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 [198화] 최후의 결전 (2)
스키피오는 로마에 도착한 후 이틀 동안 숙영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결전을 치르려면 항해 도중 만난 폭풍우와 이탈리아에 상륙한 후 로마까지 강행군을 한 탓에 탈진하기 일보 직전인 병사들을 쉬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스키피오는 전군을 이끌고 세르빌리우스 성벽의 무너진 틈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진격하던 로마군 병사들은 무너진 성벽의 잔해에 다가갈수록 점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말을 타고 나아가던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도 전방의 낯선 광경을 보고 의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곁에 있는 스키피오에게 말했다.
“분명 카르타고군은 무너진 세르빌리우스 성벽의 틈을 목책 따위로 막고 농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굳이 도시 밖으로 기어 나와서 저런 괴상한 진형을 짜다니. 적장의 생각을 알 수가 없군요.”
“으음··· 교활한 적장 하스드루발이 또 간악한 계략을 세운 모양이군요. 분명 뭔가 함정을 파 두었을 겁니다.”
스키피오는 뤼쿠르고스 왕에게 대답한 후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카르타고군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 하스드루발이 기병을 거느리지 못한 약점을 보완할 방법을 고안해 낸 후 회전을 벌이거나 로마를 버리고 퇴각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시를 공격하는 대군을 상대로 농성을 벌이려면 시내의 전투원과 비전투원 사이의 유기적인 협력이 대단히 중요한데, 로마 시민들이 카르타고군에게 협력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카르타고군이 세르빌리우스 성벽을 방패 삼아 스키피오를 상대하려면, 먼저 수십만 명이나 되는 반항적인 시민들을 통제하고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서 기회를 노리는 1만 명의 로마군을 견제해야만 한다.
아무리 지휘력이 뛰어난 장수라도 5만 명의 병사만으로 그 모든 난제를 해결하며 무너진 세르빌리우스 성벽의 틈으로 쇄도하는 스키피오의 대군을 막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그런 스키피오의 생각을 짐작하고 적장의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과감하게 휘하의 모든 병사와 함께 우마차 수천 대를 끌고 숙영지를 나와 세르빌리우스 성벽 바로 앞에 진을 쳤다.
우마차 수천 대를 정사각형 모양으로 둘러 성벽에 난 틈을 틀어막고 마차로 짠 방진 안쪽에 전 병력과 코끼리를 배치한 것이다.
마시니사 왕자는 스키피오가 이끄는 대군이 티베르강을 건너 코앞까지 다가온 마당에 적극적으로 회전을 벌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벽 안에 숨어서 농성을 하지도 않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스드루발. 마차를 왜 저렇게 늘어놓은 거야? 회전을 벌이는 대신 성벽이 무너진 곳을 막고 농성할 생각이면 목책을 세우는 게 훨씬 낫잖아? 그리고 여기만 지키고 성문 쪽은 수비병력이 하나도 없던데 괜찮은 거야?”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로마 전체를 지키는 건 무리야. 한참 스키피오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시내의 폭도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내려온 적군이 몰래 성문을 열어 버리면 어떻게 되겠어?”
“으음··· 우리가 오히려 성벽 안에 갇혀서 다 죽게 되겠지.”
“그렇지. 그러니까 한니발 형이 돌아올 때까지 이 무너진 성벽 틈만 지키려는 거야. 그러면 스키피오와 싸워서 이긴 다음 다시 로마 시내를 장악할 수 있으니까.”
“그런 작전이었구나. 하지만 정말 저런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덧댄 괴상한 마차로 로마군을 막을 수 있을까? 차라리 목책을 두르고 해자를 파는 게 낫지 않아?”
“머리 잘 돌아가는 적장을 여기 붙잡아 두려면 이 정도 미끼는 던져 줘야지. 스키피오가 소시비오스와 합류하러 가는 것도 나름 골치 아프거든. 그리고 저거 생각보다 훨씬 쓸 만할걸?”
하스드루발은 마시니사 왕자에게 대답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이번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동원한 마차는 중세 유럽의 전쟁터에서 명성을 떨친 전투 마차 바겐부르크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우마차에 총안(성벽 등에 총을 쏠 수 있도록 뚫어 놓은 구멍)을 뚫어 놓은 두꺼운 나무판과 대포를 설치한 후 핸드 캐논과 석궁, 그리고 도리깨로 무장한 병사를 태워 적의 공격을 막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바겐부르크를 사용한 가장 유명한 사례는 15세기 보헤미아 지역의 개신교 농민군과 신성로마제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후스파라는 교파 신자인 보헤미아의 농민군은 온몸에 풀 플레이트 아머를 두른 신성로마제국의 기사단을 마차 방진을 사용해 연거푸 물리쳐 바겐부르크의 위력을 전 유럽에 알렸다.
하스드루발은 대포와 석궁 대신 오스티아에 정박한 전함에서 떼어 온 화염방사기와 성능 좋은 활로 무장한 병사가 타고 있는 마차로 몰려오는 로마군을 막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적장이 숨겨 둔 함정을 전부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하게 마차 방진으로 병사를 몰아갈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로마군이 마차 방진에서 약 500m쯤 떨어진 곳에서 행군을 멈추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쯧! 이래서 눈치 빠른 적장은 싫다니까. 뭔가 쌔한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지? 아마 지금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겠군.”
그의 예상대로 스키피오는 적장이 파 놓은 함정을 알아내기 위해 날카로운 눈초리로 카르타고군의 진영을 낱낱이 살피기 시작했다.
“마차 뒤에 코끼리를 배치했다는 건 일전에 그라쿠스 집정관님과의 전투에서 사용했다는 발리스타를 얹은 전투 코끼리를 또 써먹겠다는 거겠지. 여기선 잘 보이지 않지만, 마차 안에도 분명 병사들이 숨어 있을 거고. 시간이 좀 걸려도 화공을 준비해야 하나?”
그러나 스키피오에게는 눈앞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출 시간이 없었다.
하밀카르와 한니발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정찰을 보냈던 기병이 숨이 턱까지 차서는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기병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법무관 앞에서 경례도 하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스키피오 법무관님! 큰일 났습니다! 소시비오스 임시 총독님의 군대가 전멸했습니다!”
“뭐라고! 그럴 리 없다! 소시비오스가 전령을 보내온 지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이지 않나!”
“제가 직접 현장을 보지는 못했지만, 정찰 임무 수행 도중에 전장에서 도망친 일리리아 속주군 소속 기병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적장 한니발은 부관에게 보병을 맡긴 채 직접 기병을 이끌고 전장에 일찍 도착해 하밀카르의 군대와 싸우던 아군의 배후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게 언제 벌어진 일인지는 확인했나?”
“어제 제12시(현대의 정오) 즈음에 전투가 끝났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스키피오는 머릿속에서 한니발이 로마에 돌아올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저께 만난 전령은 중장보병이 일주일 동안 행군할 거리에서 왔다고 했다. 하지만 만약 한니발이 이번에도 기병만 이끌고 강행군한다면 이틀 정도면 로마에 도착한다. 아니, 잘 포장된 도로를 달려올 게 분명하니 오늘 저녁 늦게 도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모든 장교와 용병대장을 불러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티베리강 변에 석양이 깔리기 전에 눈앞의 적을 전멸시켜야 한다. 전원 서둘러 출격 준비를 하도록.”
젊은 법무관의 말에 로마군 장교와 용병대장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스키피오는 상세한 작전을 세우기 전에 적군을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견을 대변해 뤼쿠르고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스키피오 마케도니쿠스 법무관님. 평소와는 달리 이번에는 공격을 서두르시는군요.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니발이 오고 있습니다. 운이 나쁘면 오늘 저녁에 이곳에 도착할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을 듣자마자 로마군 장교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불패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
모든 로마인 중 두 형제를 동시에 전장에서 상대하는 게 두렵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뤼쿠르고스 왕은 스파르타인으로서의 체면을 차리기 위해 짐짓 태연한 척을 하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만만치 않은 두 적장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양군의 수가 비슷한데 이미 방어선을 구축한 적을 오늘 안에 몰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젯밤에 로마 시내에 서신을 묶은 화살을 여러 발 쏴 두었습니다. 우리가 공격을 시작하면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서 농성 중인 아군도 적의 배후를 공격할 겁니다.”
“역시 주도면밀하시군요. 그렇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병사들을 출격시킬 준비를 하겠습니다.”
법무관의 출격 명령은 장교들의 입을 통해 전군에 전해졌다.
로마군 병사들은 장교들의 독촉에 급히 딱딱한 군용 건빵과 육포 따위로 이른 점심을 먹은 후 카르타고군의 마차 방진을 향해 진격했다.
하스드루발은 마차 방진의 한가운데에 있는 코끼리 등에 올라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적장 스키피오가 미끼를 물었다! 궁수와 투석병은 사격 준비를 해라!”
장군의 명령이 전군에 퍼져 나가자 마차에 타고 있는 궁수 5천 명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고 마차 방진 안쪽에 포진한 발레아레스 투석병 2천 명이 이마에 묶어 두었던 고각 발사용 슬링을 풀어 손에 들었다.
스키피오는 적군이 사정거리가 긴 활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발대와 적진과의 거리가 200m 안으로 좁혀지자마자 돌격명령을 내렸다.
“선발대! 적진을 향해 돌격하라!”
로마군의 나발수가 법무관의 명령을 듣자마자 힘차게 뿔나팔을 불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로마인과 그리스인, 그리고 누미디아의 마사에실리 부족으로 구성된 경보병 수천 명이 원형 방패로 얼굴을 가리며 마차 방진을 향해 달려 나갔다.
카르타고군의 병사들은 적군이 활과 슬링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미리 장군에게 지시받은 대로 공중에 신호탄을 발사했다.
―피유우우우웅! 파앙!
카르타고를 상징하는 자주색이 로마의 푸른 하늘을 가득 메우자 수천 개의 화살과 돌멩이가 로마군 경보병대에게 빗발쳤다.
선두에서 달려가던 로마군 경보병들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화살비를 보고 몸을 웅크리며 동료들에게 외쳤다.
“화살이 날아온다! 방패로 몸을 가려라!”
잘 훈련된 약 8천 명의 경보병이 일제히 몸을 웅크리며 방패를 앞으로 내밀어 얼굴과 상반신을 가리자 날아온 화살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방패 박혔다.
―타다다다다닥!
행동이 조금 느렸던 몇몇 병사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지만, 스키피오와 함께 여러 전장을 거친 경험 많은 경보병들은 대부분 적의 화살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들은 화살보다 조금 늦게 날아온 발레아레스 투석병의 공격은 막아 낼 수 없었다.
그들은 화살을 막느라 방패를 앞으로 내미는 바람에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성인 남자 주먹만 한 돌멩이에 정수리와 어깨를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크어어억!”
“높은 각도로 돌이 떨어진다!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라!”
로마군 경보병들은 반사적으로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카르타고군의 궁수대가 다시 텅 비어 있는 적의 가슴과 배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피유우우웅!
결국 변변한 갑옷도 입지 않은 로마군 경보병대는 다양한 각도에서 날아온 적군의 투사체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해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의 왕 뤼쿠르고스는 그 모습을 보며 불같이 화를 냈다.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인은 투창을 제외한 원거리 무기를 겁쟁이들이나 사용하는 것이라고 여겨 경멸했지만, 특히 스파르타인은 그 정도가 심했기 때문이다.
“더러운 북아프리카의 야만인들! 전투에 목숨을 걸 생각은 않고 먼 거리에서 야비한 무기를 써 대는 꼴이라니!”
스키피오는 뤼쿠르고스 왕처럼 분통을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부하들이 패주하는 모습을 보고 손목에 핏줄이 드러나도록 두 주먹을 꽉 쥐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전군 테스투도 진형을 유지하며 전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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