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8화 (8/245)

3. 노팅엄호의 새 선장님 (2)

은은한 노란빛 조명이 벽에 새겨진 ‘포레스트(FOREST)’라는 글씨를 비추고 있었다.

맥주잔이 부딪히는 소리,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 테이블마다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뒤섞이고 있다.

나와 조이는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있었다. 펍에 노팅엄 FC 팬들도 많이 찾아오니 구석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냐는 사장님들의 배려였다.

조이는 다리를 꼰 채로 긴 검은 머리칼을 하나로 묶으며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하하하.”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지는 웃음소리였다.

“’같이 전설을 만들어봅시다?’ 하는 짓 보면 제임스랑 똑같다니까?”

“이럴 땐 오글거리는 멘트가 먹히거든.”

겉은 뜨겁게, 속은 차갑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먹혔어?”

“반쯤은? 모레 구단에 찾아오시기로 했어.”

“잘 됐다.”

말총머리를 완성한 조이가 고개를 흔들어 머리카락이 제대로 잘 묶였는지 확인한다. 좌우로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으니 조이의 말이 들려왔다.

“근데 있잖아.”

“응.”

“<노팅엄 푸드 페스티벌> 준비할 때 왜 안 불렀어. 사람 많이 부족했다며.”

망설임 없이 정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휴가 중이었잖아.”

“나 휴가 중에 집에 박혀있는 거 알잖아. 그리고 구단을 위한 행사에 참여 못 하는 걸 억울해할 거란 것도 네가 모를 리가 없잖아.”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지.

“아! 알렉스! 오랜만이에요!”

타이밍 좋게 조이의 아버지 알렉스가 맥주 석 잔을 들고 다가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데 가득 찬 맥주가 넘치지 않는 게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큰 덩치와 뱃살, 그리고 턱수염까지 잘 어우러진 완벽한 술집 주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는 이 가게의 공동사장이었다.

‘포레스트’ 펍은 조이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돈! 이게 얼마 만이야!”

“···아빠, 일 안 해?”

조이가 볼을 아주 작게 부풀리며 알렉스를 째려봤다.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알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조이의 옆에 앉았다. 나는 알렉스에게 맥주잔을 받아 들었다. 알렉스가 말한다.

“마지막 경기 재밌었어.”

“오셨었어요? 민망하네요.”

맞다. 조이네 가족도 시즌권 보유자였지.

“멋졌는걸.”

하하하고 소리 내서 웃으니 알렉스가 맥주를 홀짝이며 계속 떠들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자네가 마이크를 들고 섰을 때, 조이 반응이 어땠는지 알아? 자네가 돌아왔다고 글쎄···.”

“아빠.”

알렉스가 눈동자만 돌려 눈치를 슬쩍 보고는 말을 멈췄다.

“글쎄 다음 뭔데요?”

“돈. 우리 집의 평화를 깨지 마.”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맥주를 다 비운 알렉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말이야. 자신만만한 건 좋은데··· 정말 괜찮겠어?”

“예?”

“6년 안에 프리미어리그라니.”

“아.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만약에 실패하더라도 성과만 낸다면 욕하는 사람은 없겠죠. 잘해 볼게요.”

알렉스가 날 지그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 네 말을 진짜라고 믿는 서포터들은 별로 없다고.”

“고마워요.”

“20년을 본 아들 같은 놈인데 당연하지. 너 욕하는 놈들은 이 펍에 얼씬도 못 해.”

“와우, 펍이 안 망하도록 열심히 해야겠네요.”

알렉스가 크흐흐 하면서 웃었다.

그때 계속 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조이가 입을 열었다.

“아빠, 다 마셨으면 가요. 오랜만에 보는 친구라고요.”

“돈,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거 알아?”

대답 못 하고 웃기만 하는데 옆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쩔 수 있나, 기다리던 왕자님이 돌아오셨는데.”

“엄마!”

“안녕하세요.”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한 농담이라는 거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이를 꼭 닮은 사라와 가볍게 포옹하고 볼 키스했다.

“오랜만이에요. 도운. 함께 맥주라도 마시고 싶은데 오늘은 좀 바쁘네요.”

“얼굴만 봐도 좋은걸요.”

“어머, 말하는 거 봐. 다음에 꼭 와야 해요. 치즈 새우구이를 해 줄 테니까.”

가게 반대편에서 부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일어나요. 애들 방해하지 말고.”

“그래, 딸보다는 여보가 최고지.”

장난치면서 일어나는 야수 알렉스와 미녀 사라는 예전부터 금슬이 참 좋았다.

조이의 부모님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조이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도 내 결혼보다는 아빠랑 놀러 다니는 데에만 신경 쓰면 좋을 텐데. 당장 관심도 없는 거 왜 그렇게 성화 신지.”

“결혼 안 하게?”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우리나라는 요즘 서른다섯 넘어서 결혼하는 게 트렌드 거든.”

“그렇구나.”

알렉스 덕에 들떴던 분위기가 맥주를 홀짝일 때마다 가라앉았다.

“어디 살아? 호텔?”

“제임스 집에 얹혀살고 있어. 새집은 제임스가 알아봐 주고 있고.”

“다음에 놀 때 나도 불러. 요즘 따라 옛날 기분 좀 내고 싶으니까.”

“예이, 알겠습니다.”

“근데 용케 팀을 맡았네. 너라면 안 맡을 줄 알았는데. 자신 없다고.”

맥주를 뿜을 뻔한 걸 간신히 버텼다.

회귀 전에 그래서 거절했었지.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는지 조이는 금세 화제를 돌렸다.

“걱정이야.”

“옷도 못 챙겨입을 것 같고, 아침도 못 챙겨 먹을 거 같고··· 온갖 게 다 걱정이지?”

“엉.”

나는 오전에 사무실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며 답했고, 조이도 마찬가지인지 눈을 마주치자마자 서로 키득키득 웃었다.

“오전에는 미안. 네가 와이셔츠 구겨 입은 거 보니까 반사적으로···.”

“사무실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해?”

“재결합 안 하냐고 그러지. 너 멋있다는 말도 들리고.”

나는 그냥 웃었다.

“뭐가 멋있지?”

“너무하네.”

“재수 없게 여유 있네. 너 좀 나이 든 거 같다?”

“어··· 어.”

적당히 얼버무리니 조이에게서 또 걱정이 날아든다.

“잘 할 수 있겠어?”

“그럴 거야. 못하면 안 될 조건이거든.”

“못하면 안 될 조건? 그런 게 어딨어.”

“있어. 너무 조건이 좋아서 가끔은 여기가 꿈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야.”

두 번째 기회니까. 절대로 헛되이 쓸 수는 없었다.

“무서운 얼굴이네. 쓸데없는 참견을 했나?”

“아니야. 늘 고마워.”

우리는 말 없이 맥주만 마셨다.

펍의 소음이 우리 테이블을 대신 채웠다.

조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입을 열었다가 맥주를 홀짝였다가 입을 열었다가를 반복한다.

조이가 입을 연 건 맥주를 다 마신 후였다.

“앞으로 날 좀 편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 이제 직장에서 매일 볼 사이잖아?”

“···그래.”

“너랑 만났던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가끔 친구가 하나 사라진 것 같아서 슬플 때가 있어.”

“취했구나.”

“취했으니까 이런 소리 하지. 집에 가서 이불 뻥뻥 찰 거야.”

나와 조이는 마주 보며 웃었다.

“이제 가봐. 할 말 다 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들고 테이블을 떠나기 전 조이에게 말했다.

“내일은 내가 먼저 인사할게.”

조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가보라고 손을 휘적거렸다. 맥주를 더 마실 모양인가보다.

나는 조이의 부모님께 인사하고 펍을 나섰다. 출입구 밖으로 나오니 펍 안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한참 뒤에나 움직일 수 있었다.

*

한쪽 무릎을 꿇고 잔디를 만져보던 잭슨이 일어났다.

“잔디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프리미어리그에 내놔도 꿇리지 않는 전문가가 계시거든요.”

왜 그런 사람이 4부리그에 있냐는 질문을 하고 싶은 거 같아서 앞질러 대답했다.

“노팅엄시 출신이시라서요. 은퇴 전에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하셨다더라고요.”

“그렇군요.”

우리 구단에서 유일하게 보강이나 교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부분이 바로 잔디 관리 분야였다.

몇 년 전에 마지막은 노팅엄 FC에서 일하시고 싶으시다고 오셨다가···. 팀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실시간으로 겪으신 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줄 게 있다고···.”

새 감독 후보, 잭슨은 오전에 구단에 방문해서 훈련장과 훈련시설들을 봤고, 점심은 파머 부부에게 훈련식이 어떻게 나오는지 들으며 함께 식사하고 왔다.

“유소년 연습경기가 있는 날이거든요. 보여주고 싶은 선수가 몇 명 있어요. 마리아?”

“버스 막 도착했대요.”

“잘 보이는 곳으로 올라가시죠.”

유소년 감독에게 일정을 조절해달라고 부탁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유소년끼리의 내전을 오늘로 당겼다.

전화 내내 기합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였는데 내가 대대적으로 선수단을 개편할 거라는 소문이 구단에 돌아서 긴장한 모양이었다.

유소년 감독은 소심하지만, 전형적인 호인에 유망주를 잘 발굴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냥 오해한 채 두기로 했다.

유소년 감독과 코치 둘, 그리고 어린 티가 나는 선수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새 감독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지켜본다는 건 유소년 감독밖에 몰랐다. 그래서 감독 말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저기 세 명 뭉쳐있는 거 보이십니까? 동양인 백인 혼혈에 모범생같이 생긴 선수, 창백하고 키 작고 마른 선수, 머리에 스크래치 넣은 흑인 선수.”

“예.”

인류 대통합의 현장이었다. 황인, 백인, 흑인이 떠들며 들어오고 있었다.

“저기서 모범생이랑 스크래치 넣은 선수를 주의 깊게 봐 주십시오. 우리 구단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두 명이니까요.”

“제가 볼 때 별로면요?”

“감독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면 이해하겠지만···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시면 제가 생각한 것보다 감독님 눈이 낮은 거겠지요.”

“엄청난 자신감이군요.”

저 둘은 20대 초반에 국가대표에 승선할 선수들이니까.

선수들이 몸을 풀기 시작하자 감독이 허리를 펴며 집중했다.

20분간의 몸풀기가 끝나자, 감독이 입을 열었다.

“이름들이 뭡니까?”

“모범생은 로드 테일러, 스크래치는 할리 콕스입니다.”

“둘 사이에 있는 아파 보이는 선수는요?”

다 외워뒀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음 소리를 내며 머뭇거리는데 지원군이 나타났다.

“라이언 브라우니예요.”

“고마워요.”

“유소년들 프로필이요.”

마리아가 내가 부탁한 사진, 이름, 포지션이 간략하게 적힌 서류를 들고 있었다. 잭슨은 서류를 받아들고 인자한 미소로 웃었다.

나는 마리아에게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타이밍 좋았죠?”

휘슬이 막 울리며 유소년 선수들 간의 연습경기가 시작됐다. 선수들이 몸을 푸는 내내 내가 말한 두 선수 쪽을 바라보던 잭슨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킴, 라이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이언 브라우니, 회귀 전에 딱히 들은 적 없는 선수. 그렇다고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다.

나는 어제 읽었던 프로필 내용을 떠올리며 짧게 말했다.

“발기술이 좋은 괜찮은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체력을 많이 키워야겠지만요.”

“그렇군요.”

“로드와 할리만큼 확실한 유망주는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경기를 더 봐야 알겠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키우기 어려운 타입 같아 보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잭슨의 눈이 반짝이고 있다. 내가 전설을 만들자고 했을 때의 눈빛이다. 도전의식을 느끼는 건가?

로드와 할리를 보여준 이유는 빠른 계약을 위해서였다.

로드는 중앙수비수, 할리는 중앙공격수. 둘은 어느 전술에서도 코어가 될 수 있는 유망주였으니까.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목적지에만 도착하면 그만이다. 라이언한테 의욕을 느끼는 모습도 좋았다.

감독이 관심을 보이는 라이언은 중앙 미드필더였다. 그 또한 훌륭한 재목이라면 로컬 보이(팀 유소년 출신 선수)들이 전술의 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역시 도니 에요. 가장 열심히 뛰는 아이들을 알아봐 주는군요.”

마리아가 밝게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런 거로 해 두자.

잭슨의 호감도가 조금 올라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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