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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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품에 안긴채 자신의 슬픔을 잔뜩 토해내던 이리엘은 결국 울다 지쳐 내 품안에서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단순히 울다 지쳐 잠든 것이란 것을 확인한 나는 그런 이리엘은 조용히 침상위에 눕혀줬다.
“후...”
눈물 범벅이 되어버린 상의를 문지르며 짧은 한숨을 내쉰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같은 이리엘이었지만 한번 감정의 벽이 허물어지자 터져나오는 그녀의 슬픔은 어마어마했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나아졌겠지.”
그렇게 실컷 울었으니 조금은 진정이 됐을거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잉..
그때 고요한 의료실 내부에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곧이어 벽 한쪽이 살짝 옆으로 젖혀지며 얇은 기계팔이 나타난다. 그런 기계팔에는 황금색 리볼버가 쥐어져있었다.
“그건 뭐야?”
-이리엘님의 개인 화기입니다. 이리엘님 곁에 놔두도록 하겠습니다.
내 질문에 엘은 숨김없이 친절히 대답해주며 기계팔을 움직여 황금색 리볼버를 조심스럽게 이리엘의 가슴위에 올려둔다.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는 낯선 무게감에 이리엘의 눈꺼풀이 살짝 움찔거린다.
스윽.
하지만 몸에 벤 행동 덕분일까.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손으로 리볼버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다른 한손으로 리볼버가 보이지 않게 실린더를 감싼다. 그녀가 자고있는 사이 누군가 습격해오면 그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일 것이다.
“음?”
그때 리볼버에서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이리엘이 리볼버를 움켜쥐자 리볼버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회색빛 기운이 천천히 이리엘의 손에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비이상적인 현상에 기겁한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이리엘의 손에 쥐어진 리볼버를 뺏으려했다.
철컥!
그 순간 내 행동을 감지한 이리엘이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자신의 화기를 뺴앗으려는 나를 향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움켜쥐고 있는 리볼버를 겨눈다.
“이리엘?”
그 찰나의 순간 정확히 내 미간을 겨누고 있는 이리엘.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뭔가에 놀란 듯 크게 확장되어있었다.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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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살아있는거냐?”
어두운 공간속에서 벌러덩 엎드려있는 켈레브라가 묻는다.
“아직은... 아마도?”
그런 켈레브라 등 위에 엉겨붙어있는 이리엘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그 둘은 약간의 긴장감이 서린 얼굴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칡흑과도 같은 안개들 뿐이었다.
“으우... 우우우...”
그때 켈레브라의 가슴아래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그제서야 화들짝 놀란 켈레브라는 황급히 이리엘을 들쳐맨 채로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몸에 깔려있던 존재를 확인한다.
“언니 괜찮아?”
“이상없어.”
켈레브라에게 깔려있던 아리엘은 세게 부딪혔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콧잔등을 문지르며 대답한다. 그런 아리엘의 모습이 웃겼는지 켈레브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려버린다.
“웃지마!”
자신의 언니를 보고 웃는 켈레브라의 행동을 참지못한 이리엘은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알았어 알았어. 일단 지금 우리 어떻게 된거지?”
이마에 작은 손바닥 자국을 남긴채 간신히 웃음을 참은 켈레브라는 진지한 태도로 다시금 주변을 돌아본다.
“침식은 없어. 그럼 벗어났다는건데...”
이리엘은 슬쩍 켈레브라의 발을 확인해본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의 영혼을 붉게 잠식해오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뭔가 확신이 선 듯 눈을 감은 이리엘은 정신을 집중한다.
짝!
그리고 그녀가 두 손을 마주치자 어둠만 가득하던 공간이 이리엘의 의지대로 변화해나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어둠이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디에그 대그의 함장실이었다.
“우리 집이네!”
“다행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군.”
이런 변화에 익숙한듯 고개를 끄덕인 켈레브라는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마련된 함장용 의자에 걸터앉는다.
“이 꼴이 돼서도 그렇게 아슬아슬한 일을 겪을 줄 상상도 못했는걸?”
“그러게 말이야. 이런 경험도 흔치는 않을 것 같아.”
이리엘또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작게 미소지으며 의자에 앉아있는 켈레브라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걸터앉는다. 그리고 뭔가를 원하듯 그의 허벅지 위에서 가볍게 엉덩이를 비비자 켈레브라의 미소가 짙어진다.
“사지를 뚫고 온 후에 즐기는 유희는 더 각별한 법이지...”
“헤에... 난 그런거 겪어본 적이 없는데?”
살짝 이리엘을 끌어안은 켈레브라는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를 하며 묻는다.
“그러면서 왜 날 유혹하는거지?”
“뭐랄까... 그냥 가슴이 막 두근거리는게 여러 가지 생각하는 것도 귀찮고 그냥 너랑 꼭 살을 섞으면서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싶은데?”
이리엘의 대답에 만족한듯 켈레브라는 그녀의 가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슬금슬금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집으넣으려한다.
“.......”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아리엘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진다.
“지금... 뭐하는 것?”
이 상황을 이해못했던 아리엘은 켈레브라와 이리엘에게 단도진입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가볍게 이리엘의 목덜미를 혀로 훑은 켈레브라는 짧게 신음을 흘리는 이리엘을 대신해 아리엘의 질문에 대답한다.
“이리엘이 발정났어.”
“아...”
너무나도 직설적인 켈레브라의 대답에 오히려 아리엘의 얼굴이 벙쪄진다. 곧이어 날카롭게 눈썹을 세운 아리엘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언니!!!”
와락!!
뜬금없이 등장한 또다른 이리엘이 온몸을 던져 아리엘을 끌어안아버린다.
“우... 읏!”
아리엘은 신속히 몸의 무게중심을 낮춘 덕분에 볼썽사납게 바닥에 구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목덜미에 엉겨붙어있는 또다른 이리엘의 존재를 바라본다.
“그 녀석이 오리지널.. 아움...”
켈레브라의 허벅지에 앉아있던 이리엘은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다 말고 켈레브라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그와 짧게 혀를 섞고난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이리엘은 설명을 이어나간다.
“나는 그녀 속에 숨겨진 음탕한 본성이랄까?”
“....”
이리엘의 설명을 어렵지않게 이해한 아리엘은 자신의 목덜미를 두 번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끌어안고있는 이리엘을 내려다본다. 곧이어 아리엘은 그런 이리엘의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아준다.
“이리엘...”
언제나 차갑던 얼굴표정은 사라지고 아리엘의 얼굴에는 그 어떤때보다 따듯한 미소가 서려있었다. 그런 아리엘의 미소에 켈레브라의 품에 안겨있던 이리엘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리엘을 바라본다.
“그... 그 얼굴 뭐야 언니?!”
비록 지금은 심연속에 봉인되어 외부로 깨어날 수 없도록 갇혀있는 이리엘이었지만 아리엘에 대한 기억은 생생했다. 태어난 이후부터 평생을 같이해온 아리엘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따듯한 미소에 이리엘은 당황한다.
“에이... 신경쓰지 말고...”
“기다려 켈레브라! 이건 중요하다고!!”
몸을 일으킨 이리엘을 다시 끌어안기 위해 내뻗는 켈레브라의 팔을 쳐낸 이리엘은 옷매무세를 추스르며 바닥에 내려온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아리엘은 따듯하게 짓고있던 미소를 감쪽같이 없애버린다.
“무슨 문제라도?”
여전히 차가운 얼굴과 차가운 목소리. 하지만 그런 목소리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이리엘은 흔들리지 않고 아리엘의 앞으로 걸어가며 묻는다.
“아까 그 표정은 뭐야?! 이때까지 한번도 한 보여줬던 미소였잖아!!”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는 이리엘을 내려보던 아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걸어오는 또다른 과거의 이리엘을 바라본다.
“못해줬던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웃는 법을 잊고 있었거든.”
아리엘은 천천히 자신의 품에 안긴 이리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자신의 딸을 보듬어주는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존재나 모성에 대해 알 수 없었던 과거의 이리엘이나 현재의 이리엘은 그런 따듯한 아리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흐음...”
그런 아리엘의 모습을 바라보던 켈레브라는 흥미롭다는 듯이 짧게 콧소리를 흘린다.
“언니. 이제 언니는 안떠나는거지?”
잠시 아리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이리엘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아리엘에게 묻는다. 그런 이리엘의 질문에 아리엘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을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물론. 여기서 사라지지 않을꺼야.”
아리엘을 대신해 과거의 이리엘이 대신해서 자신있게 대답한다. 이곳은 정확히 켈레브라의 리볼버 안. 켈레브라의 의식체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공간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하지만 그런 사실을 켈레브라가 부정한다. 그런 켈레브라의 한마디에 모두가 켈레브라를 돌아본다.
“구심점이 없는 영혼은 소멸되어 버려.”
“소멸된다고?! 언니가?!”
이리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락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녀를 대신해 과거의 이리엘이 켈레브라에게 따진다.
“구심점이라는 건 육체를 뜻하는거지? 하지만 나도 육체가 없어. 하지만 언제나 네 리볼버속에 남아있잖아!!”
“너가 움직일 육체가 없다는거지. 너의 구심점은 이리엘이야. 이리엘의 신체가 리볼버에 일정 시간마다 접촉만 해준다면 넌 영원히 이 리볼버에 머물을 수 있어.”
“그... 그러면 넌!! 네 육체는...”
“내 영혼은 에페리아에 의해서 이 리볼버에 귀속되어있어. 소멸되고 싶어도 이 리볼버가 산산조각나지 않는한 무리지.”
“....”
켈레브라의 짧막한 답변에 과거의 이리엘의 말문이 막힌다. 동시에 두 이리엘은 아리엘을 돌아본다.
“.....”
보란 듯이 그런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 아리엘의 몸상태를 확인한 이리엘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린다.
“바... 방법... 방법을 찾아야해.”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과거의 이리엘과 켈레브라를 돌아본다. 과거의 이리엘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었고 켈레브라또한 머리를 벅벅 긁은뒤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댄다.
“어... 언니의 영혼도 물건에 귀속시키면...”
“불가능해. 그건 에페리아가 한 일이야.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녀석이 있으리가 없잖아?”
“있어... 있어!! 키르비르... 그녀라면...”
“내가 장담하겠는데. 불가능할껄?”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켈레브라는 고개를 돌려 이리엘을 바라본다. 안된다는 부정적인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리엘은 매섭게 쏘아보지만 켈레브라는 능글맞은 미소로 그런 시선을 흘려넘긴다.
“그녀가 가능했다면 네이가 죽었을때 왜 가만히 있었을까?”
“.....”
정확한 켈레브라의 지적에 이리엘은 할말을 잃어버린다. 충격받은 듯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이리엘을 보고 뒤늦게 죄책감이 든듯 켈레브라는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며 그녀에게 조언한다.
“너무 방법만 찾지마. 보내줄 사람을 보내줘야지. 그래도 넌 행복한거야. 마지막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얻었잖아.”
켈레브라의 조언에 이리엘은 천천히 아리엘을 바라본다. 이리엘과 시선을 마주친 아리엘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다. 심각하게 고민하던 과거의 이리엘또한 포기한듯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군다.
“언니...”
이리엘의 입에서 허망한 한 숨이 흘러나온다.
“언니는... 더 이상 나와 같이 있는게 싫어?”
이리엘의 질문에 아리엘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한다. 그녀가 고민하는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않았다. 얼마간의 침묵후 천천히 입술을 여는 아리엘.
“난 이리엘과 같이있고 싶어. 하지만 이게 운명이라면...”
그녀는 천천히 사라져가는 자신의 손끝을 바라본다.
“어자피 난 사라져야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 지금도 참 오래 견뎠어. 끝이야 이제.”
그녀가 포기하자 그녀의 신체가 소멸되는 속도가 가속화된다. 하지만 그런 아리엘을 바라보던 이리엘은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이 휘둥그레진다.
“운명...?”
“이리엘?!”
곧이어 그녀는 아리엘을 돌아보지도 않고 등을 돌린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아리엘은 살짝 놀란듯이 그녀를 부른다.
“기다려 언니. 조금만 기다려...”
곧이어 이리엘은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어둠속으로 몸을 던져 이 자리에서 사라져버린다.
“....”
사라져버린 이리엘의 자리를 바라보던 아리엘은 자신의 손을 힘껏 움켜쥔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분해되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한다.
“발버둥치는거냐?”
그런 아리엘을 바라보던 켈레브라는 그녀에게 묻는다. 그러자 아리엘은 켈레브라를 돌아보며 대답한다.
“아니. 기다리는 거야.”
이어서 안타깝다는 눈으로 이리엘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작별 인사도 못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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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실이냐?”
“응!”
이리엘은 일말의 주저없이 힘차게 대답한다.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의 흔들림없는 눈으로 내 눈을 응시하는 이리엘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너가 생각해낸 방법은 뭔데?”
“검은 마녀. 에페리아와 비슷한 검은 마녀. 리니아.”
“리니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인물은 바로 리니아였다.
“그 녀석이 그런게 가능하다고?”
“몰라. 하지만 가능성이 있어. 검은 마녀와 비슷한 영혼 파장. 재능이 있을 가능성 높아!”
이리엘은 확고한 어투로 대답한다. 그런 그녀의 말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던 나는 짧게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리니아가 할 수 있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손놓고있는 것보다 리니아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불러올게.”
“나도 같이...”
이리엘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려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어께를 조용히 누른 나는 내가 대신해 몸을 일으킨다.
“넌 조금 쉬고있어. 가능하다면 그 리볼버속에 남은 아리엘과 이야기라도 하고 있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 그렇지만...”
“나 믿지? 최대한 노력할테니까 믿어줘.”
“응...”
마지못해 대답하는 이리엘을 침대에 다시 눕힌 나는 그녀가 놓치않게 꽉 움켜쥐고 있는 그녀의 리볼버를 그녀의 가슴위에 얹어준다.
“다녀올게.”
“최대한 빨리 부탁할게. 제발...”
이리엘의 애원을 들은 나는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급한 발걸음으로 의료실을 나선다.
========== 작품 후기 ==========
0세계0 / 4귀검이란 것을 던탐시절부터 가져온 설정이었죠. 지금은 1대 마왕이 아수라, 2대가 버서커, 3대가 웨폰마스터, 마지막 타메르는 소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