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0년 전, 노팅엄에서 있었던 일 (2)
“별 지랄 같은 일이 다 일어나네.”
“예?”
“아니야. 알려줘서 고마워.”
첫 마디는 한국어로 했기에 아무도 못 알아들었지만, 내가 황당해하고 있다는 건 알아본 것 같았다. 잭슨, 라이언, 칼이 어색한 웃음을 머금은 채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주장이 한마디 했다고 경기력이 망가지는 게 말이 되나 생각하다가, 로드가 알렉산더를 대할 때 긴장했던 것, 할리가 말했던 ‘쟤 알렉산더 광팬이거든요.’, 그리고 로드의 계약서에 알렉산더의 번호를 물려받겠다는 조항을 넣었다는 게 생각났다.
노팅엄 TV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수로 알렉산더를 뽑은 건 덤이었다.
나는 로드의 친구 라이언에게 물었다.
“그렇게 팬이야?”
“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렉산더 얘기만 했었어요. 같이 뛸 수 있게 된 요즘은 더하고요.”
······이해는 갔지만 납득은 안 간다.
“그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자기 우상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건 다른 문제긴 합니다. 그 대단했던 키엘리니도 말디니에게 멱살 잡히고 울지 않았습니까.”
잭슨의 변호를 들으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감독이 이렇게 이해해준다면 괜찮겠지. 어차피 내가 걱정해봤자 과한 참견일 뿐이니, 나는 로드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고 이들에게 인사한 후 노팅엄으로 먼저 복귀했다.
**
로드의 부진은 계속됐다.
자신이 마크해야 하는 선수를 놓치거나 성급하게 태클하는 등 다양한 실수를 저지르며 팀의 3연속 무승을 이끌었다. 마지막 경기에서는 중앙 수비수로서는 드문 45분 교체라는 수모를 당했다.
선두권을 바짝 추격하던 노팅엄의 성적이 8위로 떨어졌으나, 어차피 이번 시즌 목표는 승격이 아니었기에 나는 매일 명상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벌써 11월의 절반 정도가 지나가고 있었고, 슬슬 다음 시즌 영입할 선수 리스트를 작성해야 했다.
회귀 전 기억과 수석 스카우트가 가져온 현재 정보를 종합해 목록을 짜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웬일이야?”
어색한 영어를 쓰면서 들어온 건 18경기 6골 10어시스트에 빛나는 오스트리아산 크랙, 우리 팀의 자랑, 천만 파운드, 이번 시즌 최고의 영입 칼 슈나이더 님이었다.
“저녁에 시간 되세요? 상담할 게 있는데.”
*
또 향수병이 도졌나 걱정돼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부랴부랴 칼을 만났던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날 기다리고 있는 건 칼이 아닌 다른 선수였다.
“왜 네가 여기 있냐.”
“미스터 킴이 고민을 기가 막히게 들어준다고 슈나이더가 그래서···.”
캡틴에게 욕 한번 먹었다고 세 경기 부진에 빠진 미래의 국가대표 중앙 수비수인 로드 테일러였다.
스마트폰이 진동하길래 꺼내서 확인해보니 칼의 메시지가 와 있다.
-전 킴을 믿어요!
믿긴 개뿔이.
이러다 상담사로 전직할지도 모르겠다.
2부 리그에 올라갈 때 스포츠 과학팀을 신설하면서 프로 선수들의 심리를 전문적으로 돌보는 상담사를 영입할 생각이었는데, 조금 더 시기를 당겨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음식이나 시키자.”
그때와 똑같이 슈니첼 두 개를 시켰다.
그리고 아주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칼이 대체 뭐라고 한 건지 로드의 눈빛에 기대감이 서려 있다. 슈니첼이 나올 때까지 로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기대하지 마. 나 전문가 아니야. 그래도 얘기는 들어줄 테니까 편하게 말해봐. 뭐가 문제야? 고민이 뭐야?”
“우울해요.”
“뭐가 우울한데.”
“캡틴한테 혼난 건 알죠? 그것 때문에요.”
“캡틴이 얼마나 좋길래 그러냐?”
“제 목표에요. 가장 닮고 싶은 선수고요.”
“왜?”
요즘 유소년들은 작년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올해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3억 파운드의 ‘크리스 앨런’이나 작년 월드컵 득점왕이자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스트라이커 ‘니콜라스 마카키스’를 우상으로 삼는다.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유소년 선수라면 며칠 전 발롱도르를 거머쥐고 이번 시즌 은퇴를 선언한 ‘데이비드 워커’를 목표로 하기도 한다. 워커는 현역 선수들의 우상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로드는 말로 설명하려고 하다가 잘 안 됐는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내게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이 유니폼 오랜만에 보네. 알렉산더 옆에는··· 너?”
“네.”
어두운 밤, 가로등 아래에서 땀에 전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알렉산더와 그 옆에서 공을 든 채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어린 로드가 수많은 인파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이게 제 시작이에요.”
“시작?”
로드가 과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십 년 전, 일곱 살이었던 로드는 부모님을 따라 노팅엄 FC에 응원을 오곤 했었단다.
축구를 하지는 않고, 재미 삼아 이 운동 저 운동 다 해 보는 운동신경 좋은 꼬마였던 로드는 저 날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샌더스! 프로 데뷔 첫 해트트릭입니다! 리그 1위 더비 카운티를 상대로! 믿어지지 않아요! 샌더스! 노팅엄을 강등에서 구해냅니다!>
로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해설자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로드가 말한 날은 내 기억에도 있었다.
저 시기에 마침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인터넷 중계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조이, 제임스와 화상 전화를 켜 놓은 채로 알렉산더의 첫 해트트릭 겸 노팅엄 FC의 기적적인 강등 탈출을 기뻐하며 난리 쳤었다.
노팅엄 FC가 강등당하냐 마냐 하는 위기에 빠져 있었던 시즌이었고 한 경기만 져도 강등이 확정되는 상황에 나온 퍼포먼스였다.
경기장은 무척 뜨거웠다고 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팬들은 알렉산더의 이름을 외쳤단다.
로드는 그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그런 광경과 분위기는 처음이었고, 어린 로드의 눈에는 알렉산더가 영웅으로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졸라 수많은 인파와 함께 알렉산더가 퇴근하는 걸 보기 위해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운 좋게 알렉산더의 차가 로드의 근처에서 멈췄고, 로드는 자신의 작은 유니폼에 알렉산더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잔뜩 흥분한 로드는
‘샌더스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라고 물었고, 알렉산더는 성격대로 훈련을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해줬다.
로드는 진지하게 그 얘길 듣고
‘고마워요! 열심히 훈련해서 꼭 샌더스처럼 될게요!’
라고 말했단다.
이때 알렉산더가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해트트릭 기념으로 받아온 공을 꺼내서 건네줬다고 했다.
‘이걸로 연습해.’
로드는 너무 놀라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그 장면을 보고 감동한 노팅엄의 팬들이 사진 한 장 찍어두라고 소리를 질러서 해서 로드의 아버지가 팬들을 배경으로 둘을 찍었다고 했다.
그날 잠을 이루지 못한 로드는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옆집에 살던 할리를 끌고 노팅엄의 유소년팀에 찾아갔다고 했다.
로드와 할리, 그리고 그들에게 딸려온 라이언까지. 모두 알렉산더의 팬 서비스라는 작은 눈덩이가 만들어낸 거대한 눈덩이들이었다.
“그 꼬마가 너였구나.”
노팅엄의 팬 페이지에서 한참 화제였던 이야기였으니까 기억 속에 있긴 했다.
시간이 꽤 지나서 자연스레 잊혔지만.
“네, 다 털어놓으니까 속이 시원하네요. 그래서 포지션도 중앙 수비수로 결정했고, 계약할 때 등 번호 달라는 조항도 넣은 거고요.”
“캡틴과 똑같은 포지션을 해야 말이 맞는 거 아니야?”
“주전 경쟁하긴 싫었거든요. 캡틴이랑 같이 뛰고 싶었지. 아무튼···.”
드디어 슈니첼 한 조각을 우물거리기 시작한 로드가 말했다.
“캡틴은 절 못 알아보더라고요. 그거 때문에 좀 섭섭했었는데, 이번에 그런 말까지 들으니까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죠.”
서운하긴 하겠네.
“그래도 이제 괜찮아요.”
“응?”
“킴한테 얘길 털어놓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 같아졌거든요.”
“어떻게?”
“잘 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역시 칼 말대로 킴한테 상담하길 잘했어요.”
뭘?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내일 훈련부터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잭슨한테 전해주세요.”
“야, 야?”
로드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가게를 나가버렸다.
“나 상담 같은 거 안 했는데···.”
아직 남은 슈니첼을 입안에 넣고 삼켰다.
황당함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
로드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알렉산더 샌더스는 그 어려운 상황에도 해트트릭을 이뤄내며 팀을 구해냈는데, 자신은 그깟 충고 하나 들었다고 빌빌대고 있다니.
예전의 알렉산더만큼 훌륭한 선수가 되어서 직접 말하면 그만인데 왜 지질하게 그랬을까.
EFL 리그 2, 19라운드.
열심히 훈련한 덕인지 로드는 선발명단에 있었고, 오늘은 기필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오늘은 천천히 해. 천천히.”
베테랑 수비 파트너 알렉스의 조언을 진지하게 듣고 뚜둑, 뚜둑하는 소리와 함께 목을 풀어줬다.
알렉산더의 나이는 서른여섯이다. 그는 당장 이번 시즌에 은퇴할지도 모르는 노장이었다.
로드는 그와 함께 한 경기라도 더 뛰고 싶었다.
기왕이면 이기고도 싶었고.
*
후반전, 점수는 0-0, 상대 팀의 코너킥 상황이었다.
로드는 가장 키 큰 공격수를 마크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알렉산더가 있었다.
네 경기 전의 상황과 괜히 겹쳐져 로드는 알렉산더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있다고 해서 트래시 토크를 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알렉산더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 스타일을 바꾸긴 해야겠지만.
“야.”
“왜.”
“너 스코틀랜드 출신이지?”
“맞는데.”
시비를 거는 거라고 착각했는지 상대 공격수가 먼저 험악한 얼굴을 한다.
심판이 코너킥을 차라는 휘슬을 불려 하는 순간, 로드가 공격수에게 물었다.
“스코틀랜드 국기가 왜 X자 모양 십자가를 쓰는 줄 알아?”
“뭐?”
“몰라?”
“어···.”
공격수는 심판의 휘슬을 듣지 못했다. 더불어 자신의 팀이 키커가 코너킥을 올리는 것도 로드가 먼저 움직인 후에야 깨달았다.
공격수가 황급히 쫓아왔지만 늦었다. 로드는 이미 높게 뛰어 공을 안전하게 걷어냈으니까.
“스코틀랜드 국기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고도 하는데, 이 성인이 순교할 때 X자형 십자형을 당해서···.”
“닥쳐!”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되, 욕설은 하지 않는다.
트래시 토크의 효용성을 맛봤는데, 굳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상대에게 유익한 정보도 알려주고 얼마나 긍정적인 방식인가.
로드가 고개를 돌리다가 아직 공격진으로 복귀하지 않은 알렉산더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우상에게서 부정적인 말을 듣는 건 꺼려진다. 혹여 알렉산더가 트래시 토크 자체를 싫어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로드는 알렉산더의 시선을 피하며 수비진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알렉산더가 씩 웃었더니 로드에게 말했다.
“잘했다.”
“이번에는 안 혼내네요.”
“잘했으니까.”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캡틴.”
“그래.”
수비 위치로 돌아가려는 로드에게 알렉산더가 물었다.
“아, 그때 준 공은 잘 가지고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