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편
<-- 키르비르 -->
키르비르가 돌아온 것은 저녁 해가 베히모스 산맥 사이로 사라지려고 할 때. 그녀는 거의 반나절동안 나를 허공에 매달아둔 것이다. 이미 발목의 감각은 무감각했고 머리로 쏠린 피 떄문에 현기증이 나기 시작한다.
“기분이 어때?”
“최악이야.”
피가 몰려서 어질어질한 시야사이로 짗꿎은 미소를 짓고있는 키르비르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는 손가락을 세워 내 볼을 콕콕 찌르며 말한다.
“잘익은 토마토 같아. 손끝으로 콕 찌르면 터질 듯 싶은데?”
“좀만 더 있으면 진짜 터질것 같은데?”
내 한마디에 피식 웃은 키르비르는 가볍게 허공에 손을 휘젓는다. 그러자 무형의 힘이 거꾸로 매달린 내 몸을 부드럽게 받혀준다.
“후우...”
머리에 잔뜩 몰려있던 피가 다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묘하면서 나쁘지 않는 감각에 짧게 한숨을 내쉰다. 그러자 스텝에 앉아서 무끄럼히 나를 바라보던 키르비르는 나에게 묻는다.
“내 계산은 틀리지 않아. 분명 어제까지가 한계였단 말이야.”
“무슨 말이야?”
“네이.”
“.....”
그녀의 얼굴에는 확신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런다고 네이와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 사실대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너... 네이와 무슨 일 있었어?”
“그다지...”
나는 솔직히 대답하지 않고 말끝을 흐리게 얼버무린다. 그러자 역시나 눈치빠른 키르비르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내가 가져온 풀은 애미로안 풀이야. 마계에 존재하는 돌연변이 종족인 네베르족과 뤼베크족의 야성을 진정시키는 필수 생필품이지.”
이미 네이에게 들었던 설명. 하지만 나는 모른척 시침이 뗴며 그녀의 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의 야성은 다양한 모습으로 들어나. 상대에 대한 감정이나 증오의 증폭. 지나친 폭력성을 보이거나 이성적인 판단력이 사라지던가. 간단하게 우리랑 대화하는 네이가 아닌 거의 짐승이 된다 생각하면 쉬워.”
“그래서... 너의 말의 요지가 뭔데.”
“아.. 뭐.. 그게...”
키르비르는 갑작스레 그녀답지 않게 살짝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자신의 볼을 긁적거린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연다.
“요즘 네이가... 너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하거든.”
“그러니까... 나와 네이 사이에 뭔가 있었을 것 같다?”
“으응... 뭐 그런 것 같다는거지.”
나는 애써 모른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나와 네이의 관계를 키르비르에게 들키면 어떻게 될까? 장담하건데 그다지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좋은 생각이 있었다.
“하긴... 어제밤에 네이가 찾아왔긴 왓었어.”
“....뭐?!”
내 말에 키르비르는 설마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이 퍼뜩 놀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그래서... 설마 무슨 일이...”
“아 그냥... 대련하자고 해서 간단하게 싸워준 것 밖에 없어.”
키르비르의 설명에 따르면 애미로안풀은 네이의 야성을 잠재워준다. 어제밤처럼 그녀의 야성이 성욕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키르비르의 말대로 폭력성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일단 그녀와 같이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은 그녀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녀와 했던 일을 왜곡하는 일이다.
“대..련?”
“그날 따라 왠지 날 죽일 듯이 달려들어서 힘들긴 했지만... 너의 말대로라면 네이의 행동이 대충 이해는가네.”
키르비르가 내 말에 수긍을 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용기를 얻은 나는 여유롭게 넌스레까지 떨어가며 그녀를 이해시킨다. 그러자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키르비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후.. 다행이네...”
“다행이라니... 너 무슨 이상한 상상이라도 한거냐?”
그녀를 납득시켰다. 그녀를 이겼다는 사실에 한결 우월감을 느낀 나는 이번엔 내쪽에서 그녀를 공격해본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대는 키르비르였다.
“뭐... 난 또 너와 네이가 침대에서 뒹군줄 알았지.”
“....”
어린 외모에 맞지 않게 너무나도 뻔뻔하게 야한 소리를 내뱉는 키르비르. 아... 그러고보니 나와 키르비르는 그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정도였구나...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이 베히모스에서 서로의 나체를 가장 많이 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사랑하는 네이가 아닌 키르비르였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뭐...? 아하하핫.. 너가 네이랑?”
내 질문에 키르비르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린다. 짧게 웃음을 터트린 키르비르는 슬쩍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대답한다.
“그러면 넌 이 자리에 없어. 네이는 네베르족이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대와 관계를 맺으면... 죽여.”
“....”
“마계에서 네베르족은 순결과 순종의 대명사야.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준 상대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그들을 위해 봉사를 하지. 한 일화가 있어. 어느 변태같은 마계인이 어린 네베르족 소녀를 덮쳤어.”
생각하기조차도 싫다는 듯이 살짝 인상을 찡그린 키르비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 결과 어떻게 됬는지 알아? 그 순결을 잃은 어린 네베르족 소녀는 혼자서 그 마계인 일가를 다 찢어죽이고 피투성이가 된 마계인의 집에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쥐어뜯어 자결을 해버렸어.”
네베르족의 특성을 대변해주는 끔찍한 이야기였다. 내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키르비르는 씨익 웃는다.
“그 정도야. 네베르족은. 비록 네이가 너를 유혹했다해도... 그녀의 마음이 너에게 없는 이상 너는 네이의 손에 찢겨죽어.”
“.....”
키득키득 웃던 키르비르는 내 발목쪽을 향해 손끝을 세워 횡으로 긋는다. 그러자 마치 날카로운 칼에 의해 베어진듯 단단한 쇠줄이 너무나도 쉽게 끊어져버린다. 하지만 다행히도 줄이 끊어져도 키르비르의 마법에 의해 몸이 허공에 떠있었기 떄문에 추하게 추락할 필요는 없었다.
“하여금... 어떻게 되든 너의 도움이 컸네.”
그녀가 손끝을 허공에 원을 그리자 뒤집어져있던 내 몸의 자세가 바로잡아진다.
“내 도움?”
“일단 어떻게 됬든... 너가 네이의 발작을 막아준 것이니까. 고마운건 고맙다고 해야지.”
싱긋 웃은 키르비르는 어렵지 않게 내 몸을 유적지 구조물 위에 내려둔다. 나는 피가 몰려 욱씬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매만지며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그녀는 이제 돌아갈 채비를 하는 듯 자신의 스텝을 움직여 허공에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
“응? 뭔데?”
내 질문에 키르비르는 스텝을 멈춰세우고 나를 바라본다.
“네이가... 너에게 대체 무슨 존재지?”
“왜... 그런 질문을 하는거야?”
내 질문에 키르비르는 얼굴에 떠있던 기분좋은 웃음기를 지우고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표정변화에 내 가슴이 뜨끔했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생각에 입을 연다.
“너가 네이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절박해보였어. 단순히 하인이나 애완동물을 찾는 수준이 아니었거든. 네이는 도데체 너에게 어떤 존재지?”
“....”
내 질문에 키르비르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허공에 떠서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는 키르비르. 가슴을 옥죄여오는 적막의 시간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의외로 보기보다 눈치는 빠르네.”
키르비르는 갑작스레 싱긋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한마디만을 남긴 키르비르는 마치 도망치듯이 스텝을 움직여 빠르게 내 시야에서 벗어난다. 허공으로 치솟아오른 키르비르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서있는 그녀의 탑으로 올라간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혼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도데체... 뭐지?”
일단 중요한 것은 네이와 키르비르 사이가 단순한 주종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들 사이에는 뭔가가 있었다. 분명 무언가가. 그리고 그것이 절대로 가볍지 않은 관계라는 것이다.
조용히 그녀가 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나또한 머릿속으로 풀려지지 않을 의문을 가진채 길을 따라 유적 구조물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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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메르 외에 타인의 접근이 불허했던 로터스의 방. 거대한 공동안 한가운데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기둥에 봉인된 로터스는 7개의 샛노란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야?”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아닌 이리엘. 그녀는 타메르의 보호없이 홀로 로터스의 앞에 서 있었다. 샛노랗게 빛나는 7개의 눈동자를 직시하고 있는 이리엘은 평소와 다름없는 감정없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살짝 살짝 떨리는 그녀의 몸이 거대한 괴물인 로터스를 향한 두려움을 표하고 있었다.
-흥미롭군... 내가 혼자 오라고하니 진짜로 혼자오다니...
로터스는 7개의 눈동자를 빛내며 용감하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리엘의 몸을 훑어본다. 아직 어린 몸. 솔직히 텐타클의 모태로 쓰기에도 너무나도 허약한 몸이었다. 이리엘은 마치 상품을 감정하듯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는 로터스의 시선에 움찔거리며 뒤로 반걸음 물러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에게 나쁜 뜻을 가지고 부른 것은 아니니..
로터스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위해 꺼내뒀던 촉수들마저도 기둥안으로 회수한다. 이리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거대한 기둥과 그 틈새에서 빛나는 7개의 눈동자뿐. 자신을 위협하는 촉수의 존재가 전부 사라지자 이리엘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럼... 나를 부른 이유는?”
-한번 보고 싶었다. 마계를 위협하는 거대한 전함을 이끄는 함장의 정체를...
“....”
이리엘은 로터스가 표현하는 거대한 전함이라는 것이 자신이 타고 있는 비공정. 디에그 데그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나에게 도움을 준다고?”
예상치 못한 로터스의 말에 이리엘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로터스를 노려본다. 하지만 로터스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펼쳐나간다.
-너는 마계의 원수이자 숙적. 반드시 제거해야할 존재이지. 하지만 그만큼 너가 가진 힘이 매우 탐난다.
“나의... 힘이?”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는거다. 나는 너를 도와주고 너를 보호해준다. 그 대신... 너는 우리를 위해 힘을 빌려줄 수 있는가?
로터스의 제안에 이리엘은 입을 다문다. 과거의 기억을 잃은 이리엘. 자신이 무엇을 해왔는지 자신이 무엇과 싸워왔는 지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섯불리 로터스의 제안을 수락하기에 부담이 너무 컸다.
-지금 당장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너가 내 입장을 기억해달라는 뜻이다.
“...알겠어.”
하지만 로터스는 그녀를 닦달하지 않고 그녀에게 생각할 충분한 시간을 주어준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로터스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약간의 혼란이 담긴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리엘의 모습에 로터스는 만족하며 자신의 촉수하나를 꺼낸다.
“...!”
그러자 이리엘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뒤로 두어걸음 물러난다. 하지만 로터스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자신의 촉수를 움직인다. 그러자 로터스의 방 한쪽 문이열리며...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후드를 눌러쓴 4명의 인물이 천천히 걸어나온다.
-내 말을 들어준 선물이다.
로터스가 봉인된 기둥앞으로 천천히 걸어온 4명의 인물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후드를 벗어낸다. 그러자 이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낯이 익은 녀석들이겠지.
그 4명의 인물은 다름아닌 켈레브라를 따르던 그의 호위병들. 로잔나, 이누시카, 에스멜라다 그리고 올리비아. 그녀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재정신이 아닌듯 초점이 없는 눈으로 오직 정면만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부상이 너무 심해서 모테로 사용하기 곤란하더군. 그렇다고 버리기에 그녀들의 전투력이 아까웠다. 그래서 일단 적당히 치료를 해놨지만... 신체적 장애는 어쩔 수 없군. 하지만 녀석들이라면 자신의 장애정도는 어렵지 않게 극복해낼것이다. 바로 너를 위해.
“그게... 무슨 뜻이야?”
-정신적으로 약간 손을 봤지. 간단하게 세뇌를 했다고 생각하면 될것이다. 그녀들의 기억속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켈레브라라는 녀석과의 기억을 너와의 기억으로 조작했다.
“....”
이리엘은 아무말없이 자신의 앞에 서있는 4명의 여성들을 바라본다. 그녀들이 켈레브라와 달라붙어있는 것은 이리엘 그녀도 그녀의 눈으로 잘 봐왔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자신의 호위병이 되다니... 이리엘에게는 왠지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녀들은 너에게 큰 도움이 될것이다. 데려가라.
“알았어.”
이리엘은 주저없이 로터스의 선물을 받아들인다. 그녀가 거부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자신이 로터스의 선물을 거절하면 이 4명의 여성들의 결말은 안보고도 뻔했다. 같은 여성으로써 그녀들을 구해야한다는 이해못할 사명감에 이리엘은 그녀들을 받아드리게 되버린다.
-가봐라. 그리고 잊지마라. 내가 한 말과 제안을.
“....”
그 4명의 여성들을 데리고 이리엘은 자신이 왔던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막 방을 나서기전. 그녀는 고개를 돌려 로터스를 돌아본다. 하지만 로터스는 다시 거대한 기둥속에 몸을 숨긴듯 기둥의 틈새에서 보이던 샛노란 7개의 눈동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투박하게 우뚝 서있는 기둥을 조용히 바라보던 이리엘은 아무말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로터스의 방을 빠져나간다.
-아이러니하군. 에페리아... 지금 그녀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과거의 숙적이라니. 운명이란 재미있군.
========== 작품 후기 ==========
유운처럼 / 욕심이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법이죠. 만약 첫째가 딸이면 제가 가사담당. 아들이면 돈벌러 도망칠 것입니다 =ㅂ=/
Solar Eclipse / 으잌 안그래도 일본에 갔다왔는데... 일본여자가 착하지만... 외모가 좀 내 스똬일이 아니네... 톡 튀어나온 오묘한 구강구조. 으앙 실헝!
Lizad / 아쥬 적절하다! 그거임. 바로 그거임!
자자~ 떡밥을 뿌리세 떡밥을!
이야호! 난 이때가 쩨일 씐나!!!
하지만 일주일 후면 내가 뿌린 떡밥이 무슨떡밥인지 잊어버리겟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