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91화 (191/201)

[ 191 ] [190화] 하밀카르 vs 파비우스 (1)

스키피오는 보밀카르가 이끄는 군대를 물리치고 누미디아 지역을 거침없이 휩쓸며 마실리족의 여러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그러자 시팍스 왕이 하스드루발에게 패한 후 누미디아의 변방을 떠돌던 마사에실리족의 유민들이 복수를 외치며 로마군에 합류했다.

덕분에 스키피오는 누미디아 지역에 들어선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휘하의 병력을 6만 명까지 불린 후 카르타고를 향해 나아갔다.

기원전 213년 8월 첫날,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라티움 지역의 카르타고군 군영으로 전령으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다.

한니발은 전령이 건네준 서신을 읽은 후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장이 현명하지 못한 짓을 했군. 이제 큰 이변이 없는 이상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나겠지. 하지만 본국이 입은 피해가 너무 커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상황이구나.”

하스드루발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며 형에게 대답했다.

“빌어먹을! 스키피오 그 미친 자식! 그 자식을 너무 과대평가한 게 화근이었어! 미치지 않고서야 이 상황에서 전군을 이끌고 북아프리카 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가 북아프리카에서 거둔 승리는 전술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전략적인 가치는 없다시피 하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어느 쪽이 가장 합리적인 전략 목표를 세워 그것을 얼마나 잘 달성했느냐로 결정된다.

전투를 비롯한 전술 행위는 어디까지나 그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한 것이다.

일례로 원 역사의 한니발은 칸나이에서 2천 년 뒤의 사관 학교에서도 포위 섬멸전의 가장 이상적인 사례로 가르칠 만큼 전술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그는 칸나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전략 목표였던 ‘로마 연합의 붕괴’를 달성하지 못했고 결국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스키피오는 그동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르켈루스와 함께 전장에 서면서 짧은 기간 안에 뛰어난 전술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원 역사라면 아직 일개 기병이었을 정도로 너무 젊어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했고 쉴 새 없이 전장을 누비느라 잠시 머리를 식히며 전 지중해의 전황을 살피는 경험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원 역사에서 군권을 잡은 시기의 자신보다는 전략 수립 능력이 부족했고 결국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 실수란 바로 그동안 카르타고 정부는 북아프리카에 적군이 상륙하면 바로 꼬리를 내렸었다는 과거의 사실만을 근거로 이번 침공작전을 수립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게 만든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하지만, 그의 과감한 기습이 바르카 가문의 두 형제가 로마 원정을 중단하고 카르타고로 향하게 할 확률은 별로 높지 않았다.

한니발은 격분하는 하스드루발을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스드루발.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서 로마군을 물리치고 싶지만, 잘 참고 로마가 항복할 때까지 원정에 집중해야 한다.”

“나도 알아. 어차피 카르타고가 함락될 일은 없을 테고, 우리는 스키피오와 달리 계속 풍족하게 보급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

스키피오에게는 공성 무기도, 항구 도시를 바다 쪽에서 포위할 함대도, 그에게 지원군이나 보급품을 보내 줄 동맹국도 없었다.

반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많은 공성 무기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미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한 덕에 히스파니아와 남부 갈리아, 그리고 시칠리아와 이집트에서 풍족한 보급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셀레우코스 제국이나 시라쿠사가 같은 동맹국들이 카르타고 정부에 로마군을 물리칠 지원군을 보내 줄 확률도 높았다.

이처럼 카르타고군은 시간만 들이면 로마를 함락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카르타고에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육지 쪽에서만 적의 도시를 포위해 시민들을 겁주는 것 정도였다.

한니발은 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말에 수긍하는 하스드루발을 보고 조금 마음을 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나와 생각이 같아서 다행이다. 오히려 스키피오가 북아프리카로 가지 않고 마케도니아 정벌을 마친 직후에 사만 대군과 함께 파비우스와 합류했으면 지금처럼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는 확신을 하지는 못했겠지. 머리를 식히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다.”

현재 이탈리아반도 북부에서는 파비우스가 휘하의 5개 군단을 이끌고 두 아들을 돕기 위해 남하하려는 하밀카르의 군대를 몇 년째 효과적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일류전략가 파비우스와 천재 전술가가 스키피오가 이끄는 9만 대군이 두 형제가 라티움 지역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아버지의 군대를 쳐부수고 로마를 향해 진격하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거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상황이네. 형 말대로 전황 자체는 이제 우리에게 유리해진 게 맞아. 하지만 이대로는 상처뿐인 승리를 얻게 될 거야. 본국이 불바다가 되는 걸 내버려 둘 수만은 없어.”

“그럼 넌 스키피오를 막으러 카르타고로 돌아가겠다는 거냐?”

“아니. 스키피오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만들어야지. 파비우스의 군대까지 전멸할 상황에 놓이면 로마 원로원도 그놈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렇군!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던 상황을 로마에 되돌려 주겠다는 거구나!”

“바로 그거야. 나는 병사 이만 명을 데리고 아버지를 도우러 북이탈리아로 갈게. 형은 그동안 나머지 병력으로 계속 라티움 지역을 공격해 줘.”

* * *

하스드루발은 새로운 전략 목표를 수립하자마자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7만 명의 카르타고군 병사 중 보병 1만 6천 명과 기병 4천 기를 선별해 아버지가 분투 중인 북이탈리아를 향해 진격했다.

파비우스는 자신의 막사에서 로마에서 보내온 전령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이 탄식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눈앞에 있는 늙은 사자를 막는 것만으로 힘에 부치는데, 교활한 젊은 독사까지 등 뒤에서 독니를 드러내고 다가오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다는 말인가···.”

하밀카르는 그동안 숲이 많은 북이탈리아에서 주특기인 게릴라 전술을 활용해 파비우스가 짜 놓은 전략을 여러 번 헝클어 놓았다.

그는 그런 적장의 변칙적이고 즉흥적인 전술에 최선을 다해 대응했지만, 결정적인 패배를 피할 수 있었을 뿐 조금씩 전선을 뒤로 물리는 중이었다.

전략적 안목은 탁월해도 전술적 재능이 부족한 파비우스로서는 전략과 전술 양쪽에 능한 하밀카르가 부담스러운 상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스드루발의 군대에게 배후를 내어 주면, 부자의 포위 공격에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 남은 로마의 야전군이 완전히 전멸하게 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고민하다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후 곁에 있는 장교들에게 명령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적에게 포위당할 수는 없다. 우리 측 희생도 적지 않겠지만, 적장 하스드루발이 이곳 갈리아 키살피나에 도착하기 전에 하밀카르의 군영을 공격한다. 내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할 테니 어서 행군할 준비를 해라.”

* * *

한편 파비우스가 5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이끌고 숙영지를 나섰다는 소식은 이틀도 지나지 않아 보노니아 주변의 군영에서 머무르고 있는 하밀카르에게 전해졌다.

하밀카르는 갈리아인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는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하스드루발이 정말 잘해 줬구나! 그 엉덩이가 무거운 파비우스가 드디어 움직이게 만들었어!”

그러나 그의 부관으로서 파비우스와의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바르카 가문의 막내 마고는 기뻐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우리보다 수가 많은 적군이 총공격을 해오는 데 기뻐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적장은 그 파비우스 잖아요?”

“그러니까 더 기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파비우스는 뛰어난 전략가지만 임기응변에 약하다. 자기가 미리 짜 놓은 작전대로 움직여야 제 실력이 나오지. 그런 자가 계획에 없던 총공격을 할 수밖에 없게 됐으니 본 실력의 반이라도 낼 수 있겠느냐?”

“하지만, 파비우스는 우리보다 병사가 만 명 정도 더 많지요. 게다가 우리 군은 절반 이상이 갈리아인이라 회전을 벌이면 어려운 싸움을 치르게 될 거에요.”

마고의 걱정은 분명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하밀카르가 북아프리카와 히스파니에서 데려온 병사 중 적지 않은 수가 병사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좀처럼 없는 따듯한 지역에서 살아온 병사들이 11월에도 종종 눈이 내리는 북이탈리아의 추운 날씨를 이겨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북이탈리아에서 징집한 갈리아인 전사들은 전황이 조금만 불리해져도 사기를 잃고 전장을 이탈해 버리는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밝은 목소리로 막내아들에게 대답했다.

“마고야. 네 눈에는 갈리아인들이 그저 결함 많은 병사로 보이는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그렇지요. 완력은 강하지만,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통솔하기 어렵고 그런 주제에 조금만 전투가 불리해지는 것 같으면 가장 먼저 도망쳐 버리니까요.”

“단점이 있으면 장단도 있기 마련이지. 갈리아인 유격병은 기습과 매복은 전 지중해에서 가장 뛰어나단다. 지금까지 파비우스의 군대를 조금씩이나마 남쪽으로 밀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 크지.”

“하지만 지금은 그 신중한 파비우스가 전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고 있어요. 적장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교묘한 함정을 파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파비우스는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눈앞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더라도 그 위력이 약하다고 여기게 만들면 기꺼이 발을 들이겠지.”

“이미 생각해 두신 작전이 있는 모양이군요.”

하밀카르는 막내아들의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로마군이 보노니아로 진격해 올 때를 대비해 미리 파둔 함정이 있지. 이번만큼은 파비우스도 기겁할 수밖에 없을 거다.”

* * *

기원전 213년 8월 초.

평야 지대를 행군하던 파비우스의 군대는 보노니아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아펜니노 산맥의 산길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파비우스는 하밀카르의 매복 공격을 경계해 산길에 진입하기 전 몸놀림이 재빠른 척후병 천여 명을 풀었다.

척후병들은 약 반나절 동안 진행된 정찰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파비우스에게 보고했다.

“파비우스 집정관님께 보고드립니다. 산길 입구에서 약 이십 스타디온(약 3.6km) 정도 떨어진 숲에서 매복해 있는 가이사타이 약 이천 명을 발견했습니다. 적들은 저희가 자기들이 매복 장소를 발견한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복병 이천 명이라···. 낙석이나 다른 함정은 없었나?”

“보지 못했습니다.”

파비우스는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갈리아의 나체 전사 가이사타이는 예상치 못한 기습만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가이사타이들은 갑옷은커녕 몸에 실 한 오라기 걸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공격해 올 때 투창만 잘 던져도 손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복병의 수가 로마군의 5%에 불과하다는 점도 파비우스가 그로서는 드문 모험을 결심하도록 부추겼다.

“지금은 눈앞의 함정보다 등 뒤에서 쫓아오는 적군이 더 위협적이다. 전군 산길로 진입하라. 앞으로 사흘 안에 산길을 돌파해 적장 하밀카르와 결판을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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