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3화 (3/245)

1. 노팅엄 FC (2)

“만나서 반가워요. 킴. 문자로 인사했죠? 저는 마리아 로스에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어제 정말 많이 드셨나 봐요.”

마리아는 오렌지색 단발머리 아래 미소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다.

“저도 반가워요. 마리아.”

하지만 나는 마리아와의 인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손에 쥔 복권 뭉치를 만지작거릴때마다 상념이 생겨나서.

회귀 전, 제임스의 노팅엄과 회사는 큰 자금난에 시달렸고, 그럴 때마다 내게 ‘그 주에 복권을 샀어야 했는데··· 그러면 좀 나았을 텐데.’라며 탄식했었다.

‘그 주’는 나한테 운영일을 제안하고 거절당했던 이번 주를 말한다.

제임스는 즉석복권이나 경마 같은 도박성이 있는 게임들을 자주 즐겼기에 복권을 사기 위해 자주 가는 가게가 있었는데, 거기서 이번 주에 당첨자가 나왔다는 거다.

즉석복권 최대당첨금으로는 이례적인 100만 파운드(약 15억 원)의 금액.

작년, 데이비드 워커와 니콜라스 마카키스라는 두 월드클래스 선수를 손에 넣은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과 크리스 앨런이 이끄는 웨일즈의 월드컵 준우승을 기념해 영국에서 발행한 이벤트성 즉석 복권이었기에 가능한 금액이었다.

그래서 출근하면서 그 가게에 있는 복권을 싹 사왔다. 이따 돌아가마자 긁을 계획이었다.

“킴?”

“아, 네.”

“아까 부탁하신 거요.”

마리아가 가리킨 건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의 산이었다.

“수고했어요. 근데 뭘 이런 것까지···.”

책상 앞에는 <환영해요. 김도운. - 노팅엄 FC>이라는 내용이 한글로 적힌 크리스털 명패가 세워져 있었다.

마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제임스가 저번 주부터 준비했어요.”

지난 생에서 들은 적 없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이게 일반적인 꿈이 아니라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는 증거처럼.

마리아가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제임스랑 여기에서 8년이나 뛰었다면서요?”

“네, 이걸 여기에 걸어놨네요···.”

액자 안에는 나와 제임스가 있었다.

우리는 지금의 팀, 노팅엄 FC의 유소년 유니폼을 입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집에도 걸려있는 그리운 사진이다.

열두 살부터 스무 살까지. 이곳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낸 나는 다른 팀으로 이적한 후에도 이 팀의 팬으로 남았다.

사람들이 좋았고, 분위기가 좋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팀이었으니까.

다른 팀에서 한계를 느끼고 선수 생활을 접은 후에도. 군대에 다녀와서 대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여러 팀을 돌아다니며 이일 저일 다 했을 때도 나는 노팅엄 FC, 줄여서 노팅엄의 팬이었다.

프로 데뷔에 실패하고 장난감 사업을 시작한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일 년에 적어도 두 번은 만나 노팅엄을 응원하고 밤을 새워서 술을 마시곤 했었다.

하지만 노팅엄은 2021년, 큰 투자를 하겠다는 새 구단주를 맞이한다. 그리고 반년 만에 그 구단주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구단주는 빚을 내서 구단을 인수한 거였고, 구단을 담보로 그 빚을 갚았다.

구단은 빚더미에 나앉게 됐고, 2년 동안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한 나머지 노팅엄은 세금도 못 내고 파산했다.

그렇게 노팅엄 FC는 세미프로리그인 5부리그로 강등당했다.

이때 나타난 노팅엄의 새 구단주가 바로 제임스 휘팅엄, 내 친구였다.

노팅엄시에서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된 녀석은 팬심으로 5부 리그의 구단을 인수하고 영국 정부에 팔린 구장도 임대 형식으로 사들여 남은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마추어팀이 섞인 5부 리그에서는 승승장구했었다. 많은 팬이 떨어져 나갔지만, 5부 리그 수준에서는 무척 많았고 남은 선수들도 몇 있었으니까.

하지만 4부 리그에서는 아니었다.

이번 시즌, 프로 리그에 돌아온 제임스의 노팅엄 FC는 시즌 내내 휘청거리면서 많은 팬을 잃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 3라운드 전에 간신히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내게 도움을 청한 게 바로 이 시기였다.

“능력 있고 근성 있는 사람이라고 제임스가 얼마나 칭찬했는지 몰라요.”

“또 뭐라고 했어요?”

“이 팀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분이라고 했어요.”

마리아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이어 말했다.

“저도 이 팀을 정말 사랑하는데, 비슷한 사람끼리 같이 일하게 됐네요?”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마리아도 제임스처럼 부담스러운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오글거리는 말은 덤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액자에 걸린 사진 앞을 지나 내 책상에 앉았다.

처음 앉는 의자임에도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마치 내 자리를 찾은 것처럼.

나는 내 대답을 기대하는 것처럼 손을 모으고 있는 마리아에게 그녀가 기대할 만한 말을 꺼냈다.

“네, 비슷한 사람끼리 잘해 봐요. 그리고, 이 팀을 최고로 만들어보죠.”

마리아의 눈이 보름달같이 휘둥그레졌다가, 그믐달 모양으로 자연스럽게 접혔다. 마치 달의 위상이 변하는 것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나는 몇 번 헛기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리아도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원래 여기 직원이었어요?”

“네, 대학교 졸업하기 전에는 파트 타임으로, 졸업한 후에는 홍보팀에 있었어요.”

“와.”

“강등 전부터 지금까지 경력 9년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노팅엄의 팬이었고요.”

“선배님이네요. 많이 배워야겠어요.”

그녀가 더 환하게 웃었다.

나는 가볍게 따라 웃은 후, 오늘 다 읽기 글러 보이는 서류무더기를 한 번 보고 문 쪽으로 움직였다.

서류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건 이따 돌아와서 읽어야지.

“일단 구단을 돌아볼까요.”

*

초라한 구단 사무실, 구장시설관리자실, 기념품점을 거쳐 훈련장에 도착했다.

“아이고, 그 꼬마가 이렇게 출세하다니.”

유소년 시절 여기에서 살다시피 해서 그런지 훈련장에는 반가운 얼굴이 많았다.

파머 부부. 부부는 30여 년 동안 노팅엄의 식사를 책임진 사람들이었다.

선수, 감독, 코치진, 운영진과는 다르게 구단의 일반 직원들은 구단을 평생직장으로 삼는다.

이 구단 출신이라는 점이 속칭 고인물들과 인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너한테 잘 보이면 주급도 올라가니?”

진담 같은 농담을 건네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킥킥 웃으며 다음에 식사하러 오겠다고 말하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이어서 훈련장으로 나가 노팅엄의 감독대행이자 성인팀 코치인 스티븐 에반스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

“어? 돈 아니냐?”

도운, 돈, 도니 전부 나를 부르는 호칭이다. 옆에서 마리아가 작게 묻는다.

“저는 뭐라고 부를까요?”

“편한대로요.”

“으음···.”

일생일대의 고민이라도 하는 듯 심각해진 마리아를 뒤로하고 스티븐과 가볍게 포옹했다.

스티븐 에반스는 나와 제임스의 유소년 시절 코치였다.

성인팀 코치로 일하다가 전 감독의 부진에 이은 퇴진으로 어쩔 수 없이 감독대행을 수행 중인 분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놀러 온 거냐?”

나는 말 없이 웃으며 스티븐의 머리숱을 확인했다.

7년 후에는 하나도 없는데, 지금은 꽤 있네.

“마리? 너는 왜 여깄냐?”

“제임스의 지시로 직책이 바뀌었어요. 한동안 도니··· 돈··· 도운··· 킴···의 비서예요.”

“비서?”

“제가 노팅엄의 사장 겸 단장을 맡기로 했거든요.”

스티븐은 날 보며 갸우뚱하더니, 이내 이해하고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정말?”

“네, 스티븐, 감독 일은 어때요?”

그는 능력 있는 코치였지만, 높은 자리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회귀 전 제임스가 말해줘서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팀들이 삽질하는 덕에 살았지. 근데 다음 시즌에는 절대로 하기 싫어.”

“걱정하지 마세요. 바로 새 감독 데려올 테니까.”

“선수는···.”

“데려올게요.”

“시원시원하니 좋네. 근데 잘 할 수 있겠냐.”

“운만 따라주면요.”

“네가 허튼소리 하는 놈은 아니니···.”

꼭 데려오고 싶은 감독은 하나 있었다. 이 감독과 함께라면 걱정을 절반 이상 덜 수 있었다.

선수들은··· 좀 미묘했다.

아무리 미래에서 왔다지만, 나는 벨기에에서 일했다.

잉글랜드 하부리그 선수들은 잘 모른다. 유명해지는 선수만 몇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몸담았던 벨기에 리그에도 월드클래스 급, 1부리그 주전급으로 성장하는 선수가 꽤 있었다.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최대한 선수들의 명단을 정리해놔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으니까.

스티븐과 인사를 마치고 훈련장을 나서는 길, 계속 고민에 빠져있던 마리아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돈돈이라고 불러도 돼요?”

“···아직까지 그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네! 어때요? 귀엽죠?”

나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 귀여운 호칭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눈가를 찡그린 채 답했다.

“무슨 일본 음식 같은 이름이네요.”

별생각 없었는데 내 말을 오해한 마리아가 울상이 되었다.

“놀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럼 운은 어때요?”

“음···.”

“우니, 우니는 괜찮죠? 네? 대답 좀 해 줘요··· 혹시 기분 나빴어요?”

“내 이름이 몇 개인지 모르겠네요.”

“좋다는 거예요. 싫다는 거예요. 네?”

“글쎄요.”

“킴!”

반응이 재미있다.

한동안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참고로 마리아는 돈이든 도니든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부르겠다고 말했다.

*

일요일 저녁에는 구단주 제임스와 함께 라커룸을 찾았다.

잉글랜드 4부리그 44R(라운드) 경기가 있는 날이어서 선수단, 코칭스태프와 정식으로 인사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우리 팀은 이번 시즌 4부 리그에서도 운 좋게 강등을 벗어난 팀이었고, 그만큼 선수단의 사기는 나빴다.

내 인사에도 흥미가 없어 보였다. 특히 팀에서 마음이 완전히 떠난 선수들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나는 선수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메모한 후 제임스와 함께 관계자 석에 앉았다.

경기가 시작되고 한참 동안 말 없이 경기만 보고 있는 내게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튼··· 어떻게 생각하냐?”

“엉망인 게 많지.”

“그래?”

제임스는 조심스러웠다.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가장 걱정되는 건 관중의 숫자지. 다음 시즌 뚜렷한 전망도 없는데 경기력은··· 보다시피 엉망이고. 팬이 없는 팀은 망하잖아.”

말하는 도중 수비수들의 방만한 수비로 실점했다. 제임스와 내 표정이 동시에 찡그려졌다.

강등권을 벗어난 하위권 팀의 선수들이 동기부여가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경기장을 찾은 팬들에게는 전혀 당연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입장객이 2,194명이니까···.”

“많이 줄었지··· 우리 어릴 때는 2만 명씩 들어오던 구장인데···.”

제임스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내가 입장객 숫자를 꺼낸 이유는 제임스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였다.

“다음 시즌에는 오천 명으로 늘리자.”

“두 배 넘게? 그게 되겠어?”

“그러려고 나 고용한 거 아니야?”

혹시 이곳이 꿈속이라면 더 크게 실망할까 봐 요 며칠 제임스를 만나는 걸 피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어이없게 죽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회귀한 거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 두 번째 기회, 나는 지난 생에 가장 크게 후회했던 두 가지, 노팅엄 FC의 해체와 제임스의 자살을 막기 위해 노팅엄 FC를 멋지게 부활시켜 보자고 마음먹었다.

이게 혹여 꿈일지라도 절대 후회하지 않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뭘 하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하잖아. 무슨 돈으로? 직원들 급료랑 경기장 대여료랑 선수, 코칭스태프 급료까지 지급하면 적잔데.”

“내가 투자할게. 대신 공짜로 할 수는 없으니까 구단 지분 좀 팔아라.”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나는 씩 웃으며 엊그제 당첨된 복권과 함께 통장에 입금된 금액을 보여줬다.

천문학적인 돈은 아니었지만, 이전 생에서는 없었던 돈이 내 손안에 있었다.

“오, 신이시여.”

“지분 팔 거야 안 팔 거야?”

“당연히 팔지. 지금 얼마나 허덕이고 있는데.”

“그래.”

뜻밖의 행운에 제임스가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보다 중요한 얘기가 있었다.

“제임스, 다음 시즌 평균관중을 5,000명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음 주부터 시작하고 싶은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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