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터스의 하인-292화 (292/298)

292편

<-- 전면전 -->

“크으윽... 크핫!!”

콰드득!!

마탑을 두드린 유탄들의 충격이 적지 않았는지 절반정도 남아있던 탑이 그대로 붕괴되어버린다. 잔해에 파묻혔던 나는 단순한 완력으로 잔해를 부수거나 밀어내고 몸을 일으킨다.

“괜찮아요?!”

어느새 이곳까지 달려왔는지 타이가 내 손을 붙잡고 내 몸을 일으켜준다. 그녀의 도움으로 잔해 속에서 일어난 나는 우선 나와 같이 있었던 이리엘의 모습을 확인해본다. 다행히 그녀는 큰 상처를 입지 않은채 티에르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네이!!”

내가 마지막에 봤던 모습이 환상이 아니기를 빌면서 잔해위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고개를 들어 수정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네이가 한손으로 수정에 매달려있었다.

“어휴... 위험했네요.”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몸에 잔뜩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레오는 크고 작은 생채기가 생긴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작게 엄살을 부린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런 그를 경계하지만 레오는 가볍게 어께를 으쓱거리며 말한다.

“이미 끝났어요. 수정은 충분히 충전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가 생겼네요.”

콰드득!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레오가 서있는 옆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낯익은 인물이 나타난다. 그녀는 다름 아닌 에페리아. 그녀는 어이없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일그러진 공간속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온다.

“아하하하하핫!!! 뭐야 너!! 그 힘. 마왕의 마안이잖아!!”

“칫...”

이미 내 오른쪽 눈의 정체를 알고있는 모양이었다. 나와 멀지않은 거리에서 무방비하게 등장한 에페리아를 노려본 나는 통증이 가시지않은 오른쪽 눈에 다시 한번 광혈의 힘을 집중시킨다. 그러자 또다시 시공간이 내 힘에 의해 지배되며 모든 시간이 정지되어가기 시작한다. 에페리아또한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은채 그 자리에 굳어버린다.

쿠웅!!

무방비한 에페리아의 목을 베어낼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런 기회를 막는 방해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네이. 그녀또한 나처럼 양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채 나와 비슷한 힘을 써서 내 앞을 막아내고 있었다.

“비.. 비켜 네이!!”

눈이 터질 듯한 통증을 억지로 삼키며 그녀에게 비키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네이는 아무런 대답없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다는 뜻으로 자신의 봉을 들어 봉 끝을 나를 향해 겨눌뿐이었다.

“크윽!!”

더 이상 통증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오른쪽 눈을 움켜쥐며 주저앉는다. 그러자 시공간을 지배하던 광혈의 힘이 사라지며 다시 시간이 정상으로 되돌아가버린다.

“하하하하! 한심하네! 그런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서도 아무것도 못하다니!”

“시끄러...!!”

나를 조롱하는 에페리아를 노려보며 나는 분에 서린 한마디를 내뱉는다. 그런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에페리아는 키득키득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어간다.

“하긴... 더럽고 비열한 네놈에게는 그런 과분한 힘은 돼지발에 진주지. 아아~ 역시 정의는 아직 살아있나봐.”

“그게 무슨 소리냐... 더럽고 비열한건 오히려 네놈이지!”

그녀의 조롱에 참지 못한 나는 버럭 소리친다. 하지만 에페리아는 오히려 가증스럽다는 얼굴로 고통스러워하는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말한다.

“하하핫. 키르비르의 환심과 그녀의 힘을 얻기 위해 넌 네이를 죽였어. 그리고 그 죄를 애꿎은 나에게 뒤집어 씌웠지. 안 그래?”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이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한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태도와 말투에 내 가슴속에 미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했다.

“불쌍한 네이. 오직 너만을 믿고 몸도 마음도 다 내어줬지만... 고작 키르비르의 환심을 사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버려진 불쌍한 네이. 하지만 정의로운 이 마녀님이 그런 네이를 가만히 둘 수 없었지.”

내 코앞까지 다가온 에페리아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키득거린다. 그런 에페리아를 응시하는 내 동공이 흔들린다.

“네이...!!”

에페리아의 등 뒤에 서 있는 네이. 분명 죽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다시 살려냈다기에 상태가 너무 이상했다. 감정없는 얼굴과 기계적인 움직임. 마치 인형과도 같은 그녀의 모습은 정교한 언데드라고 표현하기 적합할 것 같았다.

“너 설마!!!”

“헤에... 그 설마야.”

내 귓가에 기분나쁜 목소리로 속삭인 에페리아는 나에게 등을 돌린다. 그리고 양손을 번쩍들어 허공에 힘차게 박수를 치며 좌우로 손을 펼쳐보인다.

“비련의 주인공 등장입니다!”

콰지직!!

동시에 공간이 억지로 찢어져나가며 뒤에서 모든 것을 보고있던 키르비르가 모습을 들어낸다. 그녀는 지금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넋을 잃은 얼굴로 나와 네이를 번갈아돌아본다.

“키르비르!!”

“불쌍한 키르비르... 저런 비열하고 더러운 놈에게 속아서 자신의 피를 섞게 만들다니...”

에페리아는 멍하니 서있는 키르비르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붙혀 그녀의 손목에 그려진 붉은 띠를 살펴본다.

“서로의 피를 섞는 것은 마계 전통의 영원의 계약. 하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아. 되돌릴 수 있어 키르비르. 약간의 대가가 필요하지만...”

에페리아의 말에 키르비르는 멍하니 시선을 떨어뜨려 자신의 손목에 그려진 붉은 띠를 바라본다. 그리고 기계처럼 삐걱거리듯 목을 움직여 나를 바라본다.

“키르비르! 믿지마!! 에페리아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나는 그녀에게 소리친다. 하지만 에페리아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타메르가 날 죽였어. 이제 죽는 것이 내가 해야할 마지막 일이라며.”

그러자 가만히 서있는 네이가 미리 입력된 듯한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을 한다. 누가 봐도 이상함과 어색함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 판단력을 상실한 키르비르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2:1. 진실은 언제나 다수의 편이지.”

나를 돌아보며 에페리아는 약올리듯이 한마디를 해준다. 그런 에페리아를 노려보며 이빨이 으깨질 정도로 이를 악물어보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변할 리가 없었다. 조용히 나를 응시하는 키르비르의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고 깊게 느껴졌다.

“타메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없이 건조했다. 그런 키르비르를 바라보며 난 잠시 잊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한순간의 사고로 미래를 봤던 순간. 키르비르가 오열하며 나를 배신자라고 저주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으아아아아아!!”

이대로 가면 키르비르는 저주받을 에페리아의 꾀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을 절대로 납득할 수 없었던 나는 대검을 움켜쥐고 무모하게 에페리아를 향해 달려든다. 하지만 그러한 내 돌진을 막아서는 자는 한명도 없었다.

멀리서 팔짱을 끼고 긴장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레오. 봉 끝을 땅을 향한 채로 대기중인 네이. 에페리아를 공격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나를 막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페리아의 바로 앞에 서 있는 키르비르였다.

쩌엉!!

그녀의 마력이 마치 나를 거부하듯 거대한 푸른 벽을 만들어낸다. 그녀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 듯 푸른 마력의 벽은 그 형태가 불안정했지만 두터운 두께로 내 몸을 확실히 막아섰다.

“젠장...”

키르비르가 만든 벽 넘어로 사악한 악마처럼 키득키득 웃음을 흘린 에페리아는 여유롭게 나를 막아선 키르비르의 등 뒤로 걸어간다. 그리고는 작은 키르비르의 어께에 양손을 올리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자아... 언니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이렇게 되는거야... 이제 누구의 말을 잘 들어야할지 알겠지?”

에페리아의 저주스러운 속삭임에 키르비르는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거린다. 에페리아의 행동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차근차근 하나씩 고쳐나가자. 우선 피의 계약부터...”

키르비르의 어께위에 올려져있던 에페리아의 손이 마치 뱀처럼 미끄러져 내려가 그녀의 오른 손목에 새겨진 붉은 띠를 손끝으로 매만진다.

“계약을 해지한 대가는 너와 저 놈에게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을 거야. 네가 한 멍청한 짓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손목에 새겨진 붉은 띠를 손으로 집어 가볍게 잡아당긴다. 그러자 그녀의 피부에 새겨진 붉은 띠가 에페리아의 손에 잡혀 천천히 잡아당겨지기 시작한다. 어느정도 버티던 붉은 띠는 결국 에페리아의 힘을 못 이기고 허무하게 끊어져버린다.

“크.... 으아아아아악!!!”

에페리아에 의해 끈이 끊어지는 순간. 내 오른쪽 눈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격통이 몰려왔다. 마치 눈이 터질 것같은 통증에 오른쪽 눈을 움켜쥔 나는 그대로 무너져내린다.

“뭐... 뭐야 이거!! 크으읏!!”

“뭐긴 뭐야... 계약이 파기한 대가지. 키르비르를 통해 얻었던 힘은 사라질 거야. 너의 오른쪽 눈과 함께.”

“타메르씨... 눈이!!

오른쪽 눈을 움켜쥐었던 손에는 핏물이 가득 묻어나왔다. 그리고 아무리 눈을 깜박여 봐도 오른쪽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야아... 엄살부리지마. 키르비르도 이렇게 잘 참는데.”

“키르비르?!”

에페리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키르비르를 바라본다. 나를 조용히 응시하는 키르비르의 오른쪽 눈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확히 눈동자 자체가 핏물로 변해 그대로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통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하겠지만 키르비르는 아무런 비명없이 입술을 꽉 깨문채 하나 남은 왼쪽의 눈으로 나를 응시한다. 마치 이 고통과 분노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 앞에 나는 더 이상 엄살을 부릴 수 없었다.

“잘 참았어요. 돌아가서 언니가 이쁜 안대하나 구해줄게.”

에페리아는 지금 이 끔찍한 상황이 재미있는지 깔깔거리고 웃으며 키르비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돌아간다니... 키르비르를 데리고 어딜 갈 생각이냐!!”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이제 이곳에 용건은 없어. 정확히... 이곳 자체가 없어질건데 뭐...”

어께를 으쓱거리며 미소짓는 에페리아의 말을 증명하 듯이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창이 모습을 들어낸다. 유적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산맥 넘어에서 모습을 들어낸 빛의 창들은 일제히 지면에 내려꽂히며 거대한 충격파로 유적지를 뒤흔들었다.

“이건 디에스 이레의 함포...”

“디에스 이레?”

“아리엘 언니의 함선... 이 차원을 정화하기로 결정한 것 같아.”

그녀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차원계 전체가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이 세계는 얼마가지 않아서 사라질 거야. 자. 키르비르. 어떻게 할래? 그 전에 네 손으로 직접 복수할래?”

그 말과 함께 에페리아가 가볍게 키르비르의 엉덩이를 두드리자 키르비르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온다.

“키르비르...”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키르비르는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저 내 앞에 서서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은 매마른 눈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런 키르비르가 과거 잠깐 미래를 봤을 때 나에게 배신자라고 부르며 나를 증오했던 키르비르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스륵...

그녀는 천천히 팔을 들어올려 내 가슴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주저하듯 천천히 손을 움켜쥐어나갔다.

“으큭...!!”

그 순간 내 가슴위로 다섯 개의 새하얀 빛의 조각들이 들어난다. 그런 빛의 조각들을 연결하고 있는 얇은 실같은 것들이 움켜쥔 키르비르의 손 안에 얽혀있었다.

뚜둑!!

키르비르가 손을 뒤로 당기자 그녀의 손에 얽힌 실과 연결된 빛의 조각들이 하나씩 내 가슴속에서 빠져나온다.

쿠웅!!

“이... 이건!!”

빛의 조각이 하나 빠져나가는 순간. 심장이 불안정하게 요동친다. 가슴에 박혀있던 빛의 조각들은 내 몸 안에 잠들어있는 광혈의 저주와 타메르의 영혼을 봉인하고 있던 키르비르의 힘이었다.

만일 그녀가 만들어놓은 봉인이 풀린다면 타메르의 영혼은 광혈의 저주에 완전히 침식될 것이다. 타메르의 영혼이 침식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간신히 광혈의 저주를 억누르고 있었던 내가 완전해진 광혈의 저주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그 모든 사실을 알고있는 듯이 키르비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뒤로 당기는 손에 힘을 더해간다.

뚜두둑..

또 하나의 봉인이 억지로 뜯겨져나간다. 그러자 이제 곧 자신의 힘이 개방될 것을 알고 있는지 광혈의 저주가 내 심장 속에서 심장을 터트릴 기세로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키르비르...”

나는 키르비르의 이름을 조용히 읊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내 부름에 하나 남은 그녀의 왼쪽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린다. 하지만 내 눈은 그녀의 텅빈 오른쪽 눈으로 향한다.

“당겨 키르비르.”

텅 비어버린 그녀의 오른쪽 동공을 응시하던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내 말에 팔을 당기던 키르비르의 몸이 우뚝 멈춘다.

“괴물이 되어서 죽게 될 거야.”

“알고 있어.”

키르비르의 매마른 입술이 벌어지며 짧은 대화가 오고간다. 그리고 침묵. 나와 키르비르는 아무말없이 서로의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난 너가 싫어. 네 더러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네이를 이용하고 죽인 네가 싫다고.”

먼저 입을 연 것은 키르비르였다. 그녀는 여전히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나를 향한 증오를 내비친다. 에페리아에 의해 철저하게 속아있는 그녀의 증오에 내 가슴속이 타는 듯이 쓰라렸다.

“현실이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차라리 너와 행복했던 때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런 키르비르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쓴웃음을 짓으며 말한다.

“아냐. 이제 악몽이 시작된 거일 뿐이야. 내가 깨워줄게. 그 악몽에서부터...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응... 부탁이야. 그러니까...”

눈물맺힌 눈을 질끈 감으며 그녀는 내 가슴의 봉인과 연결된 실을 힘껏 움켜쥔다.

“죽지마... 꼭 날 찾으러와줘...”

투두둑!!

그녀의 말과 동시에 그녀는 내 가슴에 박힌 봉인을 풀어낸다.

“크허어어억!!”

심장과 내장을 터트릴 기세로 어마어마한 힘이 내 가슴 속에서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끄으으으!!”

온몸을 찢고 사방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요동치는 광혈의 저주를 어떻게든 억눌러본다. 하지만 그 힘은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마치 뱃속에서 수십개의 폭탄이 연속적으로 터지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강력한 힘이 내 몸을 마구잡이로 뒤흔든다.

본능적으로 내가 이 힘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다. 이미 내 양팔이 기괴하게 변형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광혈의 저주에 저항할 의지를 잃어버린다.

“키... 키르비르...”

의식을 잃기전 마지막이라도 키르비르를 보고싶다는 이기심에 나는 고개를 든다. 그런 내 눈앞에 낯익은 작은 은방울이 떨어져내린다.

“........”

자신의 머리끈으로 이용하던 은방울을 푼 키르비르는 그 방울을 나에게 건내며 뭐라 말을 한다. 하지만 이미 광혈의 저주에 온몸이 지배당하기 시작하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딸랑...

하지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기괴하게 변형된 내 팔로 반사적으로 떨어져내리는 은방울을 움켜쥔다.

딸랑!!

은방울을 움켜쥐는 순간. 은방울에서 울려퍼지는 소리의 파장이 한순간 내 의식을 심연의 밑바닥으로 가라앉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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