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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90화 (190/201)

[ 190 ] [189화] 치킨 게임 (4)

로마군은 아무리 카르타고―마실리족의 연합군이 자신들을 무시해도 매일같이 적진으로 몰려나와 상대방을 도발했다.

물론 보밀카르와 가이아 왕은 그런 로마군을 철저히 무시하며 진형을 갖추고 적진을 응시할 뿐, 단 한 번도 스키피오의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 진영의 병사들은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매일 점심을 먹자마자 무기를 들고 더운 날에는 기온이 영상 40도를 넘나드는 북아프리카의 여름 날씨를 견디느라 점점 녹초가 되어 갔다.

이제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의 병사 중에는 진형을 짜고 로마군과 대치하는 것을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니라 번거롭고 힘든 일과로 여기는 자가 늘어났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신성대 병사를 제외한 카르타고와 마실리족 병사들의 기강이 상당히 해이해져만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 양쪽 진영이 대치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나 계절은 7월 중순이 되었다.

그 날도 스키피오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곧바로 전군을 이끌고 숙영지 앞으로 몰려오자, 카르타고와 마실리족의 병사들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을 입으며 투덜거렸다.

“이런 제기랄. 로마인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매일같이 이렇게 뙤약볕 아래에서 서 있다 보면 적에게 죽는 게 아니라 더위 먹고 죽을 거 같아.”

“그러게 말이야. 혹시 로마인들은 우리가 회전을 벌일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아직도 눈치 못 챈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북아프리카 출신인 우리도 더워 죽겠는데, 눈도 내리는 추운 동네에서 온 녀석들이 저렇게 꾸역꾸역 기어 나와서 시비를 거는 거 보면 분명 그럴 거야.”

장교들도 휘하의 병사들과 사정이 비슷해 로마군이 언제나처럼 같은 시간에 몰려왔음에도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은 조금 늦게 숙영지를 나와 진형을 짰다.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는 적군의 흐트러진 진형과 몸가짐을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며 곁에 있는 스키피오에게 말했다.

“스키피오 마케도니쿠스 법무관님. 적군의 한심한 모습을 보십시오. 마치 가문 들판에서 말라 버린 잡초처럼 시들시들해 보입니다.”

“전쟁의 신 마르스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사실 적군의 기강이 빨리 흐트러지지 않아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꽤 초조했었습니다만, 군율이 제법 잡혔다고는 해도 결국 야만인의 군대일 뿐이었군요.”

“지금 전투를 벌이면 분명히 우리가 이길 겁니다.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루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총공격은 내일 새벽에 시작하겠습니다.”

뤼쿠르고스 왕은 젊은 외눈 장군의 말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 그래서 그동안 일부러 같은 시간에만 적을 도발하셨던 거군요! 거기까지 내다보셨다니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스키피오는 감탄하는 왕과 눈을 마주치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대답을 대신했다.

* * *

스키피오는 양군이 대치한 구릉 지대에 석양이 깔리기 시작하자 곧바로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는 숙영지로 귀환한 후 즉시 모든 로마군 장교와 용병대장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 군사회의를 열었다.

“내일 새벽에 전군을 동원해 적진을 기습한다. 그러니 오늘은 경계근무를 서는 초병을 제외한 다른 병사들을 빨리 재우도록 해라.”

스키피오의 말을 듣고 오랜 고착상태에 지쳐 가던 장교와 용병대장들은 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겠군요!”

“전쟁의 신 아레스시여! 저희에게 승리를 내려 주소서!”

젊은 장군의 명령이 전해지자, 모든 로마 군단병과 그리스인 용병들은 달이 뜨기 전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 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전투를 준비했다.

스키피오는 직접 숙영지 안을 돌며 병사들의 준비 상태를 점검한 후 장교들에게 지시했다.

“병사들이 평소보다 든든한 아침 식사를 하고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해라. 하지만 절대로 불을 피우면 안 된다.”

스키피오는 평소 군량을 아끼고 군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그동안 아침마다 모든 장교와 병사들이 선 채로 조리되지 않은 채소나 과일 따위를 먹게 했다.

로마군 병사들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아침을 먹게 된 것을 기뻐하며 로마의 군용 건빵인 파니스 밀리타리스와 양고기를 말려서 만든 육포를 배불리 먹어 격렬한 전투를 치를 준비를 마쳤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스키피오는 전군을 이끌고 사냥감에게 몰래 다가가는 표범처럼 조심스럽게 적군의 숙영지로 접근했다.

마침내 로마군이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의 숙영지 근처에 도착하자, 스키피오는 미리 정해 둔 수신호로 장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크레타 궁수 중에서 가장 몸집이 작고 동작이 빠른 병사 1백 명이 자세를 바짝 낮추고 감시탑 위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카르타고군 초병의 시선을 피해 코끼리 마구간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마침내 목적지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도착하자 바로 적진을 교란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크레타 궁수 중 한 명이 부싯돌로 횃불을 켠 후, 동료들이 활시위에 걸고 있는 동물 기름을 잔뜩 묻힌 천을 화살촉에 두른 불화살에 불을 붙였다.

1백 명의 궁수들은 카르타고군의 초병이 불화살을 보기 전에 일제히 코끼리 마구간을 향해 발사했다.

붉게 타오르던 불화살은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강풍에 촛불이 꺼지듯 불이 꺼지면서 코끼리 마구간을 향해 날아갔다.

비록 불화살의 불은 꺼졌지만, 불씨가 남은 화살촉 몇 개가 마른 건초더미에 박히면서 코끼리 마구간 한 귀퉁이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코끼리는 작은 횃불조차 두려워할 만큼 불을 무서워하는 동물인지라, 거대한 화염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순식간에 코끼리 20마리가 마구간을 부수고 나와 코끼리 울음소리를 듣고 잠이 깬 병사들이 안에 누워 있는 천막을 마구 짓밟았다.

문자 그대로 자다가 봉변을 당한 카르타고군과 마실리족의 병사들은 미쳐 날뛰는 코끼리 떼와 인근의 천막에까지 옮겨붙은 불을 보고 공포와 혼란에 빠져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불이다! 코끼리 마구간에 불이 났다!”

보밀카르는 병사들의 구슬픈 비명과 고막을 찢을 듯한 코끼리 울음소리를 듣고 막사에서 뛰쳐나와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모두 진정해라! 투창을 던져 코끼리를 죽이고 불을 꺼라!”

그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몇몇 병사들이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 투창을 가져와 코끼리에게 던지고 물통에 물을 길어 불을 끄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적진의 혼란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적군이 혼란에 빠진 사이 전군을 이끌고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의 숙영지로 신속하게 접근한 다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돌격하라! 겁에 질린 양 떼처럼 날뛰는 야만인들을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사령관의 외침을 들은 나발수가 손에 들고 있던 뿔나팔을 입에 물고 힘차게 불었다.

―뿌우우우우우.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새벽녘의 구릉 지대를 가득 메우자, 4만 명의 로마군과 그리스인 용병들이 전투의 함성을 지르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로마 인빅타!”

“야만인에게 죽음을!”

그렇지 않아도 코끼리의 난동과 화재로 혼이 나가 있던 카르타고군과 마실리족의 병사 중 상당수가 수만 명의 적군이 파도처럼 숙영지의 문을 부수고 몰려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패주하기 시작했다.

“로마군의 기습이다! 적군이 몰려온다!”

“틀렸어! 모두 도망쳐!”

그러나 보밀카르와 가이아 왕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하게 남은 병사들을 진정시켜 병력의 절반 정도를 이끌고 숙영지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가이아 왕은 로마군이 날뛰는 숙영지를 황망한 눈길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덫에 걸린 것은 적장이 아니라 바로 우리였구나···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하다니, 죽어서 선조들을 무슨 낯으로 뵌다는 말인가······.”

보밀카르가 그 말을 듣고 결연한 목소리로 가이아 왕에게 대답했다.

“이번 전투는 우리가 패했지만, 아직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제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적을 막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무사히 전장을 탈출하셔서 누미디아로 돌아가 로마군의 침략에 대비해 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더는 짐에게 불명예를 강요하지 마십시오!”

“왕의 책무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백성을 지키는 것 아니겠습니까? 카르타고는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라 쉽게 함락되지 않을 테지만, 누미디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그게 카르타고와 마실리족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

“크윽··· 장군의 명예로운 행동을 노래로 남겨 자자손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살아서 전장을 빠져나오시길 바랍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자! 어서 가십시오! 적군이 숙영지에서 몰려나옵니다!”

가이아 왕은 보밀카르의 말을 듣고 근위병 수십 명만을 이끌고 서쪽의 누미디아를 향해 말을 달렸다.

보밀카르는 굶주린 늑대 무리처럼 달려오는 로마군을 막기 위해 진형을 정비했다.

살아남은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은 늘 하던 대로 정예병인 중장보병을 본대의 정중앙에 배치하고 전투력이 떨어지는 경보병대를 중장보병의 좌우에 배치했다.

적의 정예병을 아군의 정예병과 맞서 싸우게 해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그런 보밀카르의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휘하의 병사 중 가장 약하지만 수가 많은 그리스인 경보병대를 본대 중앙에 뒤가 볼록한 부채꼴 모양의 진형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로마군의 최정예병인 군단병과 그리스인 중장보병을 그리스인 경보병대의 좌측과 우측에 일렬로 배치해 보밀카르의 경보병대를 상대하도록 했다.

스키피오는 적의 약점을 최정예병으로 신속하게 제압하고 아군의 약한 병사들은 적의 정예병과 최대한 늦게 조우하게 할 생각이었다.

3만 5천 명의 로마군은 마치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보여 주었던 것과 비슷한 진형을 유지한 채로 혼란스러운 숙영지를 탈출하느라 지친 적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양군이 검을 맞대기 시작하자마자 카르타고―마실리족 연합군의 마실리족 경보병들은 거센 불길에 마른 나뭇잎이 타들어 가듯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갑옷도 입지 않고 나무 장대 끝에 쇠꼬챙이 하나 달아 놓은 조잡한 창을 가진 지친 병사들이 온몸을 철과 청동으로 만든 갑옷으로 가린 중장보병대를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었다.

보밀카르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미리 적진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제야 로마군이 평소와 전혀 다른 전술을 사용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는 군단병이 휘두른 폭이 넓은 검과 스파르타인들이 내지르는 창에 찔려 죽어 가는 누미디아인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한 달 동안 늘 같은 진형을 보여 준 건 전부 오늘을 위한 포석이었다는 말이냐··· 그동안 완전히 어린 적장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었구나······.”

보밀카르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 살아남은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카르타고로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 * *

스키피오는 도망치는 보밀카르를 그리 오래 쫓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로마군은 기병의 비중이 적었는데, 혹시나 패잔병을 쫓다 카르타고에 보낸 지원군에 의해 소중한 기병을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적군을 물리치자마자 불타는 숙영지의 화재를 진압하고 최대한 많은 전리품과 보급품을 챙기는 데 집중했다.

위대한 승리와 많은 전리품에 흥분한 병사들은 기뻐 날뛰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

“위대한 정복자 스키피오 마케도니쿠스 만세!”

“이제 카르타고로 진격하자!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자!”

뤼쿠르고스 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그런 병사들을 바라보며 스키피오에게 말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군요. 법무관님, 병사들의 말대로 곧장 카르타고로 진격하시겠습니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누미디아로 갑시다. 시팍스 왕이 카르타고의 감옥에 유폐된 후로 마사에실리 부족이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누미디아인들을 끌어들여 병력을 불리면 카르타고 함락도 꿈은 아닐 겁니다.”

스키피오는 뤼쿠르고스 왕과의 대화를 마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르타고가 있는 북쪽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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