갔다.
카르타고의 함대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반도 부근의 해안선을 봉쇄하는 데 전부 투입되어 있었고, 카르타고―셀레우코스 제국 연합군에게 항복한 이집트는 전후 피해를 복구하느라 해군에 예산과 인력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다.
덕분에 스키피오의 함대는 카르타고와 동맹관계인 페니키아인의 도시국가 랩티스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랩티스의 성벽 위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초병은 로마의 함대가 도시로 접근하는 것을 보고 즉시 도시의 수비대장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대장님! 동쪽으로 약 15스타디온(약 2.5km)쯤 떨어진 곳에서 신원미상의 함대가 이쪽으로 몰려옵니다!”
그러나 랩티스의 수비대장은 초병의 보고를 듣고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한번 가서 보자.”
수비대장은 초병을 따라 성벽을 올라 동쪽을 바라보고 하품을 한번 한 후 여전히 기운 빠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올해는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상선이 참 많이도 오는구나.”
현대에는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가 있는 위치에 자리 잡은 랩티스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큰 전란에 휘말린 적이 없는 평화로운 무역도시였다.
랩티스는 카르타고와 직선거리로도 400km나 떨어져 있어 1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일 당시에도 로마군의 침략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니발이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맹을 성사시킨 후로 매년 양국에서 수천 척의 상선이 별 탈 없이 오갔기 때문에 랩티스 수비대의 경계심은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었다.
랩티스의 수비대장은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초병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수문은 계속 열어 둬라. 매번 열었다 닫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까. 노예들도 쉴 땐 쉬어야지.”
“네? 하지만 규정에는······.”
“야. 너 신병이냐?”
“네. 그렇습니다. 한 달 전에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괜찮으니까 수문 그냥 열어 둬. 이 도시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계속 평화로웠다고. 게다가 전쟁이 이탈리아에서 났지 아프리카에서 났냐?”
“아··· 알겠습니다.”
한편 스키피오는 적이 방어태세를 갖추기 전에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함대를 서쪽으로 몰아가다 랩티스의 수비대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평화에 찌든 페니키아인들이 사자를 보고도 양으로 착각한 모양이구나! 이단 노선을 먼저 항구 안으로 진입시켜라!”
젊은 법무관의 목소리가 갑판 위에 울려 퍼지자, 뱃머리에 선 기수가 커다란 깃발을 힘차게 휘둘렀다.
로마군의 2단 노선 2백 척은 기함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돛을 접고 노를 저으며 쏜살같이 항구의 수문으로 짓쳐들어갔다.
랩티스의 수비대장은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놈들 움직임이 좀 이상하다! 어서 수문을 닫아라!”
수비대장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점심 식사 중이던 리비아인 노예 수백 명이 먹고 있던 빵과 고기를 바닥에 던져 두고 서둘러 수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수문에 연결된 굵은 쇠사슬을 잡기 전에 이미 열 척이 넘는 로마의 2단 노선이 항구로 들어선 후였다.
작은 전함에 타고 있던 크레타 궁수들은 갑판 위에서 수문을 닫으려는 리비아인 노예들을 겨냥해 활시위를 당겼다.
―피유우우웅!
사슴뿔로 만든 활에서 쏘아진 화살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자, 웃통을 벗고 있던 리비아인 노예들이 쇠사슬을 손에서 놓고 도망가 버렸다.
“으아악! 화살이 빗발친다!”
“여기 있으면 무조건 죽는다! 나중에 채찍을 맞더라도 도망쳐!”
그사이 4만 대군을 태운 스키피오의 함대는 활짝 열려 있는 랩티스의 수문으로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 * *
기원전 213년 5월 초, 바르카 가문의 활약 덕에 늘 환희로 넘쳐흐르던 백인회의 의회 건물 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조금 전 랩티스에서 도망쳐 온 난민들이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의 4만 대군이 리비아인의 마을과 도시를 불태우며 시시각각 카르타고를 향해 전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리비아의 속주민들도 자신들의 영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동쪽에서 몰려오는 로마군에 대항해 용맹하게 싸웠다.
그러나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을 상대로 아직 성벽이 완성되지도 않은 고향을 지켜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해의 수페트로 당선된 이테르바알은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의석에 앉아 있는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설마 로마가 포위당하기 직전인 상황에서 로마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할 줄이야···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이탈리아에 있는 로마 원정군을 잠시 불러들여야 할까요?”
그 말에 하스드루발의 큰 매형인 보밀카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존경하는 이테르바알 수페트님! 적의 기세가 무섭기는 하지만, 절대 제 처남들을 카르타고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잠시라도 숨 돌릴 틈을 주면 로마는 다시 불타 버린 마을을 복구하고 수만 명의 병사를 모을 겁니다! 아마 적장도 그걸 노리고 무모한 도박을 감행한 것일 테지요.”
“존경하는 보밀카르 의원님. 그럼 의원님께서는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기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대로는 로마군이 리비아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카르타고 주변의 마을과 누미디아까지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수페트의 말에 보밀카르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부디 저를 장군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마실리족과 함께 연합군을 구성해 새파랗게 어린 적장 스키피오에게 버릇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보밀카르는 비록 해전 위주이긴 했지만, 이번 전쟁이 시작된 후 그가 지휘를 맡은 전장에서 늘 로마군에게 승리해 온 터였다.
카르타고 백인회의 의원들은 한참 동안 토론한 끝에 만장일치로 보밀카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테르바알은 보밀카르에게 카르타고의 주신 타니트 여신의 상징물이 새겨져 있는 군기를 넘겨주면서 말했다.
“존경하는 보밀카르 의원님. 부디 다시 한번 로마군을 무찔러 엘리사 여왕의 도시를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신 중에서 가장 위대하신 바알 함몬과 자비로운 그의 자비로운 부인 타니트 여신께서 의원님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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