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2화 (2/245)

1. 노팅엄 FC (1)

“도운? 돈! 도니! 정신 차려!”

“···제임스?”

환청인가.

“그래, 나야 제임스라고. 다행이다. 기절한 건 아니구나. 의자들 싹 한번 검사해봐야겠네. 왜 갑자기 부러진 거지?”

프리미어리그의 팀에 취직한 날, 옛 친구가 그리워서, 버려진 구장에서 맥주 마시다가 의자가 부러져 뒤통수 박고 잠들었던 과정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젠장. 하필 이딴 꿈을···.

“빌어먹을 새끼야. 이거 고치라고 몇 번 말하냐.”

일단 욕부터 뱉고 봤다.

옛날부터 서로 막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 그런지 제임스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괜찮으면 좀 일어나라. 엄살은.”

“엄살?”

발끈해서 일어나려다가 제임스의 갈색 머리 뒤통수를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자세 은근히 편한데?”

제임스가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꿈인데, 꿈일 텐데 녀석의 얼굴을 보면 울 것 같았다.

나이 사십 가까이 먹고 우는 꿈을 꾸는 건 창피한데··· 꿈이니까 괜찮을지도.

“됐다. 그대로 들어. 구단주로서 제안할 게 있었는데 잘됐네.”

제임스의 목소리는 마치 그 시절 같았다.

어렵사리 4부 리그 잔류에 성공하고 내게 구단운영을 부탁하던 그 시절···.

“우리 좀 도와주라.”

“응?”

여기서 제임스가 구단을 맡아달라고···.

“우리 구단을 좀 맡아줬으면 하는데···.”

찌르르 울리던 무언가가 착 가라앉았다.

작년, 제임스가 죽은 직후, 나는 이 꿈을 몇 번 꾼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제임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녀석이 죽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때문이었을 거다.

“빌어먹을.”

“응?”

나는 한쪽 팔로 바닥을 짚고 억지로 일어났다.

일 년 전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은 제임스가 나를 황당하다는 듯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같네.”

“응?”

경기장도 예전이랑 똑같다.

잘 다듬어진 잔디, 반짝거리는 좌석들, 페인트칠이 벗겨지지 않은 구단 마크와 구장 이름까지.

꿈이 틀림없을 테지만,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운 풍경이었으니까. 되돌릴 수 없는 풍경이었으니까.

“보고 싶었다. 빌어먹을 놈아.”

“뭐?”

꿈이면 뭐 어떤가. 잠깐이라도 내 멋대로 해 보자.

제임스의 양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제임스는 질색했지만 내 힘이 더 셌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고, 내게 끌어안겨야 했다.

“이, 이 미친놈아.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그만둬.”

“왜 그랬는지는 내가 묻고 싶다. 왜 그랬냐. 응? 왜 죽었어?”

“내가 왜 죽어. 머리 다친 거 아니야? 병원, 병원 가자. 이러지 마. 우웩. 토할 것 같아.”

“실제였다면 나도 그랬겠지. 하지만 이건 꿈이잖아?”

“꿈 아니야 병신아!”

계속 퍼킹(fucking), 비치(bitch) 거리면서 완강하게 저항해서 어쩔 수 없이 놔줬다.

“아씨, 중요한 말인데 네가 제정신이 아니네. 병원 데려가 줄 테니까 진료부터 받자.”

“나 제정신이야. 그리고 네가 할 말도 다 안다.”

제임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내가 말했다.

“일단은 저번 구단에서처럼 단장(football director)을 맡아 달라고 하겠지.”

제임스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 말을 시작으로 시설도 봐 달라고 할 테고, 직원들 관리도 해 달라고 할 테고, 그냥 운영 전반을 맡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볼 거야. 사장, CEO 역할을 해 달라는 거지.”

눈이 커지다 못해 입도 벌어지고 있다. 참 볼만하다.

“구단 운영비로 빠져나가는 돈 때문에 네 회사 사람들이 괴롭힌다고, 너는 회사에 집중해야 한다고. 그치?”

“어, 어떻게··· 내가 술 먹고 얘기한 적 있었냐···?”

제임스의 표정이 한층 기괴해진다.

“내가 거절하면 ‘우리는 소울메이트잖아.’라는 말로 내 동정심을 끌어내려고 하겠지. 암, 잘 알지.”

“너 진짜 뭐야. 내 체계적인 계획을 어떻게 아는 거야? 귀신이라도 들렸어? 머리 부딪히고 초능력이라도 생긴 거야?”

“체계적은 무슨··· 뻔하지. 아무튼.”

보면 볼수록 그 시절의 제임스였다. 나는 수년간 묻고 싶었던 걸 입 밖에 냈다.

“왜 하필 나야? 난 네가 원하는 대로 구단을 본격적으로 맡아본 적이 없어. 말아먹으면 어쩌려고.”

이 시절 내 마지막 경력은 노팅엄 FC와 같은 4부리그 최하위권 팀에서 선수 영입과 방출에만 관여했던 권한이 적은 단장이었다. 제임스가 원하는 건 더 넓은 범위의 일이었다.

여전히 날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던 제임스가 바로 답했다.

“음······ 도니잖아?”

“뭐?”

“어릴 때부터 나나 조이가 사고 치면 네가 늘 수습해줬던 거 생각나냐? 너는 뭐든 대충하는 적이 없었고, 늘 열심히 해서 부모님께 너 좀 본받으라고 얼마나 혼났는지··· 큼큼, 이건 됐고.”

내가 실소하자 제임스가 목소리를 살짝 내리깔고 말했다. 진지한 척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너는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놈이니까.”

내 꿈속으로 녀석의 영혼이 찾아온 건지, 제임스가 할 법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우리 회사 와서 편하게 지내라니까 거절하고, 온갖 팀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걸 배웠잖아. 그러니까 벨기에 팀에서도 사장이나 다름없는 제안을 받은 걸 테고. 무엇보다···.”

“···.”

“얼마나 멋지냐? 노팅엄에서 뛰었던 옛 소년들이 위기에 빠진 구단을 부활시킨다. 와, 진짜 상상만 해도 멋지다. 그렇지?”

제임스의 눈은 그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초롱초롱했다.

어이가 없다. 과거에는 바로 거절했기에 듣지 못했던 이유가 이런 거였다니··· 아, 꿈이었지. 내 상상이지.

“더 필요해?”

로망과 꿈은 제임스가 좋아하는 대표적인 단어들이었다.

이 녀석은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 일을 진행하곤 했고, 특유의 운빨로 성공해내곤 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장난감 가게를 큰 규모의 장난감 공장으로 만드는 데 고작 5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 운은 구단운영에는 작용하지 않았고, 자기처럼 머리에 꽃핀 이상한 단장을 선임해 구단을 말아먹고, 회사까지 휘청거려 제임스는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했다.

“······ 서른이 넘었는데도 넌 변하는 게 없냐.”

“서른 넘으면 내가 변해야 해?”

“참나···.”

이거 꿈 맞아? 진짜 제임스 같잖아.

목이 메어 억지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 몸짓을 거절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제임스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야야, 제발 좀 도와 줘라아. 나는 축구선수였지 축구팀 경영자가 아니었다고. 필요한 건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응? 제발.”

제임스가 양손을 기도하듯 비비며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의 기분 나쁜 버릇이었지만, 지금은 다 용서할 수 있었다.

“여기는 4부리그라고. 프로라고. 이번 시즌에 강등당할 뻔했다고. 두 달 전에 감독 자르고 대행 안 세웠으면 난 서포터들한테 맞아 죽었을 거야. 그러니까 도니··· 응?”

제임스가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진짜 같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깰 기미도 안 보이니 자기만족이나 계속해 봐야겠다. 이러면 좋아하겠지.

“좋아. 할게. 계약서 가져와.”

“정말?”

제임스가 다급히 가방을 뒤적여 계약서를 꺼냈다. 계약서를 쭉 훑어보고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너 진짜 머리 다친 거 아니야?”

제임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벨기에 팀이랑 협상 거의 끝났다고 했잖아.”

제임스의 말대로 나는 이때 한국인 구단주가 운영하는 벨기에 2부 팀에서 제안을 받은 상황이었다. 나는 녀석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 팀의 운영을 맡았었다.

내가 전반적인 운영을 맡은 첫 팀이었다. 생각보다 나는 잘했다. 나는 그 팀을 1년 만에 벨기에 1부리그로 승격시켰고, 우여곡절 끝에 우승까지 이끌었다. 총 7년이 걸렸다. 나는 그 성과 덕에 프리미어리그 팀의 운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성공적인 삶의 끝에는 가장 필요한 게 없었다. 내가 꼭 맡고 싶었던 고향 팀과 평생 함께 떠들 줄 알았던 제임스가 사라졌다.

“도와달라며? 내 꿈이 노팅엄의 사장인 거 알잖아?”

이때 노팅엄 FC를 맡지 않은 건 내가 팀을 망칠까 무서워서였다.

나는 벨기에에서 경험을 쌓고, 성과를 내서 노팅엄을 맡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도니···.”

친구의 살아있는 얼굴은 정말 보기 좋았다.

나는 제멋대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다. 제임스의 어깨에 손을 걸치며 말했다.

“대신 오늘은 로빈훗에서 물고기처럼 마셔보자. 네가 다 사는 거다?”

“당연하지! 오랜만에 한번 붙어 보자고.”

마치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제임스와 잡소리를 주고받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복도를 지나도, 구장 출입문을 나설 때도 꿈은 깨지 않았다.

나는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이 꿈이 깨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

이불 속이 술 냄새로 가득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중얼거렸다.

“···왜 안 깨지.”

어제 술에 취했다는 핑계 겸 꿈이라는 이유로 제임스를 붙잡고 엉엉 울었는데.

꿈이 틀림없을 텐데 스마트폰의 날짜 칸에는 <2024년 4월 19일 AM 09:07>이라고 적혀있었다.

꿈속에서 자고 깰 수도 있나? 검색해보니 드물지만 그럴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아니 꿈에서 이런 검색도 된다고?

설마.

오랜 타향살이로 생긴 내 습관은 장르 드라마, 영화, 소설을 챙겨보는 거였다. 어느 나라의 장르물이든 아주 흔하게 나오는 소재인 회귀가 내 머릿속을 번득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하하.”

그때 스마트폰이 연속으로 몇 번 울렸다.

처음 보는 번호로 메시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저는 제임스의 명을 받아 미스터 킴의 업무를 도울 임시 비서, 마리아 로스라고 해요! ‘마리’나 ‘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제임스가 어제 자기가 압도적으로 이겨서··· 미스터 킴이 늦게 출근할 거라고 했는데···.]

[몇 시에 출근할지 메시지 부탁드려요!]

마리아 로스라는 사람은 처음 본다.

꿈에 모르는 사람도 나오나.

그런데 진 게 아니라 봐 준 건데···.

나는 점심 먹고 갈 거라고 구단에 관한 자료는 있는 한 다 모아놔달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멍하니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적인 후 전화를 걸었다.

-얘! 얼마 만에 전화하는 거니? 아들 목소리 다 잊어먹겠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응, 잘 챙겨 먹어. 근데 엄마, 올해가 환갑 맞지?”

-응? 그런 건 왜 물어보니? 맞긴 맞는데···.

엄마의 반응도 너무 생생했다. 목소리도 젊었다. 잠깐 말문이 막혀 머뭇거리는데 엄마가 김칫국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도운아? 왜 이렇게 말이 없어. 혹시··· 아! 드디어 결혼 상대를 구한 거니? 나랑 사주라도 맞춰보려고? 누구니? 이 엄마는 국적 같은 거 상관없어.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다···.

“아니 왜 생각이 그쪽으로 가. 그게 아니라 그냥···.”

-아니라고?

실수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싸늘하다.

맞다. 이때 엄마와 전화를 하면 대화는 늘 기승전결혼으로 흘렀다. 이 시기의 내 나이는 서른둘. 몇 년 더 있으면 괜찮은 사람 만나기도 힘들다면서 엄마는 전화할 때마다 여자친구나 결혼할 사람이 없는지 묻곤 했었다.

-···그럼 여자친구는 만들었지?

“아니, 없는데···.”

젊어진 엄마 목소리에 뭉클해졌던 건 정말 잠깐이었다.

-여자친구 생기기 전에는 전화도 하지 마! 재영이는 벌써 애가 셋이고 얼마나 귀여운데, 걔네 엄마가 자랑하는 거 들으면 내가 얼마나 속이···.

“···엄마! 미안!”

-야! 김도운!

회귀 전인지 현실인지 모를 예순일곱의 엄마와는 다르게 공격적이었다. 그때는 반쯤 포기했었다.

아무튼, 나는 이게 꿈이라면 구멍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전화번호부에 적힌 번호에 가능한 한 다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여기는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라서요.”

-어쩔 수 없죠. 아쉽네요.

마지막으로 벨기에 팀의 구단주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팀과 계약했다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몇십 통의 전화를 마친 후, 나는 이 꿈이 인셉션 수준의 정교한 꿈이거나 내가 정말로 회귀한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둘 중 뭐가 진짜든,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제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니? 지금 일어났어?

“야, 너 가끔 간다는 복권가게 이름이랑 위치 좀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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