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노팅엄의 첫 걸음 (3)
“···이게 뭔 일이래.”
“메리! 멍하니 있지 마요!”
두 라운드 전만 해도 파리만 날리던 동쪽 출입구에 사람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옆 직원의 말에 메리는 다시 표가 진짜인지 검사하는 데 집중했다.
펠릭스는 평소보다 빠르게 금속탐지기를 놀려 입장객들을 검사했다.
“캔 음료 안됩니다.”
“그래요? 죄송합니다.”
“유리병도 안돼요. 그 우산도 너무 크고요.”
“정말요? 어떡하지···.”
오늘따라 유난히 젊은 사람이 많이 보였다. 이들은 축구장에도 처음 오는 건지 반입금지 물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들을 저지하랴 새로 들어오려는 입장객들을 검사하랴 정신이 없던 와중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 소리가 들렸다.
-출입구를 더 개방하기로 했습니다. 동쪽 출입구의 케빈과 올리버는 북동쪽 출입구로 와 주세요.
펠릭스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 메리가 들고 있던 무전기를 뺏어 든 뒤 말했다.
“여기 사람 빼가면 어떻게 하라고. 입장객이 얼마나 많은데.”
-펠릭스, 어쩔 수 없어요. 표가 다 팔렸단 말이에요.
“뭐?”
-오늘 관중이 2만 명이라는 얘기죠. 사무실에서도 다 지원 나갈 테니까 어서 케빈이나 보내주세요.
“···알겠어.”
경기가 시작하고 십 분이 넘어서까지 펠릭스는 일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간신히 한숨 돌리게 되었을 때는 경기가 시작하고 이십 분쯤 지났을 때였다.
“경기장 보안요원은?”
“미스터 킴이 혹시 몰라서 알아봐 놓은 업체에 급하게 부탁했대요. 자, 이거 마시면서 좀 쉬어요.”
펠릭스는 메리가 내미는 콜라를 쭉 들이켜며 생각했다.
이렇게 콜라가 달았던 게 얼마 만이지?
“오랜만에 일하는 맛 났죠?”
“그렇네.”
“어차피 구단 돈 써서 한 행산데···.”
부정적인 직원의 말은 곧 다른 직원들에게 묻혀버렸다.
“그러면 뭐 어때요. 5부리그에 막 떨어졌을 때나, 이번 시즌에 올라왔을 때나 이렇게 북적거렸던 적이 없는데.”
“미스터 킴도 이게 첫 발자국이라고 했잖아요. 처음부터 2만 명이면 나중에는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줄까요?”
노팅엄 FC는 그들의 직장이었고, 이 구단은 지금 변화하려 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잔뜩 흥분한 채로 김도운이 앞으로 무얼 할지 떠들어대고 있었다.
펠릭스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한동안 해고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 우리도 이제 교대로 쉬자고.”
*
제임스는 말 그대로 헤벌쭉 웃고 있었다.
“제임스.”
“응.”
“트렌트 대학교랑 노팅엄 대학에도 포스터 붙인 거야?”
“응, 네가 하란 대로 지시했어. 역시 내 베스트 프렌드야. 믿고 있었다고!”
<오오오오! 노팅엄! 노팅엄!>
원래 우리 경기장의 총 좌석은 삼만 석이지만, 관중이 많이 줄었기에 다른 구단처럼 만 석 정도를 폐쇄해놨기에 이만 석이 최대다.
그 이만 석이 꽉 차 있었다.
그리고 관중의 절반 이상이 대학생으로 보인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이거 무서워. 난 쟤네까지 불러올 생각은 못 했는데.
‘최대한 많은 곳에 홍보해줘.’
노팅엄의 서포터가 많을 곳을 생각하며 한 말이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제임스 이 운 좋은 새끼···.
마리아가 감격해서 비틀거리는 제임스를 부축하는 게 보인다.
“정신 차려요. 제임스.”
“마리, 저걸 보고 정신이 안 나갈 수 있어? 봐, 내 말 맞지? 도니는 이 팀을 구할 구세주라고. 어떻게 시험 끝난 학생들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하지?”
마리아 또한 황홀한 눈빛으로 경기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해요. 최상위 리그의 팀들도 해외 팬을 유치하기 위해 난항을 겪는데, 유학 온 대학생들을 팬으로 만든다면 그 과정이 훨씬 원활해지는 거잖아요? 1학년을 잡는다면 대학은 적어도 2년, 대학교는 적어도 3~4년 동안 경기장을 찾을 팬이 되는 거고요···.”
마리아가 제멋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눈이 초롱초롱하다. 그녀가 신나서 작게 깡총 대자 단발머리가 위아래로 찰랑거린다.
“어떻게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죠?”
아닌데. 안 그렸는데.
제임스와 마리아가 날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내가 의도한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킴! 킴! 핫도그 가게에서 재료가 부족하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직원 하나가 날 부르며 뛰어왔다.
“핫도그 가게? 재료는 충분히 사 뒀을 텐데요.”
“빵을 담은 박스가 다른 장비에 깔리는 바람에···.”
구단 규모도 크지 않고, 아직 구단 체계를 정비하지 않았기에 이번 일은 내가 총괄하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하프타임까지는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좀 여유 있는 직원이··· 있을 리가 없구나.
“마리아.”
“네!”
“가죠.”
“네!”
마리아의 목소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씩씩해져 있었다.
*
마리아에게 남은 일을 맡기고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필드 위, 선수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2만 명이 꽉 들어찬 경기장을 올려다보았다.
전반전 종료까지 앞으로 1분. 보통 긴장을 풀 시간대임에도 많은 팬이 모인 경기장이라는 환경은 의욕이 없던 선수들에게도 끝까지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삐이이익!
심판의 힘찬 휘슬소리와 함께 전반전이 끝났다.
대학생 관중은 힘이 넘치는지 전반전이 끝났을 뿐인데도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었다.
제임스와 마리아의 말 대로 이들을 서포터로 만들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저들이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져야 한다. 원래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장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된다는 듯 얼떨떨해하는, 아직까지 응원가를 부르고 있는 저 ‘시즌권 구매자’들에게 다음 시즌 이상을 제시하는 게 내 목표였다.
두 가지를 다 잡으려다가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나는 지난주처럼 마이크를 들고 필드 위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재밌게 즐기고 계십니까?]
영국은 종이신문을 2020년이 넘은 지금까지 애용하는 나라였다. 나이 든 사람에게 여전히 SNS는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직접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이번 시즌 동안 마음고생 한 팬들을 위로해주고, 대접해주는 것까지 함께.
이 정도 행사에서 한 연설이라면 기사화도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당연히 기자들도 몇 불렀다.
[저는 저번 주부터 이 구단의 운영을 맡게 된 단장 겸 사장, 김도운이라고 합니다. 이 팀 유소년으로 8년 동안 뛰었었어요.]
<오오?>
처음으로 대학생들이 아닌 노팅엄의 골수팬들에게서 반응이 왔다.
“나 너 알아! 공격수였잖아!”
[···맞습니다. 여기서 프로 데뷔도 못 했었는데, 역시 노팅엄 팬들은 굉장하다니까요.]
몇몇 골수팬들의 외침에 나는 솔직히 놀랐다. 굉장하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아무튼, 내 말에 골수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손뼉을 쳐댔다.
우물쭈물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일만이 넘는 대학생 관중이 보였다. 나는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내 돈 투자해서 하는 행사니까 여러분도 박수 좀.]
그렇게 말하며 손뼉을 치는 시늉을 했다.
<와아아!>
<휘유~>
<멋지다!>
[왜 이런 행사를 열었는지 궁금하시죠?]
나는 숨을 크게 고르고 말했다. 구단이 골수팬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먼저,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시즌 팀이 큰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끝까지 서포터석을 지켜주신 멋진 팬들에게요.]
대학생들은 큰 환호를 보냈지만, 골수팬들은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여러분들은 이런 행사보다 선수 하나를 더 영입하시는 걸 좋아하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골수팬들이 그렇다고 소리쳤다.
[그래도 이렇게 활기찬 구장은 오랜만이죠?]
[평균관중 3,409명, 최근 열 경기 평균관중 약 2,500명. 이번 시즌의 기록입니다. 다음 시즌 목표는 앞으로의 기반을 쌓으며 시즌 최종라운드, 딱 일 년 후 평균관중을 두 배로 늘리는 겁니다. 오천 명이요.]
[그다음 시즌에는 승격할 겁니다. 다음다음 시즌에는 다시 팀 정비, 다음다음다음 시즌에는 승격. 우리는 2년에 한 계단씩 올라 6년 뒤에는 세계 최고의 리그, 프리미어리그에 도착할 겁니다.]
내 말이 계속될수록 관중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끝맺는 순간, 경기장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골수팬들이 먼저 입을 다물었고, 대학생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골수팬들은 당연히 의심할 거다. 우리 팀은 몇 년 전 이름을 빼앗기고 5부리그까지 떨어진 팀이니까. 이번 시즌에 4부리그에서 강등당할 뻔한 팀이니까.
‘겉은 뜨겁게, 속은 차갑게’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경영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내 말이 아마 불가능할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십 년 정도가 걸릴 것이다.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파격적인 목표로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할 때였다. 과거를 되찾는 걸 넘어서 1부 리그까지 올라가겠다는 팀의 이상을 그들의 머릿속에 새겨야만 했다.
실패한다면 엄청나게 조리 돌림 당하겠지만, 괜찮다.
적어도 나는 팀을 발전시킬 자신이 있었다. 미래에서 돌아왔으니까. 미래를 모르더라도 난 프리미어리그 급 경영자니까.
팀이 상승세만 탄다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팬들은 날 지지해줄 것이다. 운까지 따라준다면 목표도 달성하고, 내 명성도 올라갈 테고.
[훌륭한 감독, 훌륭한 코치진, 훌륭한 선수를 발굴해 다음 시즌에는 가능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럼.]
*
후반전이 시작한 후에도 관중은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곳곳에서는 김도운의 연설이 화젯거리였다.
“뭐야··· 저녁 먹으러 왔다가 신기한 걸 보고 가네.”
“그러게.”
“지금의 선수진으로 충분할까?”
“모르지. 좋은 감독을 데려온다면야···.”
“내 소견으로 볼 때, 지켜봐도 괜찮을 것 같아. 적어도 프리 시즌에는 보러 오자고.”
“좋은 감독을 영입해야 할 텐데···.”
배가 늘어난 유니폼을 입은 40대 아저씨 셋이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고,
“할아버지! 나 다음 시즌에는 맨날 올래! 저 아저씨 멋있어!”
“그래. 같이 오자꾸나.”
“휴고, 후회만 할 거다. 이번 시즌에도···.”
“이놈이?”
“아버지. 솔직히 저런 사탕발림에 넘어간다는 게···.”
“쯧. 열심히 하려는 사람을 응원하지는 못할망정, 나쁜 소리부터 하고 있으니··· 너는 리처드란 성 떼.”
리처드 삼대(三代) 또한 둘이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잭, 정말일까? 우리가 6년 만에 프리미어리그에 갈 수 있을까?”
“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음. 조, 나는 왠지 될 것 같은데···.”
“그럴까?”
“그랬으면 좋겠다.”
어린 세 명의 볼 보이 또한 그랬다.
“이런 식으로 팬들에게 보답하는 구단 본 적 있어?”
“엄마, 이런 거에 넘어가서 또 시즌권 사려고?”
“이번에는 진짜야.”
“무슨 도박하는 사람도 아니고··· 맨날 이번 시즌에는 잘 될 거야··· 이번 시즌에는 될 거야··· 에휴. 아빠, 어떻게 생각해? 그냥 웃지만 말고. 엄마가 그렇게 무서워?”
“전혀. 그럴 리가.”
엄마가 무섭냐는 말에 재빠르게 답하는 아빠와 눈을 부라리는 엄마. 그걸 어이없다는 듯 보고 있는 딸. 엄마가 경기를 보러 오니 결국 아빠도 끌려올 것이다. 딸은 아빠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경기장을 찾은 대학생들은
“멋지다···.”
“프리미어리그가 뭐야?”
“다음 학기에도 올까? 마야, 같이 오자. 어차피 주말에 할 거 없었잖아. 영국은 너무 심심해.”
“보다 보니까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음식도 맛있고.”
“얘들아 이거 봐. 이 팀 응원가 뮤튜브에 나온다. 전반전에 사람들이 부르는 거 보면 되게 재밌어 보이던데.”
“나 주소 보내줘.”
긍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수많은 팬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필드의 시계는 계속 돌아갔고, 노팅엄 FC는 마지막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했다.
이날, 노팅엄 FC는 새로운 전설의 첫 발자국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