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16화 (16/245)

5. 칼 슈나이더 (3)

칼 슈나이더와의 가벼운 인사 후에 점원에게 슈니첼을 하나 주문했다.

칼과 일대일로 만나는 건 계약을 제안하러 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조용한 식사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구단 소속인데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말을 건넸다.

“여기 자주 와?”

“예.”

“고향 음식이라 그런가? 오스트리아에서도 슈니첼이 흔하지?”

“예.”

“도시는 마음에 들어?”

“그럭저럭요.”

“감독은? 선수들은? 직원들은? 팬들은?”

“나쁘지 않아요.”

단장과 선수라는 관계를 넘지 않는 사소한 질문들을 던졌고, 칼은 짤막하게 대답해줬다.

나는 먼저 나온 빵을 입에 넣으며 질문을 멈췄다. 칼이 먼저 묻진 않았기에 테이블에는 조용히 식사하는 소리만 남았다.

제임스가 늘 시끄러워서 그런지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잠깐 딴 곳을 보고 있는데 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일어를 잘하시네요.”

의외였다. 마리아와 잭슨의 얘기에서나 회귀 전의 모습이나 칼은 먼저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내 입가는 웃고 있었다.

“내가 극동아시아 출신인 건 알지?”

“예.”

“유럽인도 아닌데 여기서 일하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 하거든. 그래서 배운 것 중에 하나야.”

사실 독일어는 회귀 전, 벨기에에서 지내면서 배운 거였다.

칼은 잠시 날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더 질문하지 않았다. 마침 슈니첼이 나와서 나도 먹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칼과 눈이 마주쳤다. 칼 앞의 접시는 비어 있었고, 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칼의 입술이 달싹거리기만 했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칼을 기다렸다.

“별거 아닌 얘긴데요.”

“편하게 얘기해.”

“킴은 여기서 쭉 산 건가요?”

“아니? 왔다 갔다 했지. 노팅엄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럼, 킴은 지역을 옮겨 다닐 때마다 친한 사람을 만들었나요?”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열두 살에 영국으로 이사 왔을 때는 제임스와 조이를 만났다. 한국에 다시 돌아갔을 때는 대학교 동기들이 있었고, 군대에서도 동기가 있었다.

하지만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없었고, 회귀 전 벨기에로 넘어갔을 때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술 한 잔 편하게 마실 상대가 없었다.

“친한 사람의 기준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있던 적도 있고, 없던 적도 있어.”

“있을 때가 편했나요. 없을 때가 편했나요?”

“둘 다 장단점이 있어서. 그래도 있는 편이 좋았던 것 같아.”

느긋한 어조로 말했지만,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다.

왜 이런 걸 물어보지? 마리아의 말대로 외로움을 타나? 향수병은 안 되는데. 좋은 선수로 만들어서 바이아웃 가격에 팔아야 한다고.

칼은 고개만 끄덕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본인도 모르는 것으로 보였다.

칼은 로드, 라이언, 할리보다 한 살 많은 만 18세였다. 한국에서는 수능을 준비하거나 막 대학생이 됐을 나이였다.

막 성년이 된, 애와 다름없는 나이. 그런 애가 더 어린 시절부터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벨기에로, 벨기에에서 영국까지 왔다는 건··· 음. 참 힘들었을 거다. 아주 잘 알지.

망했다.

다음 시즌에 떠날 선수와 정을 붙이면 안 되는데, 어릴 때의 나와 이 녀석이 겹쳐 보인다.

나는 회귀 전의 칼과 계약 당시의 칼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왜 영입했는지 알아?”

“예?”

“비싸게 팔려고.”

“···예?”

“너도 우리 팀에서 경력 쌓아서 빅클럽으로 가려고 온 거였지?”

이렇게 직설적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칼은 머뭇머뭇 답했다.

“···그렇긴 하죠.”

“너는 네가 지금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생각해?”

“2부리그요.”

회귀 전 칼은 자기 실력에 자신감이 넘치는 인터뷰를 많이 했었다.

시즌 개막 인터뷰에서는 ‘실력대로만 한다면 이번 시즌은 문제없을 겁니다.’. 첫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앞두고는 ‘저는 저를 믿습니다. 전혀 긴장되지 않습니다.’ 같은.

또한, 벨기에의 하부리그를 전전했을 시기를 떠올리며 이런 말도 했었다.

‘그 시절의 저는 당연히 분데스리가(독일 1부 리그)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곧 떠날 팀, 곧 떠날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적응할 수 있겠나. 노팅엄에 머무르는 한 시즌을 의미 없는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네 목적도, 내 목적도 같아. 다음 시즌이면 너는 상위 리그의 팀으로 이적하겠지. 그래서, 여기 있는 시간이 아까울 수도 있어. 나도 너한테 굳이 정 붙여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거든.”

하지만 난 회귀 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쓸모없는 하루는 절대로 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하루하루를 늘 최선을 다해서 아니, 적어도 즐겁게는 보내야 한다.

“하지만 굳이 일부러 외로워질 필요가 있을까?”

계속됐던 직설적인 말에 고개를 숙인 채 빈 접시만 보던 칼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칼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는데 적어도 너랑 같이 영입한 선수들이랑 유소년 3인방은 너랑 재능도 비슷하고, 성격도 좋은 녀석들이야. 친해져서 나쁠 거 없잖아?”

“···.”

“또, 우리 노팅엄은 10년 안에 챔피언스리그에 당연히 출전하는 구단이 될 거야. 나중에 네가 돌아오고 싶은 구단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 대단한 곳에서 너드처럼 살 필요는 없잖아?”

칼이 처음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서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아서 선수 쳤다. 할 말은 다 했거든.

“아무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런 거나 걱정할 정도로 여린 줄 알았다면 이것저것 신경 써 줄 걸 그랬네.”

“전혀, 안 여린데요.”

여리다는 말이 기분 나빴는지 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나이대에 맞는 모습으로 보이는 게 참 신기했다.

“푸드 코트에 브라트부어스트(오스트리아식 소시지)나 노케를(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대형 수플레)이라도 입점시켜볼까? 예상보다 관중이 늘고 있어서 가게 수를 늘릴까 했는데.”

“···정말요?”

“이것 봐, 여리잖아.”

칼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헛웃음은 10대의 소년다운 쾌활한 웃음소리가 돼 식당을 가득 채웠다.

나와의 짧은 대화로 칼의 태도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말 한마디로 거의 스무 살 먹은 애가 바뀐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니까. 세상일이 그렇게 쉬웠으면 나도 회귀 전에 말만 하고 다녔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칼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트렌트 대학교의 학생이자 노팅엄 FC의 경기장에 꾸준히 출석하고 있는 마야는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보고 있었다.

[팬 여러분, 오늘은 기쁜 소식을 가져왔어요.]

화면이 움직여 김도운이 어색하게 들고 있는 트로피 두 개를 잡았다.

[EFL 리그 2(4부 리그) 8월 이달의 감독상과 이달의 선수상이 모두 우리 노팅엄 FC로 왔습니다! 이건 정말 기뻐해도 되는 일이에요! 돈, 좀 더 기뻐해요.]

김도운 : 와아.

[그리고 드디어! 칼 슈나이더 선수가 노팅엄 TV에 출연합니다!]

“와우.”

마야는 생각 없이 영상을 보다가 감탄사를 흘렸다.

감독 잭슨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칼 슈나이더가 김도운에게서 트로피를 건네받았다.

더불어 늘 조용하고 무표정하던 이미지의 칼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김도운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어색한 영어로.

칼의 영어 발음과 웃는 모습을 처음 본 마야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칼의 인사를 받은 김도운의 반응이 이상했다. 독일어로 대답하다가, 뒤늦게 흠칫하더니 영어로 다시 인사한다.

“왜 저러는 거지?”

그때 진행자가 이 상황을 설명해줬다.

[놀랍네요. 슈나이더는 훈련 때를 제외하고는 영어를 쓴 적이 없었거든요.]

칼은 김도운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둘은 독일어로 대화를 나눴다. 무슨 말인지는 김도운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김도운 : 음··· 노팅엄 FC의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다는데요. 연습해왔대요.

[정말요? 자, 슈나이더, 이리 와요.]

칼이 화면 중앙에 나왔다.

칼 슈나이더 : 안녕하세요. 칼 슈나이더입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여기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색한 발음이었지만, 또박또박 발음하려는 노력이 느껴졌다. 마야는 순간 찡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칼을 경기장에서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돌아오는 길에 감독 잭슨이 평소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어깨를 두드려줬다. 손주를 기특해하는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칼은 이상하게 뿌듯한 기분으로 라커룸에 들어섰다.

“와, 이달의 선수상이잖아. 축하해.”

그동안 자신의 건조한 반응에도 끈질기게 말을 걸어줬던 라이언이었다.

축하한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칼은 Thank you 라고 작게 답했다.

라이언이 굳었다.

그동안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기에 칼은 머쓱하게 웃고, 라이언에게 연습해왔던 말을 했다.

“영어를 배울 거고, 몇 개월이면 대화가 가능할 거야.”

앞으로도 말 많이 걸어주면 좋겠다고 말하려다가 이건 너무 나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뒷말은 필요 없었나 보다.

라이언이 허둥지둥 할리가 붙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빼앗더니, 열심히 터치해 자신에게 보여줬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제가 없으면 얘네한테 말하세요. 좋은 친구들이에요.

독일어로 번역된 라이언의 말을 보고, 라이언의 시선을 따라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로드와 스마트폰이 없어져 불안증세를 보이는 할리를 보았다. 요즘 번역기는 성능도 좋구나. 칼이 미소로 답하자, 그들을 지켜보던 다른 선수들까지 몰려들었다.

“그동안 말 안 했던 건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거지?”

“저번 경기에서 했던 개인기 좀 알려줘.”

“너 개인훈련 어떻게 해?”

칼은 이달의 선수상을 받을 정도로 팀에서 인정받고 있었기에 다른 선수들도 칼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칼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선수 하나하나와 인사했다.

이달의 선수상을 축하하는 노래까지 같이 부른 후에야 빠져나온 칼은 라커룸의 구석에서 축구화의 밑창을 점검하고 있는 한 선수에게로 향했다.

“그동안 챙겨주신 거 감사합니다. 이제는 스스로 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건 다 이 사람 덕분이었다.

축구화가 안 보여 헤매고 있을 때 장비관리사에게 말해 가져다주었고, 감독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 조용히 다가와 그림으로 설명해주곤 했었다.

그는 삼십대 중반의 노장이었지만, 팀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선수이기도 했다.

주장, 알렉산더는 옅게 웃으며 칼에게 답했다.

“노팅엄에 온 걸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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