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0년 전, 노팅엄에서 있었던 일 (1)
새가 지저귀는 아침, 모처럼 여유가 생겨 훈련장 벤치에 앉아 멍하니 훈련장을 바라보고 있다.
어린 시절 저곳에서 뛰었던 걸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 보았다. 훈련장에 선수 하나가 들어오는 바람에 깨어나야 했지만.
훈련 시작 한 시간 전, 이 시각에 올 선수는 뻔했다.
“샌더스, 아니 캡틴, 변한 게 없네요.”
내 얼굴을 알아본 알렉산더가 흠칫했다.
190cm의 거대한 키에 바바리안 전사처럼 각진 얼굴을 가진 사람이 몹시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저녁 한 번 먹자니까 왜 자꾸 도망치세요.”
왜 그러는지 이해는 하고 있지만, 놀리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다.
잠깐 옛날얘기를 해 보면, 영국 축구계에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고, 부조리가 만연한 우리나라의 군대와 비슷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축구계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며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내가 유소년으로 있을 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문화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우리 구단에는 성인 선수가 유소년 선수의 튜터가 되어주는 제도가 있었다. 구단의 운영진이나 팀을 거쳐 간 감독들은 성인 선수가 유소년 선수에게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상 성인 선수에게 심부름꾼 하나를 붙여주는 식으로 운영됐었다.
나는 이 구단 유소년 출신이었고, 알렉산더는 구단에 막 영입된 젊고 실력 있는 선수였다. 나는 공격수였고, 알렉산더도 공격수였다.
알렉산더는 내 튜터였다.
알렉산더는 훈련에 매일 한 시간 일찍 왔고, 제대로 쉬지도 않고 매일같이 훈련했다. 그를 튜터로 둔 나는 피 같은 주말에도 제임스보다 한 시간 일찍 훈련장에 나와야 했다.
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아무튼, 알렉산더와 나는 오랜만에 만난 군대 선임과 후임 같은 관계였다.
“여기 앉으세요. 아니면 오랜만에 훈련이라도 도와드릴까요.”
“됐다. 꼬마야.”
알렉산더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내 옆에 앉았다.
“그 호칭 오랜만이네요. 근데 지금은 꼬마 아닌데요. 거기에 나이도 네 살 밖에 차이 안 나는데.”
“너 그때 작았잖아.”
열여섯까지 키가 160cm 초반대에 불과했던 나는 열일곱 살 무렵에 20cm 정도 급격하게 자랐다. 몸의 균형이 급격히 바뀐 탓에 정말 고생했었는데.
옛 추억을 떠올리고 있으니 알렉산더가 말을 걸어온다. 완벽한 푸념 조다.
“너랑 제임스 볼 때마다 흠칫흠칫한다.”
“하하하. 저도 제가 돌아올 때까지 캡틴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요. 다른 선수들이 캡틴을 어려워하거나 존경하는 거 보면 엄청 신기하다니까요.”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알렉산더는 고집이 세고 말수가 적은 20대 초반의 선수였다. 나이 많은 선수들이 놀려먹기 좋은 그런 선수였는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어느새 그의 고집과 적은 말수는 무게감이 되어 있었다.
“근데 왜 부른 거냐. 슬슬 몸을 풀어야 하겠는데.”
“아, 별건 아니고요. 선수들의 불만이나 제안 같은 거 많이 듣죠? 꼭 캡틴에게 말한 게 아니라도.”
“그렇지.”
“감독님의 권한을 넘는다 싶은 건 다 저한테 알려주세요. 완벽하게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다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겸사겸사 옛날얘기도 좀 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여기 있을 때 있었던 선수는 캡틴밖에 없으니까.”
프로 선수가 이적하는 건 아주 당연하고도 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로컬 보이가 사랑받는 것이고, 팀에서 오래 뛴 프랜차이즈 스타는 신처럼 받들어지는 것이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하나 있었어요.”
“말해 봐. 이제 정말 시간 없어.”
“강등당했을 때 했던 인터뷰 아직도 진심이죠?”
2부리그에서 5부리그로 강등당한다는 게 확정된 순간, 알렉산더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노팅엄 팬들의 마음을 달랬다.
‘나는 노팅엄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다시 이 리그로 돌아올 때까지 노팅엄과 함께하겠습니다.’
유벤투스의 델 피에로나 파르마의 루카렐리처럼 알렉산더는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해서 팀에 남았다.
알렉산더는 본래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선수였기에 노팅엄 팬들에게는 더 깊은 감동으로 남아 있었다.
회귀 전에도 알렉산더는 팀이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팀을 지킨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걸 알지만, 직접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노팅엄 푸드 페스티벌>이었나?”
“아··· 네.”
“그때, 네 목표를 들었을 때 정말 기뻤다. ······아무튼, 시간 다 됐다. 훈련하러 간다.”
“예. 열심히 하세요.”
직접적이지는 않았지만, 더할 나위 없는 대답이었다.
벤치에 앉아 여운을 즐기고 있으니 훈련장으로 차례차례 들어오는 네 선수가 있었다.
네 선수는 한창 몸을 풀고 있는 알렉산더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캡틴.”
“조, 조좋은 아침입니다. 캐, 캡틴.”
“안녕하세요. 킴은 여기서 뭐 해요.”
“좋은 아침입니다. 킴”
라이언, 로드, 할리, 칼 순서였다.
그냥 구경하러 왔다고 대답하자 네 명은 알렉산더 주변으로 쪼르르 몰려갔다.
나는 그중 하나, 할리를 붙잡았다.
“로드 왜 저래?”
말을 더듬는 건 라이언의 전매특허였는데.
할리는 익숙하다는 듯 말했다.
“쟤 알렉산더 광팬이거든요. 같이 뛰는 선수면서 아직도 저런다니까요. 완전 애 같아요. 애.”
쯧쯧 하고 혀를 찬 할리가 선수들에게로 떠났다.
**
“마리, 오늘은 뭐 찍어요?”
“너희 둘이 마주 앉아서 내가 물어보는 거 답해주고, 너희들끼리 떠들면 돼.”
훈련장 잔디밭 위에 테이블을 막 옮겨놓은 마리아가 답했다.
“이상한 질문 안 할거죠?”
“이상한 질문이 재밌지. 아, 마리, 얘 안 그런 척하면서 야한 거 엄청나게 좋아하니까 그런 질문도···.”
“미친놈이.”
로드의 물음에 할리가 대신 답한 후, 로드의 주먹을 피했다.
마리가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고 말했다.
“둘은 참 사이가 좋다니까. 자, 카메라 세팅 끝났어. 10분 정도만 수고해줘.”
“네에.”
“첫 번째는 간단한 것부터.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누군가요? 하나, 둘, 셋.”
“니콜라스 마카키스요. 잉글랜드 출신 스트라이커들의 우상이죠.”
할리는 망설임 없이 답했고,
“알렉산더! ···샌더스요.”
로드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왜냐면 그 알렉산더 샌더스가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가 완전히 지나간 후에야 할리가 말했다.
“우리한테는 맨날 잔소리하는 게 알렉산더만 보면 이런다니까요.”
알렉산더의 뒷모습을 카메라로 담던 마리아가 카메라를 되돌리며 물었다.
“왜 팬이 됐다고 했었지?”
“그거, 뭐였지. 아!”
로드가 고개를 열성적으로 저으며 할리의 입을 막았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할게요.”
로드가 정말로 곤란해하는 걸 눈치챈 마리아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꺼냈다.
“다음에 꼭 얘기해줘. 그럼 두 번째 질문, 어떤 장르의 AV를 주로 보나요?”
“마리!”
**
“로드! 붙지 마! 커버! 커버!”
알렉스의 외침을 들은 로드는 뒷걸음질로 상대 공격수가 침투하려는 공간 뒤에 자리를 잡았다.
서른한 살의 베테랑인 알렉스 화이트와 열일곱 살의 로드 테일러. 평균 실점 0점대를 유지 중인 노팅엄 FC의 주전 중앙수비수 듀오였다.
효율적인 움직임에 상대의 공격형 미드필더는 머뭇거렸고, 그 틈에 모처럼 교체로 출전한 라이언이 깔끔한 태클로 공을 빼냈다.
살짝 빗맞은 공은 굴러서 로드의 발로 향했다.
로드는 평범한 중앙수비수가 아니었다.
로드는 직접 공을 몰고 공격수 하나를 제치고, 라이언과 터치하듯 라이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막아!”
리그가 어느 정도 진행됐기에 상대 팀도 로드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로드는 언제든지 전진할 수 있는 무척 공격적인 중앙수비수라는 걸.
로드는 상대 미드필더들이 자신을 막아설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상대 페널티박스 근처에서 수비수를 등진 채 자신과 눈이 마주친 선수를 향해 높이 공을 띄웠다.
알렉산더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로드가 쏘아 올린 공은 높이 뛰어오른 알렉산더의 머리에 스치듯 맞으며 할리의 발 앞으로 떨어졌다.
“좋아!”
수백 번을 연습했던 패턴이었고,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기에 로드는 플레이를 멈추고 소리쳤다.
할리는 공이 떨어지기도 전에 발을 갖다 댔고, 할리의 발등에 얹힌 공은 뻥, 소리를 내며 쏘아져 골포스트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저 얼간이가! 잡고 차면 되잖아!”
로드가 빽 소리를 지르자 할리가 미안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앞서갈 수 있는 기회였는데, 격하게 아쉬워하는 로드의 눈에 알렉산더가 엄지를 드는 게 보였다.
그래, 못 넣을 수도 있지. 할리가 차서 다 넣을 수 있는 놈이었다면 우리 팀은 1위를 달리고 있겠지.
발걸음이 가벼워진 로드는 빠르게 제 자리인 중앙수비수로 돌아갔다.
*
“너 갑자기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로드의 말에 수비 파트너 알렉스는 더 물으려다가 코너 플래그에 공을 세우는 상대 미드필더를 보고는 급히 말했다.
“빨리 자리 잡아. 이번 코너킥도 잘 막아보자.”
“예.”
잘하고 싶다. 더 잘하고 싶다.
로드는 자신이 마크하기로 한 가장 키가 큰 공격수 옆에 붙었다.
“좀 꺼져라. 작작 좀 달라붙어.”
로드에게는 프로로 데뷔한 이후, 경기 중에 하는 행동이 하나 늘어났다.
데뷔전 때 일어났던 사건 때문이었는데 경험이 적었던 로드는 상대 공격수에게 ‘어젯밤에 너희 엄마···.’ 어쩌고 하는 욕을 듣고 잔뜩 흥분해 버렸고, 실점으로 이어지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성격이 전혀 얌전하지 않은 로드는 다음 경기부터 ‘트래쉬 토크(Trash talk, 상대 선수가 제 플레이를 하지 못하도록 말로 견제하는 것)’를 자신이 먼저 시도했다.
트래쉬 토크는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특히 자신이 당했던 대로 가족 욕을 하면 공격수들은 쉽게 흥분했고, 동작이 커져 수비하기 쉬워졌다.
지금처럼.
“네 엄마나 아빠한테 달라붙는 것보단 낫잖아?”
“뭐? 이 자식이?”
공격수가 어깨로 로드를 밀쳤다. 로드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삑! 삑삑!
“더 거칠게 하면 파울이야. 알았어?”
“아이고 아파라.”
심판에게 엄살을 부리는 로드를 본 공격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는지 몸을 홱 돌려 심판에게서 멀어졌다.
“바른말 사나이가 웬일이래.”
“효율적이거든.”
코너킥 수비를 위해 들어온 할리의 말에 적당히 대꾸한 로드는 다시 그 공격수에게 바짝 붙었다.
공격수의 두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좋아, 내 페이스대로다. 꼭 이겨야지.’
**
“로드가 어디 다쳤나요? 왜 갑자기 교체한 건가요?”
모처럼 원정에 따라왔고, 노팅엄도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드가 실수를 연발하다가 잭슨에게 교체당했다.
그리고 팀은 종료 직전에 실점해서 1-0으로 졌다.
나는 로드가 무슨 부상이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원정 버스 앞에서 담배를 피는 잭슨에게 물었다.
“참나.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부상은 아닌 거죠?”
“예. 부상은 아닙니다.”
“어이가 없다는 건 무슨 말인가요?”
“캡틴한테 혼나더니 혼이 쏙 빠졌어요.”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독일어였다. 칼 슈나이더와 라이언이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로 다가와 있었다.
칼은 간단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줬다.
코너킥 몸싸움 중에 로드가 상대 공격수에게 갖가지 패드립을 날리는 걸 알렉산더가 봤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코너킥이 끝나자마자 로드에게 다가가서
‘얄팍하고 비겁한 방식이다. 적당히 해라.’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 듣고 표정 굳어지더니 실수 연발하기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