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 [188화] 치킨 게임 (3)
항구도시 랩티스를 점령한 후 수비 병력 5천 명을 남기고 카르타고를 굴복시키기 위한 진격을 시작했다.
“가자! 여름이 오기 전에 전 리비아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자!”
잘생긴 젊은 장군이 하나뿐인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3만 5천 명의 병사들이 지축을 뒤흔들 듯한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랩티스의 성문을 나섰다.
사슬갑옷을 몸에 두른 로마 군단병과 청동 흉갑을 걸친 그리스인 용병들은 들불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북서쪽으로 행군했다.
많은 리비아인 민병대가 로마군에게 저항하다 마침내 투항했지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정부에 포로의 몸값을 요구할 시간적 여유도, 그리고 그들을 먹일 군량도 없었다.
그는 리비아인들이 항복할 때마다 온몸이 묶인 채 무릎 꿇은 그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포로는 행군에 방해가 될 뿐이다. 오늘 저녁까지 모두 처형하고 적당히 한 곳에 모아 둬라.”
비옥한 리비아 땅을 로마군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수확을 앞둔 밀이 익어 가던 들판이 불탔으며 언덕처럼 쌓인 시체에 까마귀 떼가 모여들었고 피가 시냇물처럼 흘렀다.
그러나 카르타고도 자국의 속주를 유린하는 로마군의 만행을 두고만 보지는 않았다.
카르타고 백인회에 의해 장군으로 임명된 보밀카르는 간신히 살아서 리비아를 탈출한 난민들의 하소연을 듣고 격분하며 소리쳤다.
“천둥과 불의의 신 바알 함몬이시여! 당신의 불길로 저 잔악한 무리를 태워 버리소서! 부관! 당장 마실리족에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해라! 서둘러 스키피오를 막지 않으면 북아프리카 전역이 불바다가 되고 말 거다!”
장군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지자 카르타고의 성문을 나선 전령들은 밤낮으로 서쪽으로 말을 달려 전 누미디아 지역을 다스리는 마실리족의 왕 가이아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가이아 왕은 하스드루발 덕분에 부족을 되찾은 은혜를 갚기 위해 직접 보병 3만 2천 명과 기병 8천 기를 이끌고 카르타고로 향했다.
보밀카르도 즉시 북아프리카의 모든 속주에 모병관을 파견해 속주민 병사를 징집하고 용병을 고용했지만, 신성대의 정예병을 포함해도 병사 2만 명과 북아프리카산 전투 코끼리 20마리만을 모을 수 있었다.
로마군의 약탈과 방화로 카르타고 정부가 기간병을 징집하는 리비아 속주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밀카르는 병력이 모이자마자 과감하게 전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를 떠나 마실리족의 지원군과 합류했다.
그 후 카르타고―마실리족의 연합군은 서둘러 남하해 6월 중순 즈음 카르타고에서 남쪽으로 120km쯤 떨어져 있는 구릉 지대에서 마침내 북진하는 로마군과 맞닥뜨렸다.
가이아 왕은 말에 탄 채로 카르타고―마실리족의 연합군 진영에서 1km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는 스키피오의 군대를 바라보며 보밀카르에게 말했다.
“적군의 수는 우리 군보다 절반이 조금 넘는 정도인 모양이군요. 하지만 곧바로 전면전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먼저 탐색전을 벌여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도 전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군답지 않게 용병의 비율이 높다고 들었었는데, 군의 기강이 제대로 잡혀 있군요. 게다가 중장보병이 저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스키피오의 군대는 3만 5천 명의 병사 중 2만 7천 명이 보병이었는데, 그중 약 절반인 1만 4천 명 정도가 사슬갑옷이나 청동 흉갑을 입은 중장보병이었다.
반면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의 보병 4만 5천 명 중에서 중장보병은 보밀카르가 데려온 신성대 병사와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대를 합친 약 7천 명 정도가 전부였다.
가이아 왕이 데려온 마실리족 병사 중에는 중장보병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마실리족의 병사들은 자비로 무기와 방어구를 마련해야 했는데, 반유목민인 그들은 대부분 값비싼 갑옷을 갖출 만큼 부유하지 못했다.
보밀카르와 가이아 왕은 고대의 전투에서는 철제갑옷으로 무장한 중장보병대가 몇 배가 넘는 경보병과 싸워 승리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져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먼저 소규모 병력으로 적을 도발해 반응을 보고 스키피오를 물리칠 계획을 세우고자 했다.
가이아 왕은 휘하의 장수들을 곁으로 불러 명령했다.
“평민 기병 중 가장 말을 잘 타는 오백 명을 선별해 적을 도발해라. 적장의 대응을 보는 게 목적이니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가 지시를 내리고 5분도 지나지 않아 등자는커녕 안장과 고삐도 없이 말을 달리는 마실리족의 기병 5백 기가 투창과 작은 방패를 들고 로마군의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스키피오는 그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곁에 있는 부관들에게 말했다.
“북아프리카의 야만인들이 우리를 떠보려 하는 모양이다. 적의 기선을 제압할 좋은 기회다. 크레타 궁수들에게 저 튜닉 한 벌만 걸친 야만인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라고 전해라.”
그의 곁에 있던 로마군 장교 한 명이 말을 달려 본대의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크레타 궁수들에게 법무관의 명령을 전했다.
사슴뿔로 만든 활을 든 궁수들은 스키피오의 명령을 전해 듣자마자 전열의 맨 앞으로 나서서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크레타 궁수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매와 같은 눈빛으로 가만히 적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마실리족의 기병대가 활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1천 개의 화살이 일제히 활시위를 떠나 적을 향해 날아갔다.
―쐐애애애애액!
마실리족의 기병 5백 기 중 반수 이상이 아직 로마군 궁수의 사정거리 밖이라고 여기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다가 그대로 온몸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크아아악!”
“이렇게 먼 거리에서 화살이 날아오다니! 퇴각하라! 여기 있다가는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가이아 왕이 그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보밀카르에게 말했다.
“로마의 궁수들은 실력이 정말 대단하군요··· 제가 데려온 궁수보다 사정거리가 두 배는 더 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렇게 정확하게 활을 쏘다니······.”
“아마 로마인이 아닐 겁니다. 적장 스키피오가 오는 길에 크레타의 궁수를 고용한 것 같군요. 이제야 로마군이 어떤 경로로 아프리카에 상륙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적진에 저렇게 뛰어난 궁수가 얼마나 더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마실리족의 기병대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니 여기서 로마군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건 어떻겠습니까?”
“현명하신 생각입니다. 듣자 하니 적장 스키피오는 다른 지휘관의 도움 없이 마케도니아 정벌을 성공시켰다고 하더군요. 전하의 말씀대로 괜히 불필요한 위험을 떠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카르타고―마실리족의 연합군과 스키피오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파죽지세로 라티움 지역의 도시와 마을을 점령하며 로마로 진격하고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스키피오의 군대와 달리 이탈리아의 카르타고군은 이미 충분한 병사와 공성병기를 가지고 있어 로마를 직접 공격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니 수적으로 우세하고 기병이 많은 카르타고―마실리족의 연합군이 전면전을 철저히 피하고 로마군이 식량을 수급하는 것만 잘 막아도 강력한 적을 말려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가이아 왕은 보밀카르의 말을 듣고 새하얀 턱수염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적장 스키피오가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이제 저 어린놈이 젊은 혈기를 못 이기고 실수할 때를 기다려 보도록 합시다.”
* * *
첫 탐색전이 끝난 후,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과 대규모 회전을 벌이기 위해 전군을 이끌고 적진에 접근했다.
그러나 보밀카르와 가이아 왕은 그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로마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군대를 뒤로 물렸다.
또 스키피오가 그들을 무시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려 하면 신속하게 병력을 움직여 로마군의 앞길을 가로막거나 뒤에 따라붙었다.
스키피오는 그 후로도 닷새 동안 계속 싸움을 걸었지만, 두 장년 지휘관은 같은 방법으로 젊은 적장의 신경을 긁어 댔다.
벌써 닷새 동안 적에게 무시당하자 보밀카르와 가이아 왕의 예상대로 스키피오는 자신의 막사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겁많은 늙은이들 같으니라고! 두 적장은 로마의 일곱 언덕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내 앞길만 막고 있을 셈이구나! 세르빌리우스 성벽이 높고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로마의 식량 비축분을 생각하면 앞으로 두 해를 버티기도 힘들 텐데······.”
그는 당장 눈앞의 적을 향해 무작정 돌격하고 싶었지만, 그게 바로 적이 노리는 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다. 너희들의 꾀에 너희가 빠지게 만들어 주마.”
스키피오는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모든 로마군 장교와 용병대장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 지시했다.
“오늘부터 병사들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면 전군을 이끌고 적진 앞으로 몰려가 회전을 건다. 그 전까지 출격 준비를 마치도록 해라.”
그의 말을 듣고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가 물었다.
“법무관님. 지금까지 우리는 저 야만인들에게 계속 회전을 걸었지만, 계속 무시당했습니다. 군대를 출동시키는 시간을 정한다고 해서 저 명예를 모르는 자들이 갑자기 우리의 도전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겁니다.”
“뤼쿠르고스 전하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앞으로 한 달 정도만 제 말대로 해 주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뤼쿠르고스 왕은 스키피오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다음 날 스키피오는 병사들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 전군에 전형적인 로마군의 진형을 짜게 했다.
본대의 앞에는 로마군의 경보병 벨리테스가 산개하고 본대의 중앙에는 로마 군단병과 그리스인 중장보병대를 배치했다.
또한 본대의 좌측과 우측에는 상대적으로 로마군의 다른 병사들보다 전투력이 약한 그리스인 경보병대가 배치되어 중장보병대를 보조하게 했다.
본대의 좌익과 우익에는 각각 로마군 기병대와 그리스인 기병대, 그리고 궁수들이 배치되어 적의 기병을 견제하게 했다.
보밀카르는 진형을 갖추고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의 진영으로 접근하는 로마군을 보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숙영지에 숨어서 적군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갑자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버릴 수도 있다. 늘 하던 대로 적의 앞길을 가로막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장군의 명령에 카르타고와 마실리족의 병사들도 로마군과 비슷한 진형을 짠 후 스키피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로마군은 여느 때처럼 고함을 지르며 회전을 걸어 왔고, 보밀카르와 가이아 왕은 이에 응하지 않다가 해가 지고 양군은 각자 자신의 숙영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그날이 지난 후에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진형을 짜서 적진으로 다가와 회전을 걸었다.
로마군과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이 그렇게 비슷한 나날을 보내는 사이 어느덧 2주일이 지나 한여름이 시작되었지만, 스키피오는 여전히 같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보밀카르는 오늘도 몰려나온 로마군을 보며 조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스키피오가 도저히 어쩔 줄 모르겠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시간을 허비해라. 그사이에 장인어른과 처남들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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