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편
<-- 후유증 -->
“후우...”
복도로 걸어나온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른 방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원래는 2층의 숙소를 자주 애용했지만 지금은 1층의 숙소에 사람이 더 많았다. 예를 들어 부상을 당한 티에르와 키르비르. 그리고 그녀들을 간호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1층에 거처를 마련한 리엔. 마지막으로..
드르륵..
구석진 방의 문이 열리며 그안의 풍경이 드리워진다. 다른 방과 다르게 모든 가구가 치워졌거나 한쪽에 몰려있는 방. 그런 방 한쪽벽에는 임시로 만든 족쇠가 억지로 벽에 박혀있었다. 그런 족쇠에는 한 소녀가 포박되어 있었다.
“아리엘...”
나는 분노가 서린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벽에 박혀버린 족쇠에 양팔이 고정되어 벽에 달라붙듯이 매달린 아리엘은 처음과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가 지났다. 식사는 커녕 물조차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처음과도 같은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며 반겨준다.
“도망가려면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어. 하지만 왜 도망가지 않는거지?”
그녀의 힘을 체험한 나는 이런 부실한 구속기구가 그녀를 절대 붙잡아두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구속된 그녀를 감시했지만 그녀는 처음에 구속된 그 모습 그대로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그저 조용히 족쇠에 매달려있을 뿐이었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겉모습은 괜찮아보였지만 그녀의 입술은 가볍게 매말라 있었다. 아무리 괜찮은 척을 해도 단식과 단수앞에서 그녀의 몸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너가 한 짓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죽게만들꺼야.”
그녀를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의 인형같은 얼굴을 볼때마다 내 품안에서 죽어간 네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용히 족쇠에 매달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다.
“조금씩... 조금씩 널 죽여갈꺼라고.”
우드득.
단순한 내 악력속에서 그녀의 손목을 너무나도 쉽게 부스러져버린다. 하지만 아리엘은 아무런 반응없이 살짝 고개를 돌려 내가 부러뜨린 손목을 바라볼뿐이었다. 손목이 으스러지는 고통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리엘은 마치 감각이란 것을 느끼지 않는듯 변화없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천천히 나를 돌아본다.
“젠장...”
그런 아리엘을 노려보던 나는 짧게 욕을 내뱉으며 그녀로부터 등을 돌린다. 무슨 수를 써도 그녀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해탈한 것처럼... 아니 실제로 해탈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고통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체가 부러지거나 다쳐도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양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괴롭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의 입에서 비명을 짜낼 수 있을까... 평소에 나답지 않게 진한 살의를 품은 상상을 하며 조용히 아리엘이 감금된 방을 걸어나온다.
“아... 타메르씨.”
그때 때마침 복도로 나온 리엔과 마주친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자신만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준다.
“리엔. 키르비르는 어때?”
그녀의 인사를 받은 나는 우선적으로 키르비르의 상태에 대해묻는다. 그러자 리엔은 걱정말라는 듯이 생긋이 웃으며 그녀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준다.
“괜찮아지고 있어요. 호흡도 안정되고... 체온도 모두 정상이에요.”
“그나마 다행이네...”
안좋은 소식들만 들어왔던 나에게 유일하게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있던 리엔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당겨 키르비르가 쉬고있는 방안으로 이끈다. 방안에 들어선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키르비르를 내려다봤다.
“새근..”
아무런 걱정없이 평혼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키르비르. 이제 곧 그녀가 깨어나 네이의 죽음을 알고 느낄 커다란 상실감에 일그러질 그녀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않았다.
“저기... 타메르씨?”
조용히 키르비르의 얼굴을 내려보고있는 나를 바라보던 리엔은 조심스럽게 나를 부른다. 그런 그녀의 부름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깨어나 진실을 알게된다는게 두려우신가요?”
어이없는 리엔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대답한다.
“두렵기는 무슨... 나는 단지 키르비르가 불쌍한 것 뿐이야.”
“그러신가요?”
내 대답에 리엔은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대답한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그렇지 않은데요?”
“.....”
리엔의 예리한 지적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저 조용히 시선을 돌려 키르비르를 내려볼뿐이었다.
“네이의 죽음. 어제일어난 사건들. 모두 다 당신탓이라고 생각하시는거에요?”
“....”
그녀의 질문에 나는 침묵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침묵을 깨려는 듯이 리엔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간다.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세요. 타메르씨의 잘못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나 떄문에 네이가 죽었다고!!”
리엔의 말을 듣다 못한 나는 나를 변호하는 그녀에게 오리혀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리엔은 놀라지않고 여전히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채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타메르씨. 슬픔과 자괴감에 빠져서 진실을 왜곡하려고 하지마세요.”
“진실을... 왜곡해? 내가?!”
“네이의 마지막은 어땠나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잊을 수 없는 그 때의 광격을 떠올린다. 내 품안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네이의 신체. 내가 움켜쥐고 있던 그녀의 손이 힘없이 빠져나가며 이제 기억속에서만 볼 수 있는 그녀의 순수한 눈동자가 감기는 순간이 떠오른다.
“분명... 미소 짓고 있었겠죠?”
“...아...”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마지막에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리고 잠자듯이 편하게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만족한 거에요. 자신의 행동에 후회가 없었으니까요. 사람이 죽어갈 때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만약 내가 마녀를 막아낼 힘이 있었다면... 그녀는 살아있을 수도 있었어.”
“아니요. 그렇게 타메르씨가 강했다면 네이는 마지막에 웃을 수도 없었을꺼에요.”
의심할 필요도 없다는 듯한 단호한 네이의 말에 나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떠듬떠듬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본다.
“어쨰서... 그렇게 생각하는거지?”
“마지막의 네이는... 오직 당신만을 생각했어요. 타메르씨의 행복만을...”
“...뭐?”
내 물음에 리엔은 슬픈 미소를 짓는다.
“모두 알고있었어요. 이렇게 될거라는거...”
“그게 무슨 소리야!!”
모든 것을 알고있다는 그녀의 말에 움찔 놀란 나는 그녀를 붙잡으며 되묻는다. 그러자 리엔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가를 살짝 비빈후 내 물음에 대답한다.
“언제나... 네이의 운명을 읽을때마다 가장 먼저보인 기억이에요. 그녀의 마지막.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며... 당신의 행복을 기원하며 움직인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지킨다는 그 일념은 그 어떤 기억보다 강렬하게 각인되어있었어요.”
“그럼 넌...”
“다 알고 있었어요. 이런 결말까지...”
리엔은 마치 쓸개를 입에 문든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그녀를 멍히니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을 떨어뜨린다.
“너 너가.. 마.. 말했잖아.. 너가 말했잖아!!! 결국 마지막엔 모두 행복해진다고...”
“.....”
리엔은 내 말에 대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용기를 낸듯 아랫입술을 꽉 꺠물던 리엔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와 그녀를 지켜줬으면 된거야. 그들은 행복할테니까. 그래. 그거면 충분해.”
“그게.. 무슨 말이야?”
“죽기직전 네이의 마지막 생각이었어요. 죽기전 그녀는 일말의 후회도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구요.”
“....”
그녀의 말에 나는 할말을 잃는다. 그저 주먹을 움켜쥔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나를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리엔은 조용히 걸음을 옮겨 출구쪽을 향해 걸어나간다.
“어디가는거냐?”
살짝 울음섞인 내 물음에 리엔은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곧 키르비르님이 깨어나실 거에요. 그 분을 잘 부탁드려요.”
“하지만... 키르비르는 네 치료가...”
“치료는 충분히 했어요. 이제 남은 일은 키르비르님을 보살펴드리는 거에요.”
그 말을 끝으로 리엔은 나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밀어열고 밖으로 나가며 한마디의 말을 남긴다.
“그게... 아마도 네이가 원하는 일이 아닐까요?”
타악.
리엔은 그 한마디만을 남긴채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으음...”
곧이어 문을 닫는 소음에 반응한 것인지 침대에 누워있던 키르비르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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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언니 제법인데?”
“히익!!”
방밖으로 걸어나온 리엔은 예고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놀란다. 그런 리엔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검은 마녀모자를 쓰고있던 리니아는 쿡쿡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본다.
“하아... 놀랬잖아요. 리니아씨...”
“미안미안. 꽤나 분위기가 무거워보여서. 풀어주려그랬어.”
화를 내기도 미안할 정도로 천연덕스럽고 활기찬 미소를 보여주는 리니아의 모습에 리엔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짓는다. 리엔이 미소를 짓자 리니아는 더욱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묻는다.
“고의는 아니지만 안에서 이야기 들었어. 리엔언니. 다른 사람의 운명을 읽는거야?”
“아... 네. 자랑은 아니지만 단편적으로 읽을 수 있어요.”
“오호오...”
리엔의 말에 리니아는 기묘한 탄성을 흘린다. 그리고 아주 태연스럽게 멀뚱멀뚱 서있는 리엔을 향해 자신의 팔을 내밀어보인다.
“아... 읽어달라구요?”
“응! 내 미래! 아마도 사상 최강의 마녀가 되어서 이 세상을 호령하고 있겠지?”
리니아는 호기심과 기대감이 잔뜩 서린 얼굴로 리엔을 바라본다. 그런 리니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리엔은 조심스럽게 리니아가 내민 손을 잡아본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그녀의 운명을 읽는데 힘을 쓰기 시작한다.
“으응..?!”
그때 리엔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이 흘러나오며 그녀의 인상이 조금씩 구겨지기 시작한다. 그런 리엔의 모습에 리니아는 살짝 걱정이 된 모습으로 리엔을 바라본다. 리니아는 뭐라 참견하고 싶었지만 지금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리엔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뭐라 말해도 대답이 없을 것 같았다. 평소보다 좀 긴시간이 지나고 리엔은 조용히 리니아의 손을 놓아준다.
“어.. 어때? 표정이 굉장하던데...”
“아... 그... 리니아씨의 미래가...”
리엔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자신이 본 그녀의 미래에 대해 말한다.
“잘... 안보이네요.”
“흐으음...”
난감하다는 듯이 말하는 리엔의 모습에 리니아는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런 리니아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리엔은 고개를 돌리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에 리니아의 눈매는 더욱 가늘어진다.
“말하기 싫은거야? 뭔가 있나보네... 내 미래에.”
“....”
리니아의 말에 리엔은 부정하지 않는다. 외모로써는 어려보이는 리니아였지만 그녀를 감싼 기이한 분위기가 리엔이 그녀를 대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하나만 말해줘. 내 죽음에 대해서만.”
“리니아씨의... 죽음이요?”
어린나이에 걸맞지 않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리니아의 물음에 리엔은 살짝 놀란다. 실제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있다고해도 늙어 죽기직전의 노인이나 누군가의 암습을 당하고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리니아처럼 어린 아이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물어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리니아씨는... 아... 그...”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리엔은 힘겹게 입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처형... 당해요.”
“처형? 아아... 처형.”
리엔의 말에 리니아는 맥이 탁 풀린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한다. 리엔의 말을 들은 리니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자신의 마녀모자를 살짝 벗고 약간의 식은땀이 맺힌 자신의 이마를 문지른다.
“공개처형이겠지?”
“그건... 어떻게...”
“마녀의 결말이 다 그렇거든.”
그녀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우리 엄마도 그랬거든.”
“죄송해요. 제가 위로해드릴 말이 없어요.”
“아냐아냐!!”
리니아와 비슷하게 풀이 죽은 리엔의 말에 리니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힘차게 웃어보인다.
“원래 그런게 마녀의 정석이야. 마녀라면 공개처형 한번정도는 당해봐야지. 어자피 먼 미래일 것아니야? 아하하핫!”
애써 강한척을하며 리엔으로부터 도망치듯 성큼성큼 2층을 향해 걸어올라가는 리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리엔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조용히 리니아가 올라간 계단을 바라보던 리엔은 들리지않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멀지않은... 미래에요. 리니아씨.”
========== 작품 후기 ==========
유운처럼 / 으히히힉;; 근데 재미지네요. 진짜 재미지네요. 스타 2라는 물건이..
스타2의 캠패인 모든 업적 클리어...
이제 잘 쓸께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