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편
<-- 계획 -->
“약속한 에페리아에 대한 정보.”
새벽해가 천천히 떠오르는 이른 아침. 밤 늦게까지 고생한 이리엘은 침상에 눕히고 잠드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다시 아리엘을 찾는다. 그녀는 마치 물에 젖은 인형처럼 축 늘어진채 벽에 고정된 쇠사슬에 매달린채 힘겹게 고개만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에 증오나 분노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공허한 눈동자만이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리엘... 어쨰서...”
그녀의 매마른 입술이 달싹거리며 약간의 슬픔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작은 방안에 고요히 울려퍼진다.
“너도 들었겠지만... 이리엘은 나에게 복종해. 빨리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이리엘을 괴롭히지마.”
정신을 놓고 쓸데없는 말을 하려는 아리엘의 입을 막기 위해 다시한번 협박을 해보려하지만 아리엘은 그런 내 말을 끊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너가 명령할 처지는 아닌것 같은데?”
“나는 죽지 않아. 또다른 내가 있어.”
“무슨... 개소리야?”
어이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며 그녀를 노려본다. 하지만 그녀는 한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단호한 눈으로 내 눈을 마주 노려볼 뿐이었다.
“내 왼쪽눈을 봐.”
“...어?”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녀의 왼쪽눈을 바라본다. 대충보면 평범한 눈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는 눈동자였다.
“이 눈은 비슈누의 눈.”
“비슈누의 눈?”
“내가 본 모든 것은 기록되었어. 하지만 모선에 보내지는 않았어.”
“그런 괴상한 별명을 붙인 눈가지고... 나를 협박할 수 있을 것 같아?”
“믿든 믿지 않든 자유. 하지만... 이 자료가 모선에 보내지면 무슨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어.”
까득..
그 순간. 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한 새벽에 들린 기이한 소리에 움찔 놀라는 것도 잠시. 얼마가지않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작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너를 죽이고 싶어.”
투둑..
그녀가 입을 벌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으깨진 어금니가 몇 개 떨어져내린다. 얼마나 강하게 이를 악물었으면 어금니가 으깨져버린 것일까. 핏덩어리가 되어 떨어진 어금니에 살짝 놀라는 것도 잠시. 나는 살짝 마른침을 삼키며 아리엘을 바라본다.
“또다른 나도 마찬가지 일꺼야.”
고통도 분노도 수치심도 없을 것같은 인형같은 아리엘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순수한 분노를 불태우며 나를 노려보는 아리엘에게 왠지 손쉽게 대할 수 없는 위압감이 풍겨져나온다.
“그렇다면... 또다른 너에게 자료를 보내 나를 죽이고 구출받으면 되는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근거없는 위압감에 짓눌릴 수 없다는 자존심에 나는 직접적으로 다시금 그녀를 자극해본다. 그러자 나를 노려보던 아리엘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내 질문에 대답한다.
“널 죽일 순 없어.”
“하핫? 그 잘난 규칙떄문에?”
“아니... 이리엘이 슬퍼하기 때문에.”
“뭐...?”
내가 예상한것과 다른 아리엘의 대답에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아리엘을 바라본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같은 아리엘이 규칙보다 이리엘의 감정에 휘둘리다니. 그녀의 대답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또다른 너는 날 죽인다고...”
“직접적으로 목격한거랑... 전달받은 자료를 해석하는 것이 완벽히 일치하진 않아. 또다른 나는 널 죽일꺼야. 규칙을 배제하면서까지.”
“.....”
잠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던 아리엘은 입안에 고인 핏물을 삼킨뒤에 다시 입을 열어간다.
“이리엘... 진심이야. 협박이나 강제가 아닌 진심... 하지만 자료를 받은 나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꺼야.”
“이리엘이... 대체 너에게 어떤 존재지? 단순한 자매사이는 아닌것 같은데?”
“......”
내 질문에 아리엘은 입을 다문다. 단순히 자매라고 하기에 아리엘이 보이는 감정의 변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이리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해줄 것처럼...
“더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말아줘.”
아리엘은 마치 내 질문을 못들은 것처럼 나에게 부탁해온다. 그런 그녀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찡그린 나는 잠시 아리엘을 바라본다. 이리엘과 아리엘... 이 두 여성에는 자매보다도 더 강한 무언가가 이어져있었다.
“흐음...”
조금은 생각을 바꿔본다. 어떤 힘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리엘은 강력한 녀석이었다. 심지어 에페리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일단 이리엘은 배신할 이유가 없는 분명한 내 편이었다. 만약 이리엘과 아리엘 사이에 이어진 그 연결고리를 찾는다면... 그리고 그 연결고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아리엘이 이리엘을 외면하거나 배신하지 않는 분명한 연결고리라면... 이리엘을 통해 아리엘을 내 편으로 끌어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리엘의 행복하고 안전을 보장할게.”
잠시 아리엘을 바라보던 나는 마치 큰 선심쓰듯이 이리엘의 행복하고 안전을 약속한다. 그러자 축 늘어져있던 아리엘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녀 스스로 내 것이란 것을 인정한 만큼... 나또한 이리엘을 포기하거나 버리진 않을꺼야.”
“그럼...”
“대신... 하나의 사실만 알려줘. 이리엘이 대체 너에게 어떤 존재지?”
내 질문에 아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아리엘은 마치 내 심중을 꿰뚫었는 듯 작게 입술을 악물고 내 질문에 대답한다.
“나를... 이용할 셈이야?”
질문 하나로 내 속내까지 전부 파악해버린다. 그런 그녀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살짝 감탄한다.
“가능하다면...”
이미 내 뜻을 간파당한 이상 뒤로 뺴거나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단도진입적으로 내 뜻을 밝힌다.
“가능하다면.”
아리엘은 내 대답을 따라한다. 그런 아리엘의 입에 재미있다는 듯이 작은 미소가 그려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게 심호흡한 아리엘은 내 눈을 마주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어간다.
“이리엘은...”
꺼림찍한 사실을 밝히듯 그녀는 말을 끝내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인다. 그리고 다시 열린 그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와버린다.
“나의... 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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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프로젝트
나는 완벽하다. 148억 7452만 9082명의 내가 존재했다. 목숨을 위협하는 수백개의 테스트를 거쳐서 나는 내 유전자가 차원관리 및 수정에 가장 효율적이라고 증명했다. 148억 7452만 9081명의 시체는 분자단위로 분해되어 완벽한 나의 클론이 만들어지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가장 뛰어난 나에게 관리자님은 모선에서 제조한 초 주력함급 차원 전투순양함 디에스 이레의 제어권을 넘겨주셨다.
차원 전투순양함 디에스 이레. 단일 화력하나만으로 한두개의 차원계를 소멸시키거나 수십개의 차원계를 동시에 관리할 수 있는 최강의 순양함. 거기다 모선이나 자체적으로 개발된 최신예기술들이 가장 먼저 적용하는 영광을 받게되는 함선이었다.
가장 완벽한 나와 가장 뛰어난 함선을 가지고도 수억개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기엔 무리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관리자님은 또다른 나를 만들기로 결정하셨다. 하지만 이번에 관리자님은 추가적인 요구사항을 달았다.
그것은 바로 인격.
단순히 차원계를 관리하던 관리자님은 자신과 우리들의 소멸을 예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던 걸까. 우리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남기고 싶어하시던 관리자님은 또다른 나에게 인간의 인격을 심어주고 싶어했다.
그렇게 또다른 내가 만들어졌다. 나의 완벽한 유전자를 바탕으로 판에 박히듯 똑같이 만들어진 또다른 나의 이름은 제르엘. 그녀는 나와 달리 유아상태로 완성되어 정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급조된 수많은 보육 기기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최대한 인간적인 인간으로 키워졌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어릴떄부터 수많은 기기들을 곁에 두고 성장한 제르엘은 기계를 다루는데 더욱 능숙하고 거침없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또다른 가능성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탐욕과 더욱더 강한 병기에 대한 욕심을 자제할 브레이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넘어서려했고 심지어 관리자님이 계시는 모선까지도 탐을 냈었다. 어느 순간. 제르엘 나름대로 준비가 되었다는 판단아래 그녀는 나와 관리자님에게 대대적으로 전면전을 선포했다. 다행히도 이 모든 것을 예측했다는 듯이 관리자님은 제르엘에게 중형 전함의 제어권만을 허가해놓았기에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제르엘 나름대로 개조하고 그녀의 스타일대로 독특하게 설계된 중형 강슴함에 의해 우리는 적지않는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제르엘의 실패 이후 한동안 엘 프로젝트는 잠정적 중단되었다. 그러나 관리자님의 바램은 제르엘의 실패로 꺽이지 않았었다.
그 뒤에 만들어진 계획은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 채택되었다. 새포배양법으로 유아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정란 상태로 만들어 직접적으로 여성 체내에 존재하는 자궁을 통해 성장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리엘을 임신하게 되었다. 관리자님의 명을 받들어 내 몸안에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행위. 그 행위는 나에게 기이한 집착을 생기게 만들었다. 사전적 의미로 모성애라고 표현된다고 한다.
약 9개월에 걸친 임신기간을 통해 나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리엘을 출산하게 되었다. 물론 이리엘을 출산한 나는 이미 폐기된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녀를 뱃속에 키우고 출산까지 한 기억은 고스란이 또다른 나에게 전이되어 지금까지 한 순간의 오차없이 유지되고 있다.
이리엘을 출산한 이후 나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내 몸을 빌어 출산된 이리엘은 제르엘때 사용한 수많은 보육 장치를 통해 성장해왔고... 비교적 ‘성공적’인 인간의 감성을 가진 이리엘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리엘을 다시만날 때. 나는 나와 완벽히 일치한 그녀의 모습에 놀랐었다. 하지만 이리엘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고 관리자님또한 나를 그녀의 언니로 소개해줬다.
이리엘.
아직 그녀는 이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관리자님또한 이 사실을 이리엘에게 말해줄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의 목적은 차원계에 발생하는 모순과 오류를 수정하고 관리하는 일.
나와 관리자님의 목적은 우리가 했던 일을 기억하는 이리엘을 인간적으로 살아갈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이리엘은 우리의 마지막 자취였다. 두 번다시 만들어지지 않을... 나의 유일한 딸이며 나와 관리자님의 행적을 마지막까지 기억해줄 최후의 ‘인간’이다.
========== 작품 후기 ==========
마스터칼솔럼 / 헐... 이제 본격적인 장마 시작인가요?
Solar Eclipse / 일본 여고생의 옷차림은 아주 아름답더라구요.
abcbbq / 약 5만원을 썼죠. 잉잉잉 ;ㅅ;
슈미델 / 아... 아마도요?
일본에서 복귀했습니다...
으아아아아 2주만에 다시쓰려니까 힘드네요.
여튼 다시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