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노팅엄호의 새 선장님 (3)
삐익-!
“계약하겠습니다.”
30분 단위로 치러진 전후반 전이 모두 끝나자마자 잭슨이 한 말이다.
“저 세 명의 유망주와 프로 계약을 맺는 게 조건입니다. 다음 시즌부터 1군에서 쓰겠습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려도 되나 싶다.
사실 로드와 할리는 이미 계약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감독 덕에 한 명이 더 늘어났다. 훌륭한 감독이 찍은 선수다. 적어도 2부 리그 급까지는 커 주겠지.
감독과 새 선수를 동시에 얻었다는 사실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계약서를 건넸고, 잭슨은 변호사와 상담한 후 서명하겠다고 말했다.
계약이 된 거나 마찬가지여서 나는 기쁘게 이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노팅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잭슨은 택시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갔다. 나는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와 유소년 선수들이 훈련하는 걸 지켜봤다.
마리아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까부터 싱글벙글한다.
“열심히 뛰는 아이들이라고 했었죠? 유소년 선수들을 잘 아는 것 같던데···.”
“네! 관심이 많아서요.”
“그럼 아까 말한 셋에 관해서도 잘 아시나요?”
“어느 정도는요.”
마리아의 시선이 세 선수를 차례차례 훑었다.
“로드는 잔소리가 심한 엄마 같고요. 할리는 꾸미는 걸 좋아해요. 그리고 라이언은 겁이 많아요.”
선수들의 성격은 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보였다.
신기했다. 구단 홍보팀 출신 직원이 이렇게까지 선수들을 파악하고 있다니.
“어떻게 그런 걸 알아요?”
“일이 일찍 끝나면 유소년 경기 보는 게 취미거든요. 성인 선수들 훈련은 일하는 시간이랑 겹쳐서. 가끔 음료수나 간식도 사다주고 하다 보니까 친해졌어요.”
특이한 취미네, 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자 마리아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축구를 좋아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푹 빠졌죠.”
“직접 해 보진 않았어요?”
영국에는 여자축구리그가 있으니까.
“음··· 보여드릴게요.”
“네?”
한 계단만 내려가면 바로 필드였다.
마리아는 연습하다 굴러온 공을 양손으로 집어 들고, 공중으로 던진 후 발등으로 트래핑을 하려다가··· 볼을 밟고 넘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공이 발등에 있었는데 어떻게 공을 밟고 넘어진 거지?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보고 싶을 정도의 운동신경이었다.
마리아는 얼굴 하나 붉어지지 않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표정이 밝은 게 신기하다. 부끄러울 만도 한데.
“이래서 못했어요. 직접 하고 싶기도 했지만 보는 것도 좋아해서 딱히 불만은 없어요.”
“그렇군요.”
“그리고 예전부터 응원한 선수가 잘하면 내가 키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거든요. 노팅엄의 캡틴처럼요.”
마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자요.”
“왜요?”
“바지에 잔디 묻었어요.”
그제야 자기 꼴을 돌아본 마리아가 말했다.
“손으로 털어도 되는데.”
“써요.”
“감사합니다.”
마리아가 옷에 붙은 잔디들을 떼어냈다. 손수건을 돌려받으며 물었다.
“저녁에 약속 있어요?”
“없어요.”
“내가 저녁 살게요.”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가 오해한 것 같아서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세 명에 관해서 자세히 좀 말해주세요. 우리 팀에 꼭 남기고 싶어서요.”
마리아의 입이 열리는 것보다 내 말이 빨랐다. 마리아는 입을 다문 채로 끝까지 듣고는···.
“아, 네!”
힘차게 대답했다.
**
“이게 뭔가요?”
“프로 계약서입니다.”
구단을 맡게 된 후, 직접 선수와 계약 얘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흠칫하고 놀라는 게 애다웠다.
동양계 느낌이 강한 혼혈, 단정하게 빗어넘긴 검은 머리와 각진 턱이 마리아가 이야기했던 그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꼼꼼하고 주변 선수들을 잘 챙긴다고 했었지. 학교에서도 늘 성적이 좋은 학자 유형이기도 하고.
“로드 테일러. 당신과 계약하고 싶습니다. 핵심만 말하자면, 4년 계약에 4부리그 평균 급 주급을 보장하고, 승격 시 급료 20% 인상 조항이 있습니다.”
어른스러운 성격이라 해도 나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로드 테일러는 한국 나이로 고3 정도 되는 어린애였다. 계약서를 보자마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게 보였다.
“읽어보세요.”
눈이 나와 계약서를 빠르게 왔다 갔다 하는 걸 지켜보다가 말했다.
로드가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느긋하게 로드와 내가 마실 홍차를 탔고, 로드에게 내밀었다. 로드는 나이 든 노인처럼 씁쓸한 차를 즐긴다고 했다.
읽는 속도가 빠른지 로드는 차가 식기도 전에 계약서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찻잔을 집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조항이 궁금한데요···.”
“아, 이건 말이죠.”
거의 30분 동안 로드의 질문을 받고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증을 해결한 후에야 로드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됐다.
“집에서 더 읽어봐도 되고, 변호사에게 상담받아도 돼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건을 하나 추가해도 되겠습니까?”
단어나 어휘 사용이 무척 공손한 선수였다. 나중에 팀의 주장을 맡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말씀해보세요.”
“캡틴이 은퇴했을 때 등 번호를 받고 싶습니다. 조항에 꼭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알렉산더? 19번을요? 스트라이커 등 번혼데.”
“꼭 부탁드립니다.”
로드 테일러는 중앙수비수다. 회귀 전에도 중앙수비수로 국가대표에 갔고.
“포지션을 바꾸고 싶나요?”
“아뇨! 그냥 등 번호만···.”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선수인데 1~11번 중 하나도 아닌 19번이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추가해서 새로 뽑죠.”
“그리고··· 할리와 라이언은···.”
“오늘 다 불러서 계약서를 줄 생각입니다. 주급은 전부 똑같습니다.”
로드는 가볍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셋이 함께하고 싶었군요.”
“호흡이 정말 잘 맞거든요.”
로드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네?”
“안 그래도 세 선수에게 노팅엄의 미래를 맡기려고 했거든요.”
무슨 소리냐는 듯 날 빤히 바라보는 로드는 이제야 나이대에 맞는 소년 같았다.
“제가 6년 안에 프리미어리그에 간다고 말했죠?”
“아, 예···.”
“세 선수가 그 프로젝트의 중심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세 선수는 모두 국가대표에 갈 재목이거든요.”
“저희가요?”
“네. 셋 다 프로 경험이 쌓이면 실력이 급상승하는 타입이라 당장 와닿지는 않을 겁니다. 1부 리그에서 제안이 온 적도 없을 테고···. 아무튼, 내년이 되면 제 말이 뭔지 이해할 겁니다.”
라이언은 잘 모르겠지만, 두 명은 확실하니 상관없겠지.
“새로 모신 감독님도 세 명을 콕 짚었습니다. 그러니까··· 꼭 계약했으면 좋겠네요.”
선수를 인정해줄 때는 호들갑 떨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는 게 좋다. 그래야 더 진정성 있게 들리니까.
그리고 내 말의 결과는···.
“부모님이 반대하더라도··· 꼭 계약서에 서명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성공적이었다.
*
“역시, 이걸 줄 알았어요.”
할리 콕스에 대한 마리아의 평가는 간결했다. 자존감 덩어리, 관심종자. 친목왕.
보통의 흑인보다 두꺼운 입술에 반삭 머리, 오른쪽 옆 통수에는 나무 모양의 스크래치를 새겼다. 할리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할리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할리가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사인하고 있었다.
“야, 야. 너 미쳤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억양이 세니 할리가 놀랐는지 움찔하며 멈췄다.
“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사인해?”
일단 계약서를 뺏었다. 회귀 전, 부당계약으로 고생하는 선수들을 많이 봤다. 재능있는 선수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생각보다 아주 쉬웠다.
내 말이 험악해서 그런지 할리는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아 맞다. 마리아가 그랬지. 얘 은근히 겁 많다고.
“로드가 부모님께 보여드린다고 했는데, 계약서가 이상할 리 없잖아요.”
대신 회복도 금방 한다고 했다. 어느새 목소리가 씩씩해진 할리에게 말했다.
“로드도 아직 계약 안 했는데 그걸로 충분해?”
“네. 로드가 부모님께 보여드린다는 건 계약서에 이상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이상한 신뢰였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다시 계약서를 내밀었다.
“너 그러다 나중에 사기당한다. 똑바로 읽어봐.”
귀찮아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나는 계약서를 한 장 넘긴 후 중앙 부분을 가리켰다.
“특히 이 부분을 봐.”
SNS 라는 익숙한 단어를 봐서 그런지 애 눈이 점점 가늘어지고 있다. 드디어 제대로 읽을 마음이 들었나 보다.
“SNS를 통해 구단의 이미지에 손해를 입혔을 때, 구단은 급료 정지 징계 및 손해배상 청구를···.”
할리용 특수 조항이었다.
마리아가 할리가 SNS를 좋아한다고 해서 좀 살펴봤는데··· 이 자식 나중에 사고 칠 것 같은 느낌이라 조항을 꼭 넣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음···.”
“그래도 바로 계약하게?”
“제가 프로에 데뷔하면 언론이 막 따라붙겠죠?”
“응?”
“로드한테 저희 셋 모두 국가대표급 재능이 있다고 했다면서요.”
“그랬지.”
“좋아요. 계약할게요.”
“야, 잠깐.”
SNS가 아니라 신문과 뉴스로 놀 생각인 건가. 나는 계약하겠다는 녀석을 말리는데 진땀을 뺐고, 나중에 로드까지 불러 언론 관련 조항을 추가하고 나서야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
-부··· 부모님 모셔오면 안 돼요?
“당연히 되지.”
-로드랑 할리는요?
“데려와.”
세 유망주 중 마지막 선수와 계약하기 전 했던 대화였다.
로드는 서명한 계약서를 들고 찾아왔고, 할리는 클럽에서 놀다 온 건지 옷이 자유분방했다.
나랑 일대일로 앉아있는 게 불안한지 자꾸 뒤를 쳐다보는 라이언은 백인이라도 그렇지 지나칠 정도로 창백한 녀석이었다.
키는 160cm 중후반 가량, 많이 쳐줘야 간신히 50kg을 넘길 것 같은 삐쩍 마른 몸까지. 유소년 자료에 따르면 병치레마저 잦다고 했다.
괜찮은 걸까···.
뭐, 감독과 미래의 프랜차이즈 스타들께서 원하니까 선수 하나 정도야.
“라이언이 프로로 뛸 수 있을까요?”
라이언의 부모님들조차 걱정할 정도다.
“이전에 했던 구단 메디컬 자료를 살펴봐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숨긴 병이라던가···.”
“아뇨. 없어요. 그냥 애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겠네요. 계약만 한다면 구단에서 최선을 다해 관리하겠습니다. 새로 부임하는 감독님이 가장 큰 흥미를 보인 선수라서요.”
얌전히 있던 라이언이 정말이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는 로드와 할리의 반응도 미묘하다. 로드는 조용하게, 할리는 대놓고 눈썹을 꿈틀대고 있다. 그래, 친구라 해도 라이벌 의식이 없을 수 없지. 선의의 경쟁을 해서 더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다.
“정말입니다. 원한다면 감독님과 통화도 시켜줄 수 있습니다.”
계약 때 자신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연락 달라고 했었다.
“저, 그럼, 통화하고 싶은데···.”
“잠시만요.”
나는 잭슨에게 전화를 걸었고, 라이언에게 스마트폰을 넘겼다.
라이언은 스마트폰을 소중한 듯 귀에 꼭 댔다. 통화는 짧았다.
“예, 예··· 감사합니다. 예··· 그렇군요.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나중에 잭슨한테 물어봐야겠다.
“어디다 서명하면 되죠?”
지금은 세 개의 계약서에 잭슨의 계약서까지 처리해야 하니까.
***
<2023-24 프리 시즌 1주 차 구단평가서>
(중략)
*감독 : F -> C(장래 S)
*코치진 : E(진행 중)
*1군 선수단 : E -> D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