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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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리니아는 풀이 죽은 모습으로 식탁앞에 앉아있었다. 그런 리니아 앞으로 키르비르는 따듯한 차와 같이 먹을 만한 간단하고 달콤한 간식거리를 몇 개 꺼내온다.
“저녁도 제대로 안먹었지?”
저녁시간 때 식당에 리니아가 오지 않았던 사실을 알고 있었던 키르비르는 간식으로 먹기에 살짝 양이 많을 정도로 과자와 빵을 리니아 앞에 내려둔다. 무끄럼이 그런 간식을 바라보던 리니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왜... 어째서...”
리니아는 키르비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키르비르였다면 비참하게 울고있는 자신을 더 철저히 짓밟았을 것이다. 의심 가득한 리니아의 시선을 느끼며 키르비르는 자신이 타온 홍차를 한모금 마시며 탁자위에 약병하나를 올려둔다.
“읏...”
키르비르가 낯선 약을 꺼내자 리니아는 짧게 신음을 흘린다. 단순히 색만 봐서 어떤 효과를 낼지 알아낼 수 없는 순수한 백색의 알약이었다. 리니아는 이 약이 자신과 키르비르 사이의 상하관계를 확실히 못 박아버릴 족쇄가 될 것이라고 혼자 상상한다. 그리고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짧은 한숨을 내쉰 리니아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지어간다.
“네가 들이킨 최음제의 효과를 억제하는 억제제야. 하루에 두 알씩. 아침에 한알 저녁에 한알씩 먹어.”
“뭐?”
키르비르의 친절한 설명에 리니아는 눈을 휘둥그레뜨며 되묻는다. 하지만 그런 리니아의 되물음은 무시한 키르비르는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 최음제를 해독시킬 방법은 남자와의 성교야. 너는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으니 그 약으로 버텨. 부족하면 얼마든지 만들어 줄테니까 부담없이 나를 찾아오면 돼.”
“거... 거짓말!”
리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키르비르의 말을 부정한다. 키르비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약병 안에서 알약을 꺼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보란 듯이 약을 삼킨다. 약을 먹어도 키르비르의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그래도 리니아는 그녀를 믿지 못했다.
“방금 전의 일은 사과할게.”
조용히 리니아의 맞은편에 앉은 키르비르는 우선 그녀에게 사과를 한다. 방금 전의 일이란 말에 리니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하지만 리니아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노려본다.
“하지만 너도 문제가 있었어.”
“내... 내가?!”
그녀의 사과를 들었을 때까지 아무말 없었던 리니아였지만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키르비르의 말에 리니아는 발끈한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여유롭게 홍차를 한모금 마시며 말한다.
“누가 입으로 처리해달래? 난 지극히 이성애자야. 네 애무 따윈 필요없다고.”
“하... 하지만 이상한 상황으로 몰고간건 너잖아!”
“이상한 상황이라 생각한 건 너 혼자겠지. 혼자 발정나가지고... 그런 변태적인 짓까지 서슴없이 하다니...”
키르비르는 소름이 돋는 다는 듯이 가볍게 몸을 떤다. 연기라고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리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했는데!!”
“티슈. 내가 원한건 티슈를 가져와 달라는 거였어.”
“뭐... 뭐어어어?! 어디서 말을 끼워맞추는 거야!!”
리니아는 참지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친다. 안그래도 자신이 키르비르에게 봉사했다는 것 자체가 수치로 느껴졌던 리니아였다. 하지만 그런 짓을 키르비르의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착각으로 했다는 것을 그녀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너... 너도 즐겼잖아! 아주 거창하게 가버렸으면서!!”
움찔...
자기도 모르게 뱉어낸 리니아의 한마디가 키르비르의 몸을 가볍게 떨리게 만들었다. 그런 작은 움직임을 포착해낸 리니아는 그 사실이 키르비르에게 약점이란 것을 직감한다.
“아주 오줌싸듯이 질질 싸던데? 코와 입으로 그 끈적한 액체가 흘러들어와서 죽는 줄 알았다고!”
“그... 그건!! 내 몸이 엄청 민감해져 있었서 그런거야!! 내 자의가 아니었다고!!”
결국 참다 못한 키르비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사실을 부정한다.
“하? 그걸 누가 믿어? 엉덩이까지 씰룩거리면서 뿅 갔잖아! 너 사실은 레즈비언아니야?”
“아니야!! 너야 말로 레즈비언 아니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길래 스스럼없이 남의 그곳에 입을 가져다 데는건데?”
둘이 한치의 물러섬없이 서로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있는 힘껏 사실을 부정하느라 소리를 쳤던 두 소녀는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노려본다.
“이대로 가다가는 끝이 없겠어.”
합의를 제의하는 것은 키르비르 쪽이었다. 그녀와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리니아는 아무말없이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서로 없던 일로 하는거야. 잊는거야. 오케이?”
“...응.”
키르비르의 제안에 리니아는 마지못해 수락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리니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후우...”
피곤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앉은 키르비르는 약간 식은 홍차를 입가에 가져가며 약병을 툭 밀어 리니아의 앞으로 굴린다. 그대로 놔두면 탁자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던 약병을 리니아가 황급히 잡아냈다.
“지금 먹어. 슬슬 거기가 간지럽잖아.”
“...”
부정할 수 없는 키르비르의 말에 리니아는 그녀를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약병의 병뚜껑을 연다. 그리고 약의 냄새를 맡아보듯 코를 킁킁거려봤다.
짤그락..
곧이어 약병을 두어번 흔들어 그 안의 알약 소리를 듣던 리니아는 마지못해 찡그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알약 하나를 입안에 가져갔다. 리니아는 알약을 입에 넣었지만 타액이 묻지 않게 약을 이빨로 물고 삼키는 척을 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키르비르의 모습을 예의 주시한다.
“......”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리니아를 바라보고 있는 키르비르. 그녀는 한모금 마신 홍차잔을 탁자에 내려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거짓이 담겨있지 않은 진지한 걱정이 담긴 질문. 그런 키르비르의 질문에 리니아의 머릿속이 더 혼란스럽게 뒤엉켜진다. 그녀의 말로 보아 알약은 최음제를 억제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리니아는 키르비르가 자신을 돕는 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꿀꺽...
점점 달아오르는 몸 상태를 직감한 리니아는 어쩔 수 없이 키르비르를 믿어보기로 한다. 그녀는 이빨 사이에 물고 있던 알약을 삼켜버린다. 타액과 닿자 순식간에 녹아버린 약은 청명한 감각과 함께 빠르게 달아오르던 열기를 식혀버린다.
약의 빠르고 확실한 효과보다 진짜로 최음제를 억제하는 약을 줬다는 사실에 놀란 리니아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그런 리니아의 시선에 빈 찻잔을 내려두며 키르비르는 입을 열었다.
“너가 날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은 알겠는데...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키르비르는 리니아에게 화해의 손길을 건낸다. 하지만 리니아는 손쉽게 키르비르가 건낸 화해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콧방귀를 뀌며 대답한다.
“흥! 네가 뭐라고 말해도... 내 마음은 바뀌지 않아. 난 널 철저히 밟아줄꺼야!!”
악의가 가득 담긴 리니아의 말에 키르비르는 무끄럼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리니아또한 지지않고 키르비르를 노려보고 있자 키르비르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타메르 때문이지?”
“잘 아네.”
이미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리니아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너가 나와 오라방 사이에 끼어든거잖아. 내가 오라방을 찾고 있는 동안. 여우같은 너가 우리 오라방에게 꼬리를 친거지. 비록 지금은 오라방이 호문클로스 때문에 과거 기억이 흐릿하지만... 두고 보라고. 내가 광혈의 저주만 없앨 방법만 찾게 되면 누가 웃게 될지 보자고!”
“그 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거야?”
독기 서린 리니아의 말에 키르비르는 오히려 팔로 턱을 괴며 흥미롭게 리니아의 말을 경청한다. 그런 키르비르의 태도에 리니아는 몸을 움찔 떨지만 이내 기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나와 오라방은 이 세상에서 제외된 사람이니까. 나와 오라방이 이어지는 것 당연한 거라고. 아니 그래야만해! 버림받고, 멸시받고, 외톨이가 되어본 우리끼리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너같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망할 괴물놈이 이해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흐으음...”
“나와 오라방은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를 보듬어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서 우리만의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살꺼라고! 너가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말아먹으려고 하고 있잖아! 그래서 난 널 절대로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오라방 앞에서 널 비참하게 뭉개버릴 꺼라고!!”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리니아의 이야기를 경청한 키르비르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쉬지않고 소리를 질러댄 리니아는 가볍게 숨을 헐떡이며 그런 키르비르를 아니꼬운 눈초리로 노려본다.
“그래. 좋네.”
키르비르는 리니아의 말에 짧게 감상을 말해준다. 긴 이야기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짧은 감상에 리니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흥분한 리니아와 달리 키르비르는 여유롭게 접시 위에 올려둔 과자 하나를 집에 한입 베어물며 말한다.
“리엔이 말한 운명에서는... 나와 타메르가 이어질 거라고 하던데?”
“......”
그런 키르비르의 한마디에 리니아의 눈에 불똥이 튄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한 채 한입 베어문 과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별것 아니라는 듯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넌...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화형을 당할 거고.”
“그걸 너가 어떻게...”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리니아의 운명또한 자세히 알고 있는 키르비르의 모습에 리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뜬다. 리엔이 워낙 착하기는 했지만 타인에게까지 남의 운명을 떠벌리고 다닐 정도로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닐 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리엔을 원망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리니아는 지금의 기싸움에 절대 지지않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말한다.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는거야. 정해진 운명 따윈 없어. 나에게 그딴 운명이 주어졌다면... 난 이 세상을 부숴버리는 일이 있더라고 해도 그 운명을 뒤틀어버릴 거야. 이 세상 사람들을 전부 죽여버리면... 내가 화형을 당하는 운명 따위가 벌어질 리가 없잖아?”
“......”
조용히 리니아의 말을 경청하는 키르비르의 얼굴에 작은 그늘이 떠오른다. 그녀의 말투나 의지가 그녀가 아주 잘 아는 누군가와 매우 비슷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에페리아. 둘이 비슷한 파장의 영혼을 가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비슷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 운명은 자기가 개척하는거지. 그럼 너가 직접 개척해봐.”
하지만 그런 리니아가 나쁘지 않았는지 키르비르는 얼굴에 지어진 작은 그늘을 지우고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나에게 타메르를 뺏어. 세상과 전부 싸울 자신이 있는데 설마 나 하나와 싸울 자신이 없겠어?”
“뭐... 뭐야... 무슨 뜻이야...”
“널 나와 버금가는 괴물로 만들어 줄테니까. 나에게 열심히 배워. 나의 모든 것을 배워서 타메르로부터 나를 몰아내는 거야. 알겠지?”
갑자기 키르비르가 자신을 응원하자 리니아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리니아의 표정을 즐겁게 구경하던 키르비르는 쿠키와 달콤한 빵이 담긴 접시를 그녀의 앞으로 가볍게 민다.
“정해진 운명을 부수는 것은 굴레에서 벗어난 검은 마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나는...”
조용히 말끝을 흐린 키르비르는 접시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잠시 침묵을 지킨다. 그리고 이내 접시로부터 손을 뗴어내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듯한 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리 잘나도 운명에 얽힌 사람이니까.”
“......”
그런 키르비르를 노려보며 리니아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듯이 키르비르가 내민 접시에 담긴 쿠키를 하나집어 한입 베어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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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비르의 말은 리니아의 환심을 사기 위한 가식적인 말이 아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키르비르는 더욱 집중적으로 리니아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지금 대륙의 마법지식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고차원적인 마법과 마력 운용법.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수식과 이론 앞에서 리니아는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습득하려고 노력했다.
“우으으으!!”
그리고 고작 몇 일이 지난 지금. 자신의 모든 마력을 짜낸 리니아는 자신의 손 위에서 한주먹정도가 들어갈만한 자그마한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격리시켜버린다. 공간을 제어하는 것을 뛰어넘어 극히 일부지만 차원 자체를 제어하는 복잡한 기술이었다.
“후아... 흐아아...”
모든 마력을 거의 다 짜낸 리니아는 마법을 그 이상으로 유지하지 못하고 힘없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린다. 그런 리니아를 지켜보고 있던 키르비르는 그녀에게 다가와 어께에 손을 올려둔다.
“많이 발전했어. 하지만 부족해.”
“나도 알아.”
키르비르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한 리니아는 어께에 올려둔 손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키르비르의 마력은 거부감없이 몸 안에 순환시킨다. 순식간에 가슴속에서 청량한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 리니아는 어려움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정리한 리니아는 키르비르가 전해준 요령대로 다시 한번 자신의 손안에 마력을 모아나갔다. 리니아가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자 키르비르는 리니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뒤로 물러서서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너가 언니에게 대항할 마지막 희망이 될 거야.”
자신이 알려준대로 마력을 운용해 차원을 왜곡시켜 가는 리니아를 바라보며 키르비르는 웅얼거린다.
“타메르에겐 나보다 너 같은 녀석이 필요하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도 키르비르는 자신의 손목에 남아있는 붉은 띠를 소중하게 매만져나간다.
========== 작품 후기 ==========
0새계0 / 아하하하하... 뭐... 아주 약간은 그럴 가능성이?
임대가르시 / 키르비르찡...
Solar Eclipse / 백치미는 흔하잖아요... 그냥 얀데레 갑시당!
루블리츠 / 아하하하... 그럴 필요 없어요. 저 같은 놈에게 무슨 쿠폰을...
IceOfSonic / 프라이드가 높은 캐릭터는 한번씩 깨줘야죠. 그래야 제맛.
으으으... 요번주는 하루하루가 묘하게 기네요. 월요일부터 연속적으로 야근해서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