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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97화 (197/201)

[ 197 ] [196화]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

“돌격하라!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도망치는 적군을 한 명이라도 더 처치해야 한다!”

한니발이 외치자 수만 명의 카르타고군 병사들이 무너진 로마의 북서쪽 성벽의 잔해를 밟으며 퀴리날레 언덕에서 가장 경사가 완만한 능선 위를 기세 좋게 달려 나갔다.

“디도 여왕의 도시를 위하여!”

세르빌리우스 성벽의 북쪽 부분은 언덕 위에 지어져 있어 보병이나 공성탑이 접근하기 어려웠고 그동안 카르타고군이 그쪽을 공격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로마의 수비대는 북쪽 성벽에 병력을 별로 배치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다지 넓지 않은 무너진 성벽 사이를 지나는 카르타고군을 미처 막을 새가 없었다.

퀴리날레 언덕 위에 지어진 시가지에 있던 로마 시민들은 거리와 광장에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적군을 보고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세르빌리우스 성벽이 무너졌다!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도망쳐!”

“신이시여! 정녕 로마를 버리시려는 겁니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병사들은 그런 로마 시민들과 거리 곳곳에 가득한 전리품을 무시하고 퀴리날레 언덕 남쪽에 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향했다.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의 신전과 로마 원로원의 의회 건물 쿠리아 호스틸리아가 들어서 있는 그곳을 점령해야만 로마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카르타고군의 트레뷰셋과 대규모 땅굴 공격이 집중되었던 남쪽 성벽을 지키고 있던 로마 군단병들도 거대한 폭음과 함께 북서쪽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카피톨리노 언덕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것이다.

직선거리로는 카르타고군이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더 가까웠지만, 로마군은 능선을 달려서 올라온 적과 달리 잘 포장된 도로를 달려왔기에 양군은 로마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 포룸 로마눔에서 맞닥뜨렸다.

하스드루발은 적군과 마주치자 재빨리 선제공격을 명령했다.

“선발대! 투창을 던져라!”

그의 외침이 로마 시내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자 히스파니아 출신 켈트족 경보병대가 자루까지 철로 만들어진 투창 솔리페럼을 적을 향해 힘껏 던졌다.

급히 달려오느라 아직 진형을 짜지 못했던 로마군은 사슬 갑옷을 종이처럼 쉽게 관통하는 묵직한 투창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광장에 고꾸라졌다.

“크아악!”

“적이 투창을 던진다! 우리도 되갚아 줘라!”

로마 군단병들은 앞장서서 달려가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분개하며 오른손에 든 로마군의 투창 필룸을 던지려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팔카타를 들어라!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모두 죽여라!”

한니발이 다시 한번 우레같은 목소리로 외치며 달려 나가자, 카르타고군의 중장보병대가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로마군 병사들은 적에게 선제공격을 당해 전열이 흐트러진 사이에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온 적군을 보고 기겁하며 소리쳤다.

“검을 들어라!”

로마 군단병들은 백인대장의 명령을 기다릴 새도 없이 즉시 투창을 버리고 급히 검을 뽑아 거침없이 달려오는 적에게 맞섰다.

―콰과곽!

양군의 방패와 방패가 충돌하며 둔탁한 충돌음이 터져 나오자, 순식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포룸 로마눔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약 2만 명의 로마군 병사들은 극렬하게 저항했지만, 제대로 된 진형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수적으로 배 이상 우세한 데다 더 좋은 무기를 가진 카르타고군의 공세를 이겨 낼 수 없었다.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들이 도신에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는 강철 검을 휘두를 때마다 로마군 병사들은 귓가에 스치는 전우의 날카로운 비명을 참아 내야 했다.

“끄아악!”

“백인대장님이 전사하셨다!”

“젠장! 어떻게 검이 로리카 하마타를 저렇게 쉽게 뚫어 버리냐고!”

다른 전장이었다면 진작에 패주했을 상황이었지만, 로마 군단병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전투의 함성을 지르며 해일처럼 몰려오는 적의 앞을 막아섰다.

애초에 그들의 목적은 1만 명의 아군이 카피톨리노 언덕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 안으로 들어갈 시간을 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저 야만인들이 우리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정신은 꺾을 수 없다!”

“로마 인빅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각자 중장보병대와 경보병대의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지휘하며 맹렬하게 앞길을 가로막는 적군을 제압해 나갔다.

하지만, 공간이 한정되어 있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탓에 카르타고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적을 신속하게 포위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바르카 가문의 두 형제는 예상보다 오랜 시간을 잡아먹은 뒤에야 포룸 로마눔을 봉쇄하려는 로마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시가전을 승리로 마친 후 한니발은 이미 카피톨리노 언덕을 둘러싼 성벽에 수비병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분한 목소리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빌어먹을! 결국 적군을 놓쳐 버렸군. 하스드루발. 듣던 대로 카피톨리노 언덕을 둘러싼 성벽은 어지간한 요새의 성벽보다도 높고 튼튼해 보인다.”

“그러게 말이야. 게다가 능선의 경사도 가팔라. 공성탑을 접근시키기도 어렵겠지. 성벽을 부수지 않고 병사들을 돌격시키면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오겠어.”

“네 말대로다.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을 꽤 잡아먹겠지.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

로마의 일곱 언덕 중 가장 높은 카피톨리노 언덕은 도시의 서쪽 경계선에 맞닿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스파니아에서 가져온 화약을 전부 사용해 버린 현재 언덕을 둘러싼 성벽을 무너뜨리려면 도시 남쪽에 설치해 둔 트레뷰셋을 카피톨리노 언덕을 조준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옮겨야만 했다.

문제는 당대의 투석기 중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트레뷰셋도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휴대성이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흔한 투석기인 오나거는 트레뷰셋에 비해 크기가 훨씬 작고 바퀴가 달려 있어 말 두세 마리로 끌면 쉽게 이동시킬 수 있었다.

반면 카르타고군의 트레뷰셋은 로마 시내의 5층 건물보다 높을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에, 이동시킬 때마다 분해와 조립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트레뷰셋을 전장에 설치하려면 당연히 많은 인력과 시간, 그리고 넓은 장소가 필요했다.

한마디로 오나거가 소형 전장포라면, 트레뷰셋은 거대한 고정 포대였던 것이다.

한니발은 기병대장 마하르발을 불러 즉시 세르빌리우스 성벽의 남쪽을 조준하고 있는 트레뷰셋을 이동시키고 설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도록 지시했다.

마하르발은 몇 시간 동안 로마 시내에서 트레뷰셋을 설치할 장소를 물색한 후 한니발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트레뷰셋으로 카피톨리노 언덕의 서쪽 성벽을 공격하실 계획이시면 분해에서 설치까지 약 이 주일이 걸립니다. 만약 시내로 옮겨 오셔서 언덕의 동쪽 성벽을 부수실 계획이시면 준비 기간이 약 한 달로 늘어납니다.”

“그렇군. 시내에 설치하려면 인근의 건물을 모두 철거해야 하니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건가?”

“그렇습니다.”

카피톨리노 언덕 서쪽의 성벽이란 다름 아닌 세르빌리우스 성벽이다.

반면 시내 안쪽의 언덕을 감싸고 있는 동쪽 성벽은 상대적으로 높이가 낮고 두께도 얇아 세르빌리우스 성벽보다 쉽게 부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하스드루발이 형에게 말했다.

“시간은 더 오래 걸리겠지만, 시내에 트레뷰셋을 설치하자.”

“그게 좋겠다. 세르빌리우스 성벽은 너무 튼튼해서 조금 부서져도 저번처럼 로마인들이 바로 수리해 버릴지도 몰라.”

“그건 그렇게 하고, 앞으로 한 달 동안 손가락만 빨고 기다릴 순 없지.”

“물론이지. 나는 트레뷰셋 설치 작업을 지휘할 테니 너는 광장의 전장이 정리되자마자 시내를 철저하게 약탈해라. 고집 센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온 로마가 불바다가 되는 모습을 보고도 성문을 열 마음이 들지 않는지 시험해 보자.”

하스드루발은 형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염병의 창궐을 막기 위해 포룸 로마눔에서 전사자의 시신을 세르빌리우스 성벽 밖으로 모두 옮겨 화장시킨 후 마시니사 왕자를 비롯한 휘하의 장교들을 불러 지시했다.

“잠시 후부터 병사 오만 명을 동원해 로마 시내를 약탈한다.”

그 말을 듣고 카르타고군 장교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장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환호성을 질러 댔다.

“드디어! 드디어 알프스산맥을 넘고 늪지대를 건넌 보상을 받는군요!”

“패배자에게 저주가 있으라!”

그러자 하스드루발은 오른손을 들어 기뻐 날뛰는 장교들에게 자신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다시 주변이 잠잠해지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다른 곳은 모두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신전과 도서관만큼은 약탈하거나 불을 지르면 안 된다.”

친구의 말을 듣고 마시니사 왕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스드루발. 카르타고인과 로마인은 서로 다른 신을 믿는 거 아니었어? 도서관이야 네가 워낙 책을 좋아하니 그렇다 치고 굳이 로마의 신전은 왜 약탈하면 안 되는 거야?”

“로마인의 신은 대부분 그리스인과 삼니움족의 신이기도 하거든.”

“아! 그렇구나! 자기들이 믿는 신의 신전이 잿더미가 되어 버리면 남부 이탈리아의 동맹도시들이 원한을 품겠군!”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도 굉장히 불쾌해할 거고 말이야. 자! 대화는 여기까지! 지금부터 각 신전과 도서관에 경비병을 세운다. 그다음에는 각자 원하는 만큼 전리품을 챙기도록 해라!”

하스드루발의 명령이 떨어지자 5만 명의 카르타고군이 일제히 시내로 달려 나가며 신전과 도서관을 제외한 모든 곳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가장 먼저 로마 부유층의 주거지가 몰려 있는 팔레티노 언덕으로 몰려가 저택의 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은식기와 금화를 자루에 쓸어 담고 귀족이 몸에 두르고 있는 자주색 옷을 빼앗았다.

로마 시민들은 노예가 되어 외국에 팔려 가지 않기 위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꺄아아아악!”

“이제 로물루스의 나라는 끝났어!”

그로부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카피톨리노 언덕을 제외한 로마의 여섯 언덕 곳곳에서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동료들이 약탈을 하는 동안 신전과 도서관을 지키는 병사들은 주변의 건물을 큰 망치로 때려 부숴 하스드루발의 명령대로 귀중한 건물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치했다.

간신히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도망친 로마 시민들은 그저 눈물을 흘리며 잿더미가 되어 가는 고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기원전 213년 10월 말 어느 날 오후.

스키피오는 먼발치에 보이는 카르타고의 장엄한 성벽을 바라보며 하나 남은 눈에서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날 아침에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로마 원로원의 전령으로부터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렵게 회군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처 입은 야수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적의 도시를 노려보며 처절하게 절규했다.

“카르타고! 너 저주의 이름이여! 가증스러운 디도 여왕의 도시를 눈앞에 두고도 떠나야 하다니! 정녕 올림포스의 신들께서는 로마의 멸망을 바라고 계신단 말인가!”

그는 한참을 더 카르타고 쪽을 바라보며 울부짖다 석양이 깔릴 때 즈음에야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군영으로 돌아왔다.

스키피오가 지휘관 막사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군단장이 그에게 보고했다.

“스키피오 마케도니쿠스 법무관님. 랩티스에 정박하고 있던 함대가 조금 전 우리 군이 점령한 근처의 항구도시에 도착했습니다.”

“알았다. 내일 병사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면 즉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의 말을 듣고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가 대답했다.

“이제 모든 걸 신들께 맡겨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시칠리아에는 카르타고군의 함대가 눈에 불을 켜고 바다를 지키고 있겠지만, 포세이돈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길 기도하며 과감하게 항해해야 합니다.”

“글쎄요. 아무래도 신들께서는 로마에 등을 돌리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풍랑을 만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카르타고의 함대를 마주칠 확률을 줄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것뿐입니다.”

“꼭 무신론자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지금은 못 들은 걸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사르데냐 남부를 경유해 이탈리아로 항해할 겁니다. 그곳도 카르타고에게 빼앗겨 버린 곳이지만, 시칠리아보다는 적의 함대를 마주칠 확률이 적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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