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편
<-- 후유증 -->
붉은 연기에 의해 내 몸의 감각이 둔해지자 얼마가지않아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잠시 비틀거리던 나는 자세를 바로잡지 못하고 천천히 바닥을 향해 쓰러지기 시작했다. 내 시야가득히 빠른속도로 다가오는 투박한 회색빛 돌바닥을 바라보며 이제 곧 느껴질 충격에 두 눈을 질끈감는다.
풀썩.
하지만 바닥에 쓰러지는 나를 반겨준 것은 딱딱한 돌바닥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푹신함이 느껴지는 전혀다른 물질이었다.
“.....”
나는 조심스럽게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본다. 그러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황량함과 건조함만이 가득찬 붉은 빛의 광대한 사막이었다.
“여긴...”
내가 쓰러져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나는 바닥에 짚은 양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한다.
“하읏!!”
그 순간 둔감해졌던 오감들이 돌아오면서 내 몸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오감이 돌아오면서 가장 선명히 느껴졌던 것은 온몸을 뒤흔드는 찌릿한 근육통. 곧이어 마르다 못해 목이 갈라져 찢어질 것만 같은 갈증이 몰려왔다. 침이라도 삼켜보려하지만 입안에는 흘러들어온 모래알갱이조차 뱉어낼 수 없을 정도로 매말라있었다.
‘움직... 여야해.’
“하으윽..”
이미 내 신체는 내 제어에서 벗어난지 오래였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이 느끼는 고통이나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져왔지만 그녀의 몸은 내 의지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가 느끼는 고통과 절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그녀의 행동을 관만밖에 할 수 없었다.
“하아.. 하아..”
한끝조차도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몸을 불굴의 의지로 억지로 움직인 키르비르는 간신히 황량한 사막위에서 가녀린 몸을 일으켜세운다. 하지만 몸을 일으켜세운 것이 한계인듯 키르비르는 터질듯한 가슴을 움켜쥐며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본다.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채운 감정은 지극히 단순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 이 사막에 홀로 남겨져 말라 죽을 수 있다는 불길한 가능성만이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사막에 홀로남아있는 키르비르. 그녀의 나이는 고작 6살이었다.
“아.. 아빠..”
그녀는 매말라서 잘 떨어지지 않는 목소리로 아빠라는 존재를 부른다. 하지만 모래바람이 잔잔하게 흐르는 사막 위에서 그녀의 자그마한 목소리에 대답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러나 키르비르는 포기하지 않았다.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이었을까. 불안함을 애써 짓누르며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키르비르는 모래바람에 조금씩 지워져나가고 있는 커다란 발자국을 발견한다.
지워져가는 발자국의 흔적을 발견한 키르비르의 얼굴에 작은 화색이 돌기시작한다. 곧이어 그녀는 발자국을 쫓아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한다.
꽈악..
“아흑!!”
그러자 날카로운 격통이 어께를 관통한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그런 고통에 익숙한듯 이를 악문채 고통을 삼키며 아버지의 발자국을 쫓아 걸음을 옮겨나간다. 힘겹게 한걸음씩 내딛는 그녀의 어께에는 낡았지만 여전히 그 두터운 두꼐를 자랑하는 가죽끈이 가로질러있었다. 그리고 그 가죽끈 끝에는 그녀의 신체의 절반만한 커다란 책이 모래에 뒤덮혀 끌려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족쇠처럼 그녀의 발을 묶으며 매달린 거대한 책. 그 책은 그녀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책이었다.
“으으윽..”
어께를 짓누르는 묵직한 무게감에 이미 한계에 가까워진 키르비르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걸음씩 힘겹게 내딛어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의 지평선을 향한 그녀의 시선은 천천히 사라져가는 커다란 발자국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그녀의 기억을 조금씩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고작 6세. 너무나도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금 이 붉은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
‘괴로워... 목말라.. 아파... 쉬고싶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통증, 갈증, 피로 등의 모든 고통이 그녀의 몸에 짊어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머릿속에 절망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상황에 익숙해진듯 그녀는 오직 바닥에 찍혀진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겨나간다.
‘아빠...’
그녀가 느끼는 모든 고통에 대한 생각은 단 한 단어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바로 아빠라는 한 단어. 그녀가 따라가는 발자국의 주인이자 그녀의 모든 고통을 해방시켜줄 구원자. 그것이 바로 그녀에게 아빠라는 존재였다.
“늦었군...”
고요히 울려퍼지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모래알이 가득한 땅만보고 걷던 키르비르의 얼굴이 퍼뜩 들어올려진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갑주의 남자. 내가 기억한 모습에 비해 상당히 젊어보였지만 그녀의 몸에 흘러나오는 숨막힐듯한 위압감은 변함이 없었다.
“아.. 아빠.”
남자를 발견하게 되자 키르비르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모든 고통이 허상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느껴진 감정은 단 하나였다. 반가움? 그리움? 심지어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 하나의 생각은 다름아닌 안도감. 그것 하나뿐이었다.
“흥.”
하지만 키르비르를 내려보는 남자는 한심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뀐다. 키르비르를 내려다보는 그의 하나남은 눈동자에는 깊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의 멸시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자신의 딸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지 남자는 괴로워하는 키르비르에게 관심조차 주지않으며 단단히 팔장을 낀채 자그마한 바위위에 걸터앉는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며 키르비르는 주섬주섬 자신의 어께에 매어진 가죽끈을 당겨 이떄까지 끌고다닌 커다란 책을 자신의 앞에 내려놓는다.
“다 외웠겠지?”
“아읏!!”
남자는 키르비르가 내려둔 커다란 책을 빼앗아든다. 그러자 아직 가죽끈을 벗지 못해 몸이 가죽끈에 걸려버린 키르비르는 짧막한 비명을 흘리며 남자의 발치앞에 쓰러져버린다. 순간 온몸을 짓이기던 고통이 다시 고개를 들어올린다. 어린아이가 견뎌내기 힘든 찌릿한 고통속에 키르비르는 울지도 못하고 자신의 몸을 감싸안은채 힘겹게 비명을 삼킨다.
“시간낭비 마라.”
그런 키르비르를 시큰둥하게 내려보던 남자는 자신의 발등으로 쓰러진 키르비르의 가슴을 들어올려 억지로 그녀의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비틀거리던 키르비르는 간신히 균형을 잡고 크게 헐떡거린다. 그런 키르비르의 모습에 전혀관심없다는 듯이 바위에 걸터앉은 남자는 이때까지 키르비르가 끌고다닌 커다란 책을 펼친다.
“524페이지부터 637페이지까지.”
“수.. 술자의 몸에 저장된 마나는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술자의 몸에 저장된 마나를 매개체로 외부에서 마력을 끌어오는...”
거대한 책에 빼곡이 적혀있는 수많은 문자들. 그것도 113페이지나 분량을 키르비르는 전부 외워가기 시작한다. 흐릿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이 두눈을 꼬옥 감은 그녀는 허겁지겁 자신의 기억속을 뒤져 그 문장들을 재현해낸다.
“고... 고위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술자의 마력뿐만 아니라... 자연계에서 끌어오는 마법의 비중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고로 진정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독단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자연에 흐르는 마나를 읽고 끌어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팔락.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남자의 손에 들려진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버린다. 약 30분가량의 시간을 소요한 테스트가 끝남과 동시에 키르비르는 조심스럽게 남자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매마른 눈동자로 키르비르를 내려다볼뿐이었다.
‘틀렸...나?’
그런 남자의 시선속에서 키르비르의 머릿속에 자그마한 불안감이 싹튼다. 하지만 남자가 자신의 호주머니로 붕대가 튼튼히 감겨진 자신의 왼팔을 움직여나가자 그녀의 머릿속에 싹텄던 불안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정확하군.”
남자는 그 한마디와 함께 호주머니에서 꺼낸 붉은 육포덩어리를 보상처럼 키르비르를 향해 던져준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단 키르비르는 황급히 양손을 뻗어 그가 던져준 붉은 육포덩어리를 받아든다.
“....”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인지 받아든 키르비르의 양손이 흥건할 정도로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커다란 육포덩어리. 하지만 키르비르는 주저없이 날것이라고 해도 다름없는 육포덩어리를 입안으로 구겨넣는다.
질겅질겅..
역시나 끔찍하게도 질긴 육포덩어리가 그녀의 입안에서 씹혀나가기 시작한다.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피맛만이 가득했다. 그런 비린맛에 적응했다는 듯이 키르비르는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핏물조차도 아깝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육포덩어리를 씹으며 조금씩 고깃조각을 삼켜나간다.
오래가지 않아 커다란 육포덩어리를 전부 삼켜낸 키르비르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우연인지 몰라도 고깃덩어리에 잔뜩 머금어진 핏물은 갈증으로 매마른 그녀의 목을 축여주기 충분했고 적지 않는 크기의 덩어리는 그녀의 배를 든든히 채워줄 수 있었다.
마치 사람을 사육하는 것 같은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아무리봐도 저 남자와 키르비르의 사이는 정상적인 부녀관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 버지.”
키르비르는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남자를 부른다. 그러자 남자는 하나남은 눈을 치켜뜬채로 키르비르를 노려본다. 그런 남자의 시선에 움찔 놀라면서도 키르비르는 우물 쭈물거리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뜻을 밝힌다.
“이 책... 다 외웠는데요...”
“그렇군.”
키르비르의 말에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동의를 표한다. 그리고 끝이었다. 그 이상의 대화는 없었고 키르비르조차도 그 이상의 무언가는 기대하지 않았는지 다시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굴뿐이었다.
툭.
그런 키르비르의 눈앞에 난생 처음본 투박한 검은 봉이 떨어진다. 그 봉을 본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내 눈에도 익숙한 물건. 그것은 틀림없이 네이가 들고다니던 봉이었다.
“오늘부터는 마법을 수련한다. 너가 읽은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마법을 구현시켜봐라. 내가 만족하면... 이 사막에서 나가게 해주지.”
“네.”
남자의 파격적인 제안에도 불구하고 키르비르의 감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애시당초 이 사막에서 나가게 해준다고해도 그녀에게 큰 자극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키르비르는 담담히 남자가 시키는 일을 받아드린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며 그녀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억은 이 사막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그녀는 항상 이 붉은 사막을 자신의 아버지라는 이 남자와 같이 걷고있었다. 불평도 울움도 투정도 소용없었다. 남자는 무조건 앞을 향해 걸었고 자신은 그를 쫓아가야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을 쫓아오면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해줬다.
‘엄마...’
그런 키르비르의 머릿속에도 작은 희망이 하나 숨겨져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라는 존재. 그녀가 남자를 따라다니며 악착같이 삶에 집착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흐릿한 기억속에 안겨봤던 따듯한 품. 책을 읽기 시작하며 그 품이 어머니라는 존재를 깨달은 키르비르는 그 감정을 다시금 겪기위해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발악한 것이다.
꽈악..
키르비르는 남자가 던져준 봉을 양손으로 움켜쥔다. 자신이 짊어지고 다닌 책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애시당초 6살의 꼬맹이가 자신보다 커다란 봉을 다룬다는게 말이되지않았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투정하지 않았고 비틀거리는 키르비르를 바라보는 남자또한 조용히 눈을 감은채 그녀를 외면할 뿐이었다.
“.....”
키르비르는 눈을 감은 남자를 돌아본다. 붉은 빛이 가득한 사막에서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았다. 언제나 붉은 빛만이 가득한 곳이었다. 남자가 조용히 눈을 감고만 있자 키르비르는 그동안의 경험에 따라 지금이 잠을 자야할 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남자가 건내준 봉을 품에 안은채로 모래바람이 감도는 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린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자신이 자는 사이에 남자가 떠날것을 두려워하여 그녀는 그의 발치에 머리를 기댄다.
괴로운 현실속에서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오직 안도감 하나뿐. 자신을 심하게 대한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나 증오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학대하고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세운다해도 이 남자는 그녀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자신을 도와줄 유일한 인간이었음으로 그녀는 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을 심하게 대한다해도 반항할 생각조차안하며 그런상황에서도 오히려 상대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키르비르. 그녀는 절대로 내가 아는 키르비르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키르비르는 절대로 이런상황을 묵인하지 않았다. 과거의 키르비르는 지금의 키르비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순종적이었다.
곧이어 천천히 수마의 유혹에 휩싸인 키르비르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겨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녀의 기억은 빠른속도로 스쳐지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흐름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기억속에 단편적인 기억이 언뜻언뜻 보였다. 최초로 마법을 성공하여 촛불과도 같은 불꽃을 만들었을때. 키르비르는 인정은 커녕 남자의 비웃음만을 받았다. 곧이어 키르비르는 커다란 화염덩어리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여 붉은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만난 또다른 인간. 그 인간은 다름아닌 에페리아였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보다 약간 젊은 에페리아는 잊지 못할정도로 얄미운 미소를 지은채 키르비르를 반겨준다. 그리고 아버지의 지시에 의해 그녀는 에페리아에게 마도학을 배우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그녀의 또다른 악몽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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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억이 재개되었을때. 키르비르는 칙칙한 빛이 감도는 회색빛 방에 서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 위에는 기하학적인 외형의 물체가 기묘한 모습으로 쉬지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특별한 동력장치는 보이지 않았고 단순히 기이한 모습으로 쉬지않고 움직이는 모습이 처음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기함에 감탄을 자아내기 만들기 충분했다.
“에페리아... 언니?”
회색방을 찾아온 키르비르는 이 곳에 온 목적인 에페리아를 찾기 위해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그러자 방 한쪽 어둡게 그늘진 곳에 서있던 에페리아는 깜짝 놀란 눈치로 키르비르를 반겨준다.
“어?! 키르비르! 왠일이야? 다음 수업은 내일일텐데...”
자신의 머리에 씌워진 커다란 마녀모자를 매만지며 걸어나온 에페리아는 키르비르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발견한다. 그리고 한순간이지만 그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직된다.
“과제...다 했어요!”
키르비르는 환하게 웃으며 에페리아 앞에 자신이 만들어온 물건을 보여준다. 아직도 끊임없이 위치를 바뀌며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물체. 그런 물체를 바라보던 에페리아는 조심스럽게 키르비르가 건낸 물건을 받아드린다.
“이건... 내가 오늘 오전에 내준 과제일텐데...”
에페리아는 신중히 키르비르가 만들어온 물건을 살펴본다. 그 물체의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멈추기를 기대하는 듯 뚫어지게 그 물체를 노려보지만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물체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관성과 중력, 그리고 탄성을 이용하여 4차원적으로 표현한 무한동력장치에요.”
“.....”
에페리아의 얼굴에 의심의 빛을 띄우자 키르비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그 물체를 만든 기술에 대해 설명해준다. 그러자 에페리아는 얼굴에 띄운 의심의 빛을 지울 수 밖에 없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에페리아는 조심스럽게 키르비르가 만든 물건을 탁자위에 올려둔다.
“다음달까지 만들어오라고했는데... 하루만에 만든거야?”
“네!”
어린 키르비르는 몰랐다. 그런 질문을 던진 에페리아의 얼굴에 맴도는 시기와 질투심을. 그녀에게 에페리아는 마치 친언니같은 존재였다. 자신을 이끌어주며 아버지와 전혀다른 따스함으로 보살펴주는 존재.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로 느껴져왔던 것이다. 하지만 에페리아는 달랐다. 탁자위에서 여전히 딸깍거리며 움직이는 키르비르의 작품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어두운 그늘이 진다.
“나도 이것과 비슷한 것을 만들었어. 1주일동안 수많은 연구와 고뇌를 하면서... 하지만 너는 이걸 하루만에... 그것도 한 수준을 높혀가지고...”
“....?”
에페리아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을 어린 키르비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칭찬하는 줄 알고있던 키르비르는 환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볼뿐이었다. 그런 키르비르를 돌아본 에페리아의 얼굴이 흉하게 뒤틀린다.
“아. 키르비르. 잠깐 이쪽으로 와볼래?”
“아...네!”
그런 낯선 에페리아의 얼굴에 약간의 경계심을 가졌지만 평소에 에페리아를 신뢰하던 그녀의 믿음이 그런 경계씸을 눈녹듯이 녹여버린다. 에페리아의 부름에 키르비르는 아무런 의심없이 그녀에게 다가간다. 에페리아가 키르비르를 이끈 곳은 방 한쪽에 마련된 자그마한 창문. 에페리아는 아무말없이 그 창문을 가리킨다.
키르비르는 에페리아의 손짓에 아무런 의심없이 조심스럽게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건너편 방의 광경을 바라본다.
콰드득..
곧이어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섬뜩한 소음. 작은 창문을 통해 건너편을 바라보는 키르비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건너편의 방에는 한쌍의 남녀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여성. 그런 여성을 쫓아 넘어뜨린 남자는 그녀의 몸위에 올라탄채로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우드득..
동시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히 울려퍼진다. 곧이어 남자가 물어뜯은 여성의 목덜미로부터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나온다.
“에... 에페리아 언니... 이게.. 도데체 무슨...”
키르비르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떼려고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머리를 움켜쥔 에페리아는 억지로 그녀의 시선을 창에 고정시키며 말한다.
“으음~ 저 둘. 어떤사이인것 같아?”
“어... 어떤 사이라뇨... 저건...”
충격적인 광견앞에서 키르비르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떠듬거린다. 그런 키르비르가 재미있는지 에페리아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설명을 이어나간다.
“저 둘은 사랑하는 사이이지. 장래까지 약속한 사이였어.”
에페리아의 설명을 들으며 키르비르는 바들바들 떨리는 눈으로 유리창 넘어의 광경을 바라본다. 도망치다 쓰러진 여성의 몸위에 올라탄 남자는 짐승과도 같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밑에 깔린 여성의 몸을 마구잡이로 물어뜯어나가고 있었다.
“이 한방에 두 명을 감금했지. 그리고 식량과 물을 일절 공급하지않았어.”
“그러면... 죽잖아요.”
“그래서 조건을 뒀지. 8일간 생존하면 내보내주겠다고.”
하지만 에페리아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사람이 아무런 식량없이 정상적으로 살아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고작 7일. 거기다 물조차없다면 3일도 한계일 것이다. 그런 이론적 기준을 벗어난 8일이라는 조건은 이미 에페리아가 그들을 살려줄 용의는 없다는 것을 뜯했다.
“서... 설마.”
그 순간 키르비르의 머릿속에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키르비르의 눈앞에 그런 최악의 행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크큿. 둘중의 한명이 희생해주면... 한명은 아주 편히 살아갈 수 있는거야.”
“하... 하지만...”
그것은 바로 다른 한명을 잡아먹는것. 만약 다른 한사람이 죽어 그 피와 고기를 뜯어먹는다면 8일을 버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지성과 이성이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까지 실험을 해봤는데... 대부분 자신의 오줌을 받아먹어서 버텼는데... 크크큭. 이거 무슨 서바이벌도 아니고... 꼴 사나와서 그냥 아사해 죽을 떄까지 가둬버렸지. 하지만 이번엔 좀 조건을 바꾸어봤어.”
에페리아는 마치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뜯어먹는 남자를 바라보며 즐겁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간다.
“3일정도 지나고 슬슬 탈수증상이 녀석들을 괴롭힐때 방안에 환각가스를 넣었다고 말했지. 그러자 남자가 저렇게 돌변한거야.”
“화... 환각가스요?”
키르비르는 눈동자를 굴려 에페리아의 얼굴을 바라본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가에 너무나도 잔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평소에 자신을 보살펴주던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그런 미소를 발견한 키르비르의 가슴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물론 환각가스따윈 없어. 그저 내 말 한마디뿐인데... 저렇게 괴물처럼 변해버렸네? 하지만 재미있는건 여기서 끝나는게아니야.”
이미 그녀의 기억속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에페리아는 그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에페리아의 모습은 일그러지고 뒤틀려저 하나의 괴물로변해가고 있었다.
“남자를 풀어줄때. 환각가스는 원래 없었다고 하면 어떻게될까? 어떻게 망가져버릴까? 상상해봐 키르비르. 절망과 나락과 함께 자기혐오의 극치를 맛본 남자는 어떻게 살아갈까? 상상만해도... 재미있지않아?”
콰드득.
에페리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쓰러진 여성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남자는 섬뜩한 뼈울림과 함께 힘껏 얼굴을 비튼다. 그런 그의 입에는 뼈로 추정되는 새하얀 무언가가 물려있었다. 곧이어 두어번 경련을 떨던 여성의 몸은 축 늘어진채 미동도하지 않게되어버린다.
“히익...”
순간 키르비르는 그 남자와 눈을 마주쳐버린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있는 기이한 눈동자. 그가 키르비르를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연히 마주친 그 남자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곧이어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여성의 몸에 얼굴을 처박고 뭔가를 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보충 수업 끝.”
그와 동시에 키르비르의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에페리아는 그녀를 풀어준다. 그제서야 키르비르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유리창에서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친다. 그런 키르비르가 재미있는지 에페리아는 키득거리며 그녀에게 손을 흔든다.
“그럼 내일봐.”
이미 키르비르에게 에페리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등을 돌려 에페리아로부터 도망쳐버린다. 무언가에 쫒기듯 허겁지겁 자신의 방을 향해 달리는 키르비르.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그녀는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거짓말.”
그런 그녀의 눈앞에 그 남자가 서있었다. 자신의 연인이라는 여성을 뜯어먹었던 남자가. 그는 붉은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짐승과도 같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정확히 키르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르비르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본다. 자신을 보호해줄 유리창도... 연구실을 보호해주던 경호원도 없었다. 좁은 복도에 남자와 키르비르. 단 둘만있었다.
꾸르륵.
좁은 복도에 몇일을 굶은 듯한 낮고 요란한 배울림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와 동시에 키르비르는 남자의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군침을 발견한다. 자신이 표적이라는 사실에 키르비르는 몸을 바들바들 떤다.
마치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이때까지 배워왔던 모든 마법과 마도학이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하며 남자의 붉은 눈동자에 압도된듯 키르비르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런 키르비르를 향해 남자가 걸어온다.
콰악!!
“아흑!!”
남자는 여린 키르비르의 어께를 움켜쥐고 짓눌러 그녀의 몸을 손쉽게 제압한다. 바닥에 쓰러진 키르비르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앞에서 끈적한 군침과 함께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남자를 바라본다.
“거짓말...”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빨들을 바라보며 키르비르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을 도와줄 인물을 찾는다. 그녀의 눈에 에페리아가 발견된다.
“어.. 언니.”
멀지않는곳에 에페리아가 보였다. 그녀는 남자에 의해 짓눌린 키르비르를 바라보며 아주 즐겁다는 듯이 웃고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는 키르비르와 그녀사이의 공간을 단절시켜주는 튼튼한 유리벽이 서있었다.
“에.. 에페리아 언니!!”
키르비르는 에페리아를 부르며 울부짖는다. 지금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에페리아뿐. 하지만 에페리아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이 얼굴 가득히 함박웃음을 지은채 유리벽넘어에서 키르비르를 바라볼뿐이었다.
“아니야... 이건...”
남자의 뜨거운 이빨이 자신의 목덜미에 닿는 것을 느낀다. 날카롭게 세워진 그의 이빨은 천천히 그녀의 여린 피부를 짓눌러 깊숙이 파고들어가기 시작한다. 살갗이 찢어버리고 근육을 헤집으며 파고드는 남자의 이빨이 선명히 느껴진다.
우두둑..
곧이어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울림과 함께...
“꺄아아아악!!!”
극한의 공포로 애써 외면하던 고통이 해일처럼 몰려온다. 아직 어린 키르비르는 그런 고통에 저항하지 못하고 목청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비명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흑.. 칵.. 커흑...”
남자의 이빨이 그녀의 목 깊숙이 파고들자 키르비르는 목안에서 끓어오르는 핏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다. 급격히 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키르비르는 필사적으로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눈을 깜박거린다.
“아.”
그 순간. 마치 신기루처럼 자신의 몸에 올라탄 남자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장식도 없는 새하얀 방의 천정이 들어난다. 그리고 키르비르의 몸을 부드럽게 받혀주는 푹신한 감촉.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이다.
“잘 잤어?”
그러나 곧이어 그녀의 귀에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페리아의 목소리. 그런 목소리를 들은 키르비르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몸을 일으키려하지만 마치 단단한 쇠사슬에 몸이 감긴것처럼 그녀의 몸은 침대에 눌러붙은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푹 자고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밤귀는 참 밝네?”
키르비르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휘감은 무형의 기운이 뭔지 확인해본다. 얼마가지않아 이 힘이 에페리아의 마력에 의해 만들어진 마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키르비르는 에페리아를 돌아본다.
“어.. 언니?”
악몽을 꾸어서인지 키르비르는 매마른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다. 하지만 에페리아는 그런 키르비르를 바라보며 웃고있었다. 꿈속의 그 모습처럼. 그런 에페리아의 모습에 키르비르는 섬뜩함을 느낀다.
“똑똑한 제자를 위한 스승의 선물이야.”
그런 키르비르를 바라보며 에페리아는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그것은 한쪽 끝이 날카로운 작은 기계같은 물건이었다. 낯선 물건에 키르비르는 의문을 표한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기도 전 에페리아는 누워있는 키르비르의 목덜미를 향해 자신의 손을 뻗는다.
“모두 널 위해서야. 아니. 정확히 너의 아버지인 우리 오라방을 위해서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지는 것을 바라보던 키르비르는 목덜미에서 따끔한 감촉을 느낌과 동시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깊게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굳 나잇. 키르비르.”
그리고 에페리아는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그와 동시에 키르비르는 눈앞의 세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곧이어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엄청난 지식의 폭풍. 마계를 쌓아 올린 수많은 지식들이 몇억개의 글자로 변하여 그녀의 머릿속을 무참히 헤집어나간다. 정보의 홍수속에 빠진 키르비르는 점차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정보의 바다에 파묻히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그녀와 연결된 내 의식이 멀어져간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연결된 기억이 끊어지며 한가지 마지막 그녀의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에페리아가 키르비르의 목덜미에 무언가를 심었을때. 그녀의 삶의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던 최초의 마력폭주가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피노키호 / 감사합니다~ 열심히쓰겠습니다!
Solar Eclipse / 그런가요...? 으음... 어...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abcbbq / 엌ㅋㅋㅋㅋ 세리앜ㅋㅋ...
유운처럼 / 그 감사한 마음에 보답할 수 있는건 그저 열심히하는 것 밖에 없을것같네요 ;ㅅ;
요번에도 주말이 지나갔군요. 또다시 전쟁같은 일상으로 투하...
우잉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