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200화 (200/201)

[ 200 ] [199화] 최후의 결전 (3)

스키피오의 명령이 떨어지자 로마 군단병과 그리스 중장보병대가 일제히 커다란 방패를 치켜들어 귀갑진을 짰다.

로마군의 중장보병 3만 5천 명은 마치 수백 마리의 거북이와 같은 모습으로 빗발치는 화살과 돌멩이를 방패로 막아 내며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하스드루발은 코끼리 등 위에서 오랜만에 로마군의 귀갑진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보시지! 코끼리 발리스타 부대! 사격 준비!”

그가 오른팔을 높이 들며 외치자, 사수 40명이 코끼리 등 위에 얹어 놓은 소형 발리스타에 창대처럼 굵은 화살이나 성인 남자 주먹 두 개만 한 둥근 돌을 장전했다.

사수들이 준비를 마치자, 하스드루발은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오른팔을 힘차게 앞으로 뻗으며 외쳤다.

“발사!”

그와 동시에 작지만 강력한 발리스타가 일제히 적진에 투사체를 발사했다.

코끼리 등 위에서 발사된 화살과 돌이 번개처럼 날아가 로마군이 들고 있는 커다란 방패에 부딪히며 둔탁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콰지지직!

로마군 병사들은 맨 앞줄에 있던 전우들이 두꺼운 방패를 박살 내는 적군의 화살과 돌에 가슴을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끄아아악!”

“기수가 쓰러졌다! 누가 대신 부대기를 들어!”

하스드루발은 일방적인 공격을 받고도 사기를 잃지 않고 군기를 높이 든 채 다가오는 적을 보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 바로 옆에서 동료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가는데 전혀 사기가 떨어지지 않다니··· 사람이 아니라 좀비 떼를 상대하는 것 같네.’

그 자리에 있던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은 이번 전투에서 지면 자신의 조국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계속 전진해 마차 방진에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로마 군단병들은 적진과의 거리가 10m 정도로 좁혀지자, 카르타고군 병사들에게 산발적으로 긴 투창 필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차 위를 지키는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적군이 던진 투창이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향해 날아올 때마다 잽싸게 허리를 숙여 높은 나무판자 뒤로 몸을 숨겼다.

로마군이 던진 투창 수천 개는 적군 대신 마차의 몸통과 그 위에 고정시켜 둔 두꺼운 나무판자에 박히고 말았다.

카르타고군 병사들은 로마군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투창을 모두 써 버리자, 나무판 뒤에서 고개를 내밀며 마차에 달라붙는 적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곧 마차에 기어오르는 적을 막는 카르타고군과 목숨을 걸고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로마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저 빌어먹을 마차에 기어올라라!”

“카르타고 놈들을 로마에서 몰아내라!”

로마군의 백인대장과 용병대장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사슬갑옷을 입은 로마 군단병과 청동 흉갑을 입은 그리스 중장보병 수만 명이 일제히 마차 방진에 달라붙었다.

그들은 왼손의 방패를 버려 가면서까지 사력을 다해 마차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

하지만 나무판자를 덧댄 마차 방벽은 어지간한 군영의 목책만큼 높고, 딱히 붙잡을 곳이 없다 보니 보기보다 기어오르기 쉽지 않았다.

거기에 카르타고군 병사들이 나무판 위로 상체만 내밀고는 마차 아래에 있는 적군의 머리를 향해 큰 돌을 떨어트리고 쇠도리깨를 휘둘러 로마군을 물리쳤다.

스키피오는 별 소득 없이 아군 병력만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한니발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끝낼 수가 없다. 크레타 궁수대! 마차 방진 안쪽의 적에게 활을 쏴라!”

젊은 법무관의 절박한 목소리로 외치자, 1천 명의 로마군 측 크레타 궁수대가 사슴뿔로 만든 전통 활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하스드루발은 코끼리 등 위에서 적의 궁수들이 활을 들고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대응에 나섰다.

“나를 기준으로 전방 약 반 스타디온(약 90m) 떨어진 곳에 적 궁수 부대가 보인다! 당장 편전을 발사하라!”

카르타고군 장교들이 즉시 전군에 장군의 명령을 전달하자 마차에 타고 있던 카르타고군의 크레타 궁수 중 5백 명이 통아에 편전을 넣어 활시위에 건 후 적에게 발사했다.

―쌔애애애액!

기다란 나무통에서 빠져나온 짧은 화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날아갔다.

그러자 로마군의 크레타 궁수들은 로마군의 궁수들이 미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기도 전에 눈에 보이지 않는 화살을 맞고 차례로 쓰러졌다.

“크어어어억!”

“뭐야! 대체 뭘 맞고 쓰러지는 거야!”

결국 스키피오가 아껴 두었던 정예 궁수대는 화살 한번 쏴 보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대열의 후방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스키피오는 도망치다 등에 편전을 맞고 앞으로 고꾸라진 크레타 궁수의 시신을 살펴본 후 분통을 터뜨렸다.

“이건···! 이 짧은 화살은 아버지를 해친 그 화살이 아닌가! 빌어먹을 카르타고 놈들! 더는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전 기병대는 나를 따르라!”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하스드루발의 화살을 맞고 쓰러지던 장면을 떠올리자 분을 참지 못하고 기병 7천 기를 이끌고 마차 방진을 향해 돌진할 채비를 갖추었다.

바로 그때, 전장의 동쪽에 있는 퀴리날레 언덕에서 우렁찬 뿔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우우.

스키피오는 즉시 고개를 들어 무너진 세르빌리우스 성벽 너머에 있는 언덕 위를 바라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드디어 지원군이 도착했다! 로마 시내의 시민들이 우리를 도우러 왔다!”

카르타고군의 공세에 사기를 잃어 가던 로마군 병사들도 언덕 위를 가득 메운 아군을 보고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우와와아아아아!”

하스드루발이 카피톨리노 언덕의 포위를 풀자, 집정관 파비우스가 직접 로마 군단병 1만 명과 민병대 5천 명을 이끌고 스키피오를 돕기 위해 전장에 나타난 것이다.

파비우스는 퀴리날레 언덕의 능선에서 마차 방진에 가로막혀 고전하는 아군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적장 하스드루발이 또 기괴한 방법으로 우리의 젊은 영웅을 괴롭히고 있다! 가라! 적의 후방을 몰아쳐서 로물루스의 나라를 구하는 거다!”

로마군 병사들은 늙은 집정관의 뜨거운 외침을 듣고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무너진 성벽의 틈을 향해 능선 위를 달려 내려왔다.

“로마 인빅타!”

그 모습을 본 스키피오의 병사들도 기운을 얻어 더욱 극렬하게 마차 위로 기어오르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앞뒤로 적을 맞이한 상황에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파도처럼 몰려오는 적군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로마인들이 마음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구나. 내가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적장들이 아닌데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능선을 달려 내려온 파비우스의 병사들은 무너진 성벽의 잔해에 도착하기 직전에 갑자기 힘없이 쓰러지더니 피가 흐르는 발바닥을 부둥켜 잡으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내 발! 내 발!”

“함정이다! 바닥에 마름쇠가 깔려 있다!”

하스드루발은 스키피오가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서 농성 중인 로마 수비대의 잔존 병력과 힘을 합쳐 자신을 공격할 것임을 예상하고 지난밤 퀴리날레 언덕의 능선에 마름쇠를 깔아 놓았다.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오던 로마군 병사들은 무너진 성벽 바로 앞에 넘어져 있는 아군을 보고 전방에 함정이 깔려 있는 것을 알아채고 속도를 줄이려다 혼란에 빠져 버렸다.

“멈춰라! 전방에 함정이 깔려 있다.”

“야! 그렇게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 해! 으악!”

앞장서서 퀴리날레 언덕을 내려오던 병사들이 갑자기 속력을 줄이자, 뒤에서 달려오던 병사들이 앞에 있는 동료의 등에 부딪히며 넘어지는 자가 속출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세 좋게 앞장서서 돌진하던 파비우스의 병사 수백 명은 언덕 위에서 굴린 눈덩이처럼 한 곳에 뭉쳐 무너진 성벽 바로 뒤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하스드루발은 기세가 꺾인 적군이 몸을 추스르고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화염방사기 발사!”

그가 다시 한번 외치자, 세르빌리우스 성벽 근처의 마차에 설치된 화염방사기 열 대가 일제히 불을 뿜어냈다.

―화르르르륵!

그리 넓지 않은 무너진 성벽 틈새 바로 앞에 뭉쳐 있던 로마군 병사들은 미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불길을 피할 틈도 없이 불줄기에 휩싸여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악!”

언덕을 내려오던 로마군 병사들은 카르타고군의 화염방사기가 마치 비로 쓸 듯 포신을 좌우로 돌려 가며 무너진 성벽 틈 사이로 화염을 쏟아 내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고 말았다.

언덕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비우스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완전히 어린 적장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말았구나. 오늘이 로마의 역사의 마지막 날이란 말인가······.”

스키피오도 파비우스와 마찬가지로 황망한 눈빛으로 불길에 휩싸인 퀴리날레 언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대부분의 로마군 병사들이 사기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들이 겪을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시비오스의 군대를 물리친 한니발이 기병 1만 기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로마로 돌아오던 도중 동맹인 삼니움족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지친 말을 기운이 넘치는 새 말로 갈아타고 예정보다 일찍 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뿌우우우우우우.

우렁찬 뿔나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전장에 난입한 1만 기의 카르타고군 기병대가 로마군 본대의 좌측면을 향해 거침없이 돌격해 왔다.

스키피오는 그 모습을 보고 마차 방진을 향해 있던 말머리를 적 기병대를 향해 돌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올림포스의 신들께서는 로마를 버리셨구나··· 명예로운 삶을 이어 나갈 수 없다면 명예롭게 죽는 수밖에.”

그는 휘하의 기병대를 이끌고 랜스를 앞으로 내민 채로 달려오는 적 기병대를 향해 용감히 달려 나갔다.

대열의 맨 앞에서 말을 달리던 한니발은 화려한 청동 갑옷을 입은 애꾸눈의 적장이 한 손에 검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보고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

“저자가 그 유명한 스키피오 마케도니쿠스인 모양이군. 모두 저 적장을 건들지 마라! 내가 직접 저자가 북아프리카에서 한 짓을 되갚아 주겠다!”

한니발은 허리춤에서 외날검 팔카타를 뽑아 들고 애마 부케팔로스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적장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 나갔다.

스키피오는 덩치 큰 흑마에 탄 자주색 두정갑을 입은 장수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저자가 바로 한니발이구나! 적어도 바르카 가문의 원수 중 하나를 길동무 삼아야 죽어도 여한이 없겠지!”

그도 한니발처럼 로마군의 가늘고 긴 기병검 스파타를 오른손에 높이 들고 한니발을 향해 달려 나갔다.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던 두 장수는 서로의 곁을 스치듯 지나가며 상대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키가 작은 말을 탄 스키피오는 적장의 얼굴을 노리고 긴 검을 힘껏 내질렀지만, 한니발은 잽싸게 허리를 뒤로 젖히며 오른손에 든 검으로 스키피오의 목을 벴다.

“크윽!”

스키피오는 짧은 비명과 함께 목에서 피를 흘리며 말 위에서 떨어져 절명하고 말았다.

전 지중해를 휘저으며 수많은 승리를 거둔 젊은 로마의 명장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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