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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95화 (195/201)

[ 195 ] [194화] 로마를 공격하라! (3)

기원전 213년 10월 초.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반도에 상륙한 히스파니아의 광부 수천 명은 한니발이 보낸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 근교에 도착했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한니발에게 미리 지시받은 대로 광부들이 군영에 도착하자 연병장에 줄지어 세웠다.

광부들은 아직 자신이 전장에 불려 온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옆에 서 있는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었다.

“한니발 장군님께서 우릴 여기까지 부르신 이유가 뭘까? 군영에 짐을 나를 잡부가 부족한가?”

“그러게 말이야. 설마 달랑 칼 한 자루 주고 저 성벽을 기어오르라고 하지는 않겠지?”

“야. 말이 씨가 될라. 불길한 소리 그만해라. 이런 곳에서 화살받이 되려고 평생 곡괭이질 한 게 아니라고.”

“그래. 바르카 가문은 평민들에게 관대한 걸로 유명하다고. 설마 아닐 거야.”

막 연병장에 도착한 하스드루발은 끊임없이 웅성거리는 광부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수행하고 있는 마하르발에게 말했다.

“전원 다 모인 건가? 항해 중에 죽거나 다친 광부는 없었고?”

“전체 삼천 명 중 쉰한 명이 항해 도중 몸이 쇠약해졌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군의관의 말에 따르면 앓아누운 광부들도 뱃멀미를 너무 심하게 해서 몸이 약해졌을 뿐이라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합니다.”

“다행이군. 아, 참. 화약은 어떻던가?”

“히스파니아에서 가져온 것 중 오 분의 일 정도는 습기를 먹어 못 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화약만 사용해도 다음 작전을 진행하는 데에는 문제없을 겁니다.”

“알겠네. 군의관에게 앓아누운 광부들을 잘 돌봐 주라고 전해 주게. 그럼 다들 너무 불안해하는 것 같으니 좀 진정시켜 볼까.”

그는 기병대장 마하르발과의 대화를 마치고 연병장 가장자리에 설치되어 있는 연단에 올랐다.

화려한 자주색 갑옷을 입은 장군이 눈앞에 나타나자, 광부들은 잡담을 멈추고 연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스드루발은 연병장을 가득 메웠던 웅성거림이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모두 익숙하지 않은 항해를 오랫동안 견디느라 고생 많았다. 나는 한니발 장군과 함께 로마 원정군을 지휘하고 있는 하스드루발 바르카다.”

그의 말을 들은 광부들이 눈동자가 존경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

이제 한니발과 함께 전 지중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쟁영웅이 된 그는 대부분의 카르타고의 시민과 속주민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하지만 광부들은 히스파니아에서 수많은 은광 개발 현장에서 겪은 경험 때문에 불안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현장의 총책임자가 웃는 얼굴로 말단 광부 앞에 나타나 격려하는 날은 대부분 평소보다 몇 배는 힘들고 위험한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히 연단에 오른 장군에게 자신들에게 맡길 임무가 뭐냐고 묻지는 못했지만, 하스드루발은 광부들의 표정에서 절망을 읽어 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다들 무기를 들고 로마군과 싸우게 될까 봐 걱정하는 모양인데,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 맹세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내가 너희들에게 바라는 건 그저 평소처럼 땅을 파는 것뿐이다. 너희들이 맡겨진 업무를 잘 해내고 로마가 함락되고 나면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전리품을 나눠 주도록 하겠다.”

광부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불안감을 떨쳐 내고 차차 표정이 밝아졌다.

이탈리아반도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 로마.

그 도시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나누어 받는다면 일개 병사라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게 분명했다.

그때, 광부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하스드루발에게 질문했다.

“저··· 하스드루발 장군님. 저희 같은 비천한 자들을 챙겨 주시는 장군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목숨 걸고 적과 싸우는 병사들과 같은 양의 전리품을 저희가 받게 된다면, 군영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지는 않겠습니까? 무기를 든 병사들에게 미움받는 일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내 병사들이 자네들을 미워할 거라는 말인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자네들이 일을 잘해 주면 병사들이 목숨 걸고 적과 싸울 일이 줄어들지. 내 부하 중에서 자기 목숨 지켜 주는 사람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고 질투할 만큼 옹졸한 자는 없다.”

카르타고의 장군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자 늙은 광부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정말 감사합니다. 만신전의 모든 신들께 맹세코 카르타고와 바르카 가문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은 광부들을 안심시킨 후 곁에 있던 하급 장교들에게 지시해 그들을 숙소로 사용하게 될 천막으로 안내하게 했다.

북적이던 연병장이 한산해진 후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연단에서 내려오는 하스드루발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역시 웅변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등에 화살을 맞은 사슴처럼 벌벌 떨면서 연병장에 서던 자들이 웃으면서 숙소로 걸어가는군요.”

“과찬일세.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앞으로 작전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알려 줄 테니 광부들의 작업을 잘 지휘해 주게.”

“알겠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로마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은밀하게 땅굴을 파도록 하겠습니다.”

“음? 아니야. 아니야. 로마인들이 눈치채지 못하면 오히려 곤란해.”

“네? 아군을 로마 시내에 몰래 들여보낼 땅굴을 뚫으시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 정도 땅굴을 팔 거면 굳이 광부를 데려올 필요 없이 병사들에게 시켰겠지. 광부들을 두 무리로 나눠서 한쪽은 로마인들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큰 땅굴을 파 주게. 너무 대놓고 작업하면 오히려 의심받을 수 있으니 숨기는 시늉 정도는 해 주도록 하고.”

“장군님께서 어떤 계책을 세워 두셨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하스드루발에게 이번 작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광부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땅굴을 파는 작업에 착수했다.

한쪽 팀은 광부 2천 8백 명이 배정되었는데, 3조 2교대로 밤낮없이 땅을 팠다.

반면 다른 한쪽은 가장 경험 많은 베테랑 광부 149명이 배정되어 밤에만 폭 2m 정도의 좁은 갱도를 은밀히 파기 시작했다.

세르빌리우스 성벽 위에서 적진을 감시하던 로마군의 초병들은 카르타고군 군영 주변에 두른 목책 바깥에 나날이 흙무더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가는 모습을 보고 즉시 당직 장교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카르타고군이 계속해서 투석기로 바위를 쏘아 대는 와중에도 땅파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집정관 파비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이 또 교활한 수작을 부리고 있습니다. 닷새 전부터 카르타고군 병사들이 군영 안에서 흙무더기를 가져 나와 근처에 쏟아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집정관 그라쿠스가 대답했다.

“저도 들었습니다. 벌써 흙무더기가 작은 언덕으로 보일 만큼 많이 쌓였다고 하더군요. 카르타고군은 세르빌리우스 성벽 밑을 지나는 땅굴을 파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게다가 저 정도로 대규모 공사를 벌이고 있다면, 분명 성벽을 무너뜨릴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라쿠스의 말에 로마 원로원 의원 3백 명 전원이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며 깊이 탄식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전시에 공격 측이 땅굴을 파서 성벽으로 보호받는 적의 요새나 도시를 공략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이 경우 도시를 공격하는 측이 파는 땅굴은 용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었다.

그중 하나는 병력을 수비 측 병사 몰래 성벽 안으로 잠입시키기 위한 침투용 땅굴이고 다른 하나는 지반을 내려 앉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파괴용 땅굴이었다.

어느 쪽이든 땅굴을 파는 전술을 성공시키려면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지만, 특히 파괴용 땅굴을 파는 데는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파괴용 땅굴은 적의 성벽 밑에 넓고 천장이 높은 땅굴을 판 다음 나무 기둥을 세워 붕괴를 막았다가, 기둥을 한꺼번에 불태워 지반과 성벽을 함께 주저앉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수비 측이 막으려면 도시의 성벽을 따라 깊은 해자를 파서 땅굴을 차단하거나, 적군의 땅굴로 병사를 침투시킬 대항용 땅굴을 팔 필요가 있었다.

이 중 해자를 파는 방법이 대항용 땅굴을 팔 때보다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후자보다 지하로부터 엄습해 오는 적의 공격을 막아 낼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러나 현재 로마는 카르타고군의 투석기로 인해 부서진 성벽을 실시간으로 수리하고 소이탄에 불탄 시내를 복구하는 데 많은 인력을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전체를 두르는 깊은 해자를 팔 여력이 없었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세르빌리우스 성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상상을 하며 몸서리쳤다.

파비우스는 그런 동료 의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밤중에 카르타고인들 몰래 성문을 열고 적 군영 쪽으로 정찰병을 보냅시다. 신들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적이 파는 땅굴이 어디쯤을 지나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만장일치로 나이 든 집정관의 의견에 찬성했다.

* * *

로마 원로원은 회의를 마친 후 즉시 몸놀림이 재빠른 병사를 서른 명을 뽑아 해가 지자마자 카르타고군 군영 쪽으로 정찰을 보냈다.

로마의 정찰병들은 밤에도 횃불을 밝히고 수천 명의 인부가 땅을 파고 있는 현장을 보고 대략의 위치를 기억한 다음 부리나케 로마를 향해 달려갔다.

로마군 병사들은 정찰병이 돌아오자마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카르타고군의 땅굴이 지나갈 거라고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열심히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내려 갔다.

그렇게 양쪽 진영이 땅파기에 몰두한 지 약 2주가 지났을 때, 로마군 병사 약 5백 명이 마침내 아직 세르빌리우스 성벽 밑을 지나지 못한 카르타고군의 땅굴에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퍽! 우르르르르.

가장 앞에서 땅굴을 파던 로마군 병사가 마지막 삽질을 마치자, 흙이 무너져 내리며 그들이 파 내려온 좁은 땅굴 속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로마군 병사는 카르타고인들이 판 성인 남자 열 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땅굴을 보면서 기겁하고 말았다.

“세상에··· 어느 왕가의 지하묘지라고 해도 믿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가증스러운 카르타고 놈들! 나무 기둥까지 세워 가면서 이렇게 넓은 땅굴을 파고 있었다니. 조금만 늦었어도 세르빌리우스 성벽이 무너질 뻔했어.”

“으악! 그나저나 이게 무슨 냄새지?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그러게! 유황 냄새랑 비슷한데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저기 잔뜩 쌓여 있는 나무통에서 악취가 나고 있어.”

바로 그때, 넓은 땅굴 안에 갑자기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마군이다! 로마군이 땅굴에 침입했다!”

땅굴 안으로 들어온 로마군 병사 수백 명은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에 먼발치에서 횃불을 든 카르타고군 병사 수십 명이 악취가 나는 나무통 근처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마군 장교는 즉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칼끝으로 적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카르타고군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로마군 병사들은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카르타고군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수가 열 배는 더 많은 적군이 몰려오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일제히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뚜껑이 열려 있는 나무통에 던져 넣은 후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곧바로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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