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터스의 하인-27화 (27/298)

27편

<-- 리엔 -->

피로와 통증으로 가득 지친 내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내 방으로 돌아가려 리엔의 방앞을 지나가는 순간. 내 귀에 낯선 소리가 들려온다.

팔락.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그 소리는 살짝 열린 리엔의 방안에서 고요히 들려왔다.

“....?”

그 소리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살짝 열린 문틈사이로 리엔의 방을 들여다본다. 역시나 리엔은 자신이 가져온 고문서 사이에 파묻힌채 열심히 무언가를 읽고 한쪽에 적어나가고 있었다.

“뭐지..?”

그녀가 저렇게 열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조사하고 읽어가고 있는 정보에 대해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호기심을 외면하지 못했던 나는 그녀의 방안에 자연스럽게 들어가기 위해 가볍게 헛기침을 터트리며 천천히 그녀의 방문을 열어간다.

“아.. 타메르씨?”

그러자 책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리엔은 내 인기척을 느끼고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잠자리는 불편하지 않았나?”

“에.. 교단의 최고급 프리미엄 객실보다는 못하지만.. 괜찮았어요.”

베시시 웃으며 철없는 이야기를 내뱉는 리엔. 언뜻보면 세상물정 모르는 녀석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를 알고있는 듯한 깊은 눈동자를 가진 리엔의 모습을 보아 그녀가 한말이 단순한 농담이라는 것은 어렵지않게 꺠달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뭘 그렇게 보는거냐?”

내 물음에 리엔은 대답대신 자신이 들고있는 책을 나에게 보여준다. 나름 멋이라고 날렵하게 휘갈겨쓴 글자 때문에 제목은 뭔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대충 신화나 역사서와 유사한 책 같았다.

“진실을 찾고 있었어요.”

“진실...?”

진실이라. 너무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내가 의문을 표하자 리엔은 나에게 보여줬던 책을 다시 자신의 품으로 끌어오며 입을 연다.

“제가 모르는 진실과... 타메르씨가 모르는 진실. 그리고 이 유적지에 대한 진실이요.”

“.....”

역시나 애매모호한 대답. 그녀의 말을 이해못하는 내 무식한 머리를 탓하며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걸터앉아 그녀가 주변에 쌓아둔 책중에 하나를 주워들어 대충 내용을 읽어본다. 책의 내용은 과거의 역사들. 딱딱한 연도와 사건의 나열은 절대로 나에게 흥미를 줄 수 없었던 내용들 뿐이었다.

“내가 모르는 진실이라니... 그런 것도 존재하나?”

내 물음에 리엔은 자신이 읽던 책을 덮고 한쪽에 쌓아두며 다시 또다른 책 한권을 옆에서 자신의 품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흘러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는다.

“타메르씨. 광혈의 저주를 받으셨죠?”

“...?!”

흘러가는 말이라고 하기에 너무 중요한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그녀의 말에 내 몸이 움찔 떨린다. 나는 그녀의 앞에서 내가 광혈의 저주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런 능력을 보인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광혈의 저주에 걸렸다는 것을 간파한 그녀의 한마디에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타메르씨는... 타메르씨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세요?”

리엔은 내 날카로운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동요없이 잔잔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 과거 기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과거에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광혈의 저주로 인한 끔찍한 사건이.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외면하고 있었다. 몇 년동안 외면하고 잊으러 애쓰고 있던 기억이 지금에 와서 퍼뜩 기억날 일은 절대로 없었다.

“제가 가진 능력은 미래를 읽는 능력이 아닌가봐요.”

리엔은 자신 읽던 책으로부터 시선을 뗴고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간다.

“타메르씨의... 과거도 읽어버렸으니까요.”

“......”

그녀의 한마디가 무슨 이야기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나와 그녀가 최음제에 중독되어 격렬한 관계를 맺었을때. 그 끝에서 몽롱한 의식 속에 나는 그녀의 과거를 보았다. 그녀또한 그 순간 내 과거를 읽은 것 같았다.

“아는대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타메르씨가 기억하는 과거와... 로터스라는 괴물 밑에서 일하는 이유를요.”

“뭐... 숨길것도 없지.”

그녀의 요청에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긍정을 표한다. 어자피 숨길만큼 부끄러운 과거도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큰 흥미가 생겨버렸다. 그녀가 알고 있는 자세한 진실을 듣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가진 과거 이야기를 그녀에게 알려줘야만했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라... 뭐 제대로 기억안나지만... 아는대로 말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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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히모스에 오기전 나의 과거.

모든 것이 흐릿했다. 5년간의 외면과 망각에 대한 노력을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하진 않았다.

흐릿한 기억속. 나는 어두운 숲안에 자그마한 모닥불을 피운채로 앉아있었다. 그런 내 맞은편에는 한 소녀가 무언가를 구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친근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오빠~!”

달콤한 목소리. 잃어버리기 싫을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검은 옷을 입은 조그만 어린아이였다는 것.

“마녀다! 저기에 마녀가 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요란한 외침이 내 기억을 뒤흔든다. 마녀. 그것은 바로 내 앞에 있는 소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마녀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지칭하며 그녀를 잔인하게 죽이려한다.

“도망가. 여긴 내가 막을테니까.”

나는 그런 소녀를 등뒤에 숨기며 요란스럽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인간들의 무리를 막아선다. 그런 내 행동에 소녀는 불안한 듯 온몸을 덜덜 떨며 나에게 묻는다.

“오빠. 다시... 만날 수 있는거야?”

“아마도. 내가 살아남고. 너가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내 말에 소녀는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간절한 바람이 담긴 목소리로 소원한다.

“다.. 다시 만날꺼야. 이번엔 그 누구의 방해가 없는 곳에서...”

“그럴수만 있다면야..”

나는 그런 그녀의 소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준다. 그제서야 소녀는 꽉 움켜쥐고 있던 내 옷자락으로부터 손을 뗴고 숲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내 검을 움켜쥐고 소녀를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홀로 대항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가 그 많은 사람들을 이길 수 있으리가 없었다. 어느정도 시간을 벌다 소녀가 멀리 도망쳤다고 생각되는 순간 나 또한 몸을 빼 그들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치는 나날들. 도망자의 삶을 살던 나에게 한가지 소식이 들려온다. 그것은 바로 마녀라고 불리우던 소녀의 체포와 화형. 그 소녀는 결국 마녀로써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 이후 나에게 남은 것은 끝도없는 절망감과 상실감. 그런 상실감에 이미 괴물이 된 나는 내 목숨을 끊기 위해 괴물들이 득실거린다는 베히모스를 찾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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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리엔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이상하네요.”

“가물가물한 이야기니까. 제대로 된 이야기라고는 장담못한다. 그냥... 내 머리 한구석에 남아있던 과거의 잔재를 긁어모아 말해준 이야기일뿐이니.”

“뭔가 모순이 많이 있어요. 실제로 교단에서 10년간 마녀를 처형한 기록은 없어요. 타메르씨가 말한 마녀는...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니면... 아직 잡히지 않아 처형이 되지 않았던지요.”

리엔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문다. 지금와서 그 꼬마 마녀가 어째서 내 삶에 큰 영향을 줬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든 기억이 불완전하고 흐릿했다.

“그리고... 타메르씨의 가족 이야기는..”

“그건 별로 하고 싶지않아.”

나의 가족. 나를 나으시고 키워주신 그들을 나는 내 손으로 죽여버렸었다. 아마도 광혈의 저주가 처음으로 깨어날 때. 나는 내 몸안에 들끓는 살기와 힘을 제어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지.

“직접적으로 말씀드릴께요. 저는 타메르씨의 과거를 봤어요.”

고민하던 나를 바라보던 리엔은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아마도 자신이 원하는 내 과거 기억을 듣기 위한 강수를 두는 것일까.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간다.

“수많은 단편적인 기억들 사이에 확연히 눈에띄는 두가지 과거가 보였어요. 아마도 그것이 타메르씨의 운명에 큰 전환점이 된것같네요.”

“흐음... 내 운명에 큰 전환점이라..”

그녀의 말에 나는 흥미를 표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내 운명에 큰 전환점이 된 과거기억을 봤다면... 나 또한 리엔의 운명에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을 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친오빠를 살해한 기억. 하지만 지금은 그 이야기를 꺼낼때가 아닌 것 같았다.

“첫째. 타메르씨는 자신의 부모님과... 한명의 여동생을 타메르씨의 손으로 죽였죠. 광혈의 저주의 여파로...”

“....그렇지.”

나는 큰 거부감없이 그녀의 말에 수긍한다. 분명 나의 가족은 내가 죽였다. 가슴이 쓰리는 진실이었지만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그 다음 두 번째 기억. 이 기억이 가장 중요한지 리엔은 잠시 뜸을 들이며 나의 안색을 살펴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볼뿐이었다.

“한 소녀가 있었죠. 당신에게 매우 소중하고 귀중한 소녀.”

“그래... 그런 기억이 있어. 소중했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타메르씨는 방금전 그 소녀를 잃어버렸다고 말했었죠?”

마치 나를 심문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별 불만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물음에 대답한다. 그러자 리엔의 얼굴에 작은 어둠이 드리워진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상한거네요.”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는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소중해하는 소녀를 만났고. 확실하지 않지만 인간 무리로부터 그녀를 도망치게해주기 위해 그녀와 해어졌다. 이정도면 충분히 충격적인 일 아닌가?”

“아니요. 문제는..”

마치 답답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인 리엔은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른침을 한번 삼킨뒤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나에게 밝힌다.

“제가 본 과거는... 그 소녀와 헤어진 순간이 아니에요. 그 소녀와 만난 순간이... 보인 것이었거든요.”

“......”

예기치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할말을 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자 작게 한숨을 몰아쉰 리엔은 설명을 이어나간다.

“제 능력은 미래를 보는게 아니었어요. 운명을 읽는거죠. 그러니까 비록 단편적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과거, 미래, 현재. 그 모두를 읽을 수 있었던 거에요. 그리고 제가 타메르씨에게 봤던 것은... 타메르씨의 운명의 전환점. 혹은 뒤틀리는 순간이었던 거에요.”

“그러니까. 너의 말은 내가 그 소녀를 만난 순간에. 내 운명이 뒤틀렸다?”

“...네. 그렇게 밖에 말씀 못드리겠네요.”

욱씬.

그 순간.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대못이 박혀들어가는 듯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뭔가 감각기관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 그런 갑작스런 통증에 나는 마리를 감싸쥔채 인상을 찡그린다.

“타.. 타메르씨?!”

내가 몸을 바로잡지 못하자 깜짝놀란 리엔은 나에게 달려와 내 몸을 부축해준다. 그런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정리해나간다.

“뭔가... 내 기억이 뒤틀려졌다는건가...”

뭔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실들에 의심을 품게되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과거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 다시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 이야기는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고 모호했다. 거기다 기억들간에 연관성도 떨어지고 뭔가 상당히 어색하다는 느낌이 가득했다.

“크으...”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심을 떨쳐낸다. 그리고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고 흔들리던 자세를 바로잡는다.

“뭐.. 그래봤자 지나간 과거야. 별 상관은 없어.”

“.....”

내 말에 리엔은 조용히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으며 내 몸을 아직도 부축하고 있는 그녀의 팔을 조심히 밀어낸다.

“그나저나... 너도 비밀을 하나 가지고 있더군.”

“제... 비밀이요?”

내 말을 예상치 못했는지 벙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리엔을 바라보며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한다.

“너와 비슷하게 나도 봤다. 너의 단편적인 과거 기억을.”

“그... 그 걸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소리치는 리엔. 그녀가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누군가의 운명을 본다는 것은 그녀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으니.

“뭐...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랑 관계를 맺었을 때...”

“...아..”

내 말에 리엔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라버린다. 그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녀의 솔직한 반응에 피식 웃어버린다.

“너가 본 순간. 나도 너의 과거를 봤었어. 나와 달리 넌 제대로 기억하고 있겠지? 너가 신성한 자라는 칭호를 얻는 순간을...”

“하... 하지만 그건!!”

내 말을 듣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리엔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친오빠를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순간. 아마도 그때의 일이 떠오른 것이 분명했다. 뭐라 자신을 변명하려 더듬거리는 리엔의 모습에 나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별관심이 없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한다.

“이유야 관심없어. 순한 너의 성격으로 보면 악의를 가지고 죽이지는 않았을테니까.”

“......”

리엔은 그 사실에 대해 나에게 뭐라 할말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밝히면 안된 이유가 있는 듯 그녀는 입을 꾹 다문채 조용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여금 중요한 것은 내가 그때 본것은 절대 헛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리엔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의 친오빠를 자신의 손으로 살해한 것또한 사실인 것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봤던 내 과거또한 거짓이 아니라는 것.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녀로부터 등을 돌려 방밖으로 걸어나간다. 리엔또한 그런 나를 배웅조차 하지 않고 조용히 내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한 몸을 침대에 뉘이며 약병안에서 알약을 하나 꺼내 입에 문다. 외면하고 싶어도 리엔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그 정체불명의 소녀. 그 소녀는 누구였던가.

하지만 나혼자 아무리 고민해봐도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는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괜한 고민을 털어낸 나는 피곤한 몸을 조금이라도 쉬게만들기 위해 모든 고민을 잊고 침대에 몸을 뉘인채 조용히 얕은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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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메르 오빠. 타메르 오빠!!”

누군가 나를 부른다. 매우 그리웠던 목소리. 조그만 종달새가 지져귀는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오빠. 또 졸았어?”

“...으응?”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뜬다. 그런 내 앞에는 밝은 노란빛으로 타오르며 내 몸을 따듯하게 데워주는 모닥불이 하나 피워져있었고... 그 옆에는 한 소녀가 있었다. 자신의 머리에 맞지 않는 커다란 마녀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검은 로브를 몸에 두르고 있는 자그마한 흑발의 소녀. 아무리 많게 잡아도 고작 8살정도의 자그마한 어린아이였다.

“아... 미안. 좀 피곤했었다.”

피곤한 눈가를 훔치며 나는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소녀의 물음에 대답한다. 그러자 소녀는 조심스럽게 내 등뒤로 다가와 고사리같은 작은 손으로 나름대로 있는 힘껏 내 어께를 주물러준다. 하지만 그래봤자 조그마한 소녀. 시원하기는 커녕 간지러워서 못견딜 아기자기한 안마였다. 그런 소녀의 행동에 피식 웃은 나는 부드럽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써 안마를 하는 그녀를 끌어대 내 앞에 세워둔다.

“그렇게 걱정해줄 필요는 없어. 오빠. 이래뵈도 꽤 튼튼하거든.”

“에이.. 아닌것같은데?”

뾰로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꼬마 숙녀. 하지만 걱정이 그득한 그녀의 눈동자가 그녀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괜찮아. 이래뵈도 오빠. 괴물이니까.”

“응! 그건 오빠 입이 닳도록 한 말이잖아. 괴물과 마녀~ 참 어울리는 한쌍 아니야?”

괴물이라는 단어에 별다른 위화감을 가지지 않는 것인지 소녀는 내 팔에 찰싹 달라붙어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나또한 내 성격에 맞지 않는 수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괴물같은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에이... 닭살 돋게 왜그래~ 나야말로 고맙지.”

녀석은 나이에 맞지 않게 작은 손으로 힘겹게 내 등을 토닥거리며 어설프게나마 나를 위로해준다. 그런 그녀를 품에 안자 나는 가슴 깊숙한 곳을 천천히 채워나가는 따듯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행복했다. 비록 한 순간임을 알고 있었지만. 왠지모르게 지금 이 찰나의 순간이 행복했다.

“저쪽이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고요한 평화를 뒤흔드는 요란한 외침. 그와 동시에 내품에 안겨있던 소녀가 깜짝놀란듯 비스듬이 쓰여있던 그녀의 마녀모자가 모닥불 근처로 툭 떨어져버린다.

“...젠장...”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은 나는 모닥불 근처에 떨어져 가장자리부터 타들어가는 마녀모자를 황급히 주워들고 내 품에 안겨있는 소녀의 머리위에 푹 눌러씌워준다.

“꽉 붙잡아. 한 동안은 또 달려야할 것 같으니까.”

“으.. 으응..”

두려움이 가득한 소녀의 떨림을 느끼며 나는 외침이 들린 반대방향으로 전력질주하기 시작한다. 자세한 이유따윈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내 품안에서 안쓰럽게 오들오들 떨고있는 그녀를 지켜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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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메르.. 타메르!!

“...아.. 으응..”

머릿속을 뒤흔드는 질퍽한 목소리에 나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난다.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나 로터스. 나는 달콤한 꿈을 방해한 이 망할 로터스의 목소리에 나지막하게 욕을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얼마나 잔거지...”

창문 틈새로 보이는 햇살은 이미 천천히 사라져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느세 저녁이 된것이다. 예상보다 상당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에 나지막하게 신음을 삼킨다.

-이봐. 타메르. 북부지역에 모험가가 출현했다.

“뭐? 최근에 접근한 비공정은 없었잖아?”

-모른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녀석이다.

“갑자기 나타났다라...”

나는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긁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비공정도 없는데 나타난 모험가라. 갑작스레 나타났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없에버리면 그만이었다.

“어디지?”

-북부지역 텐타클 양육소 근처다.

“젠장.. 왜 하필 그곳이지? 그곳은 질색인데...”

북부지역. 내가 가장접근을 꺼리는 장소이다. 로터스의 설명대로 그곳은 텐타클 양육소이다. 즉 텐타클의 생산 그리고 성숙을 담당하는 구역. 좋게말해서 양육소이지 솔직히 말하면 감옥이었다. 이때까지 로터스에 의해 붙잡힌 여성들만 감금시켜 억지로 텐타클을 잉태시키고 출산시키는 곳. 그곳이 바로 북부지역이었다.

-서둘러라. 양육소가 공격당하면 여러모로 피곤해진다.

“알아.. 젠장.”

만약 양육소가 파괴되면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로터스에 의해 붙잡힌 여성들이 해방되게 된다. 뭐. 그들중 대부분은 반쯤 미쳤거나 이성을 상실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로터스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아직까지 가슴에 품고 때를 기다리는 녀석들이 있을지도...

“젠장... 도대체 이번엔 어떤 녀석이지?”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늦은 저녁에 초대받지 않고 이곳에 들어온 손님을 만나기 위해 북부지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타락한 마법사 / 하지만 제 소설은 다 먹습니다. 히로인 맛있쪄. 쳐묵쳐묵

Solar Eclipse / ㅋ... 좀 오래걸리겠죠. 그렇죠?

하메르 / 다음 기회에!!

변사체 / 에잉... 그러면 안되죠. 키르비르가 어떤 인재인데 ;ㅅ;

Lizad / 만약 그런다면 곧바로 사망이죠. 가슴에 심어진 알이 그냥 팡 터져버리니까요.

타락한 비둘기 / 그렇습니다. 그 부족함을 노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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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날과 많이 바뀐 화. 옛날 오리지날 로터스의 하인은 M.S. 즉 Monster Story라는 또다른 소설과 연계된 소설이었지만...

여기선 그게 없으니 독자적인 설정을 하나더 추가해야만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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