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92화 (192/201)

[ 192 ] [191화] 하밀카르 vs 파비우스 (2)

집정관 파비우스가 이끄는 로마의 5만 대군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지나갔다.

산길을 에워싼 울창한 숲은 대자연의 영역에 발을 들인 인간 무리에게 한낮에도 겨우 몇 줄기의 햇빛만을 허락했다.

파비우스는 길게 늘어진 로마군 대열의 약간 뒤쪽에서 산악 행군을 지휘했다.

그는 마치 심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을 응시하며 곁에 있는 로마군 장교들에게 말했다.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곧 하밀카르가 갈리아인 복병을 숨긴 곳을 지나가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적의 기습에 철저하게 대비하면서 전진하라.”

집정관의 지시사항은 백인대장들의 입을 통해 신속하게 전군에 전해졌다.

로마군 병사들은 오른손의 투창과 왼손에 든 방패의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고 숲속을 경계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로부터 약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어두침침한 숲속에서 하밀카르가 매복시켜 둔 갈리아인 전사들이 괴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

파비우스는 고막을 찢을 듯한 적군의 함성을 듣고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적습이다! 모두 행군을 멈추고 방패로 몸을 가려라!”

로마 군단병들은 집정관의 외침을 듣자마자 일제히 행군을 멈추고 커다란 방패를 턱 밑까지 들어 올리며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도로 양옆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목들 사이에서 수많은 화살이 로마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로마군 병사들은 침착하게 방패를 들어 올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비를 막았다.

나무판을 여러 장 겹쳐 만든 튼튼한 방패에 화살이 박히면서 나는 둔탁한 타격음이 숲속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타다다다다다다닥!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기습에 대비하고 있던 로마군 병사 중에서 화살을 맞아 다친 자는 거의 없었다.

파비우스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갈리아인과 싸워 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어질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화살이 멈췄으니 곧 숲에서 벌거벗은 야만인들이 튀어나와 검과 도끼를 휘두를 거다! 모두 투창을 던질 준비를 하라!”

과연 집정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숲속에서 공격 명령을 알리는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뿌우우우우우우.

로마 군단병들은 길이가 성인 남자 키보다 긴 투창 필룸을 던질 준비를 하며 길옆의 거목들 사이에서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는 적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로마군이 아무리 기다려도 나무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갈리아인 병사들은 도무지 눈앞의 적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비우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숲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군. 갈리아인들은 적이 눈앞에 나타나면 유불리를 계산하기 전에 일단 덤벼들고 보는 자들인데··· 하밀카르가 무모한 공격을 자제하라고 미리 명령을 내려 뒀던 걸까?”

바로 그때, 로마군 대열의 중간 즈음에서 산 전체를 뒤흔들 듯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과광!

집정관의 곁에 있던 로마군 병사들은 그 소리를 듣고 전방을 바라보자마자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들의 눈에 길 양옆에 서 있는 신전 기둥만큼이나 굵은 거목들이 차례로 동료들의 머리 위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으아악! 길옆의 나무가 계속 쓰러진다!”

“곧 이쪽도 덮치겠어! 어서 도망쳐!”

갑작스러운 화살 세례를 받고도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유지했던 로마군 병사들은 이제 쓰러지는 거목을 피하려고 무작정 산 밑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파비우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황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하밀카르가 카르타고의 신들의 도움을 받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숲이 사람에게 덤비다니!”

사실 로마군을 덮친 나무는 하밀카르가 미리 준비해 둔 함정이었다.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간혹 적군의 행군 경로로 예상되는 산길 양옆의 나무들을 미리 베어 내고 나무줄기를 다시 원래대로 세워 놓았다가 적이 지나가면 쓰러뜨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원 역사의 기원전 216년에 로마의 법무관 포스투무스는 북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갈리아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산길을 행군하다 자신이 이끌던 로마군 2개 군단과 함께 나무에 깔려 허무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역사가 바뀐 지금은 하밀카르가 일찌감치 북이탈리아를 점령한 덕에 당시 법무관이었던 포스투무스는 원 역사에서 당한 화를 자신도 모르게 피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에는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이 나무를 쓰러트리는 함정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 신중한 파비우스가 하밀카르의 함정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파비우스가 어떻게든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굵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며 그가 타고 있는 말의 머리를 때렸다.

―히히히힝!

말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파비우스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는 낙마하면서 부드러운 흙바닥을 두 손으로 짚은 덕에 치명적인 부상은 면했지만, 왼손의 손목을 다치고 말았다.

“크으윽!”

파비우스가 오른손으로 왼손의 손목을 감싸 쥐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 숲속에서 다시 한번 갈리아인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로마인을 죽여라!”

그러자 반쯤 넋이 나간 병사 중 한 명이 숲 쪽을 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적습이다! 갈리아인들이 공격해 온다!”

갈리아의 나체 전사 2천 명은 하밀카르의 지시대로 나무를 쓰러트려 적진을 혼란에 빠트린 후 파비우스가 있을 확률이 높은 대열의 뒤쪽을 기습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경황이 없던 로마군 병사들은 푸른 안료로 온몸에 기괴한 문양을 그린 나체 전사들이 미친 듯이 검과 도끼를 휘두르며 공격하자 완전히 혼이 나가 버렸다.

이제 파비우스의 곁에 있는 릭토르 열두 명만이 집정관을 호위하기 위해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았다.

릭토르 중에서 대장 격인 자가 다친 파비우스를 부축해 자신의 말에 태운 후 소리쳤다.

“파비우스 집정관님. 손목이 아프시겠지만, 다치지 않으신 손으로 제 허리를 꽉 붙잡아 주십시오. 적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산 밑으로 후퇴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네. 우리가 함정에 빠진 걸 알면 적장 하밀카르가 곧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 올 걸세. 바로 전장을 이탈하지 말고 대열의 후방에 있는 병사들을 최대한 규합한 다음에 후퇴하세.”

“하지만······.”

“이건 명령일세. 내가 부족해서 이 많은 로마 시민을 사지로 내몰고 말았네. 집정관의 책무를 벗어던지고 나 혼자 살아 나갈 수는 없네.”

“알겠습니다. 유피테르 신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길.”

열두 명의 릭토르는 파비우스의 주변을 에워싸고는 주변으로 달려드는 갈리아인 전사들을 검을 휘둘러 물리치며 말을 달렸다.

릭토르의 대장은 말을 달리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주변의 로마군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집정관님께서 부상당하셨다! 퇴로를 확보하라!”

그 외침을 들은 로마군 병사 백여 명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함성을 지르며 릭토르 무리에 투창을 던지려는 갈리아인 전사들에게 덤벼들었다.

“파비우스 집정관님을 지켜라!”

파비우스는 휘하의 병사들이 목숨을 바쳐 퇴로를 확보해 준 덕에 가까스로 대열의 최후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아직 대열의 앞부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군단병들을 바라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올림포스의 신들께서 오늘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안타깝지만 전방의 아군은 갈리아인들이 미리 베어 놓은 거목에 깔리는 바람에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적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서둘러 로마로 퇴각한다.”

후방의 로마 군단병들은 적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전 소식을 듣자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산 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파비우스는 자신을 따라오는 로마군의 패잔병이 모두 산에서 내려온 후 눈대중으로 잔존병력의 규모를 가늠해 보고 깊이 탄식했다.

“그 많은 병사들 중 살아남은 자가 반도 안 되는구나. 신들께서는 정녕 로물루스의 나라를 버리시려 한다는 말인가······.”

* * *

한편 하밀카르는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로마군이 걸려들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전군을 이끌고 호쾌한 목소리로 곁에 마고에게 말했다.

“드디어 그 의뭉스러운 영감탱이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구먼! 마고야, 어서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려라. 로마군의 잔당을 소탕하고 도망치는 파비우스를 추격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드디어 몇 년째 우리 발목을 잡은 적장을 잡을 수 있겠네요.”

“그건 두고 보면 알 수 있겠지. 자, 어서 움직이자. 지금 이 순간에도 파비우스는 로마를 향해 도망치고 있을 거다.”

두 부자는 3만 대군을 이끌고 아직 산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마군을 찾아내 소탕한 후 도망치는 적장의 뒤를 쫓아 남쪽으로 진격했다.

파비우스가 이끄는 패잔병들은 필사적으로 로마를 향해 행군했지만, 보급품을 대부분 잃어버려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몸이 성하지 않은 자가 많아 빠르게 행군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하밀카르는 수월하게 파비우스와의 거리를 좁혀 나갈 수 있었다.

거기에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2만 대군이 앞을 가로막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로마군 패잔병 무리는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져 버렸다.

파비우스는 전방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몰려오는 하스드루발의 병사들을 결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운도 여기까지구나. 조국 로마를 지켜 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여기서 로마인답게 죽겠다.”

그러자 하밀카르의 기습에서 살아남은 군단장 한 명이 그를 만류했다.

“파비우스 집정관님. 여기는 제가 맡을 테니 부디 집정관님께서는 릭토르만 데리고 전장에서 탈출하셔서 로마로 가 주십시오.”

“안 될 말이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명예를 버리지는 않겠다.”

“집정관님의 명예를 지키시기 위해 전 로마 시민이 명예롭지 못한 선택을 하도록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집정관님께서 여기서 돌아가시면 그라쿠스 집정관님께서 독재관으로 선출되실 겁니다. 정이 많은 그분은 이런 상황에서는 분명 카르타고 정부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으실 겁니다.”

파비우스는 군단장의 말을 듣고 갈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현재 로마 원로원에서 평민파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 그라쿠스는 시민들이 고통받는 것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는 자였다.

그는 로마 시민들이 농성을 시도해 보지도 않고 카르타고인에게 성문을 여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군단장은 집정관이 자신의 말에 설득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시 한번 파비우스를 몰아붙였다.

“파비우스 집정관님! 우리 선조들께서는 갈리아인에게 로마 시내를 점령당한 상황에서도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서 반년 동안이나 농성하셨습니다. 지금 일곱 언덕을 둘러싼 세르빌리우스 성벽은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고 튼튼합니다. 게다가 로마 시내에는 전 시민을 먹일 삼 년 치 식량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에게 항복한다면 전 지중해가 로마를 비웃을 겁니다.”

파비우스는 군단장의 진심 어린 호소에 결국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겠네. 내 자네에게 로마를 지켜 낸다는 약속을 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모든 로마인이 로마인다운 최후를 맞이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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