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19화 (19/245)

6. 10년 전, 노팅엄에서 있었던 일 (3)

“캡틴! 빨리 안 와요!”

할리의 재촉에 손을 들어 답한 알렉산더는 제자리에 뻣뻣하게 굳어있는 로드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빠르게 센터서클 쪽으로 달려갔다.

로드는 터벅터벅 걷다가 자신과 포지션이 겹치는 상대 공격수의 등에 부딪혔다.

몸싸움을 시도한다고 생각했는지 공격수는 이번에도 최대한 험악한 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으나

“히익.”

한쪽 입꼬리만 지나칠 정도로 올라간 로드의 미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공격수는 다급히 앞걸음 질을 해 도망쳤다.

“넌 죽었어. 오늘 꼭 이겨야겠다.”

상대 팀의 공격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방금은 이상한 질문을 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거야? 미친놈인가?’

*

상대 팀 공격수의 생각대로 로드는 미친놈처럼 날뛰었다. 상대 팀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못 해보고 로드에게 전부 차단당했다.

그리고 로드의 경기력은 경기 종료 5분 전, 노팅엄의 코너킥 공격 상황에서 절정을 맞았다.

“무조건 나 줘.”

로드의 요구에 칼은 자신 있느냐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로드였기에 칼은 알렉산더 대신 로드를 믿어보기로 했다.

칼은 왼팔을 들어 올려 손바닥까지 활짝 폈다.

칼의 신호에 따라 노팅엄의 선수들이 페널티박스 중앙에 모였다.

칼은 도움닫기 후 점프가 필요 없을 정도의 높이로 강하게 찼다.

모여 있던 노팅엄의 선수들이 일제히 여러 방향으로 흩어지며 적 수비에 혼란을 줬고, 칼의 빠른 공은 로드의 머리에 정확히 닿았다.

로드는 고개만 살짝 돌려 공을 흘려보냈고, 공은 골키퍼의 손을 지나 골대 상단 포스트에 튕겨 반대편으로 떠올랐다.

양 팀의 선수들이 모두 혼란에 빠졌다. 공이 떨어지는 곳 근처에 있던 알렉산더가 그 틈에 자리를 잡고 점프해 헤딩 슛을 시도했다.

정직한 슛이었기에 상대 골키퍼가 펀칭으로 튕겨냈다.

두 번째 경합상황.

가장 빠르게 움직인 건 22명의 선수 중 가장 집중하고 있는 로드였다.

“다 비켜!”

로드가 뒤늦게 쫓아온 상대 수비수와 동시에 하늘로 떠올랐고, 먼저 자리를 잡았다. 공은 로드의 머리에 정확히 임팩트 되며 골대 구석으로 향했다.

<와아아아아!>

홈 경기장의 관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질렀다.

【고오오오올! 노팅엄의 아들 로드 테일러가 프로 통산 첫 골을 넣었습니다!】

로드는 차오르는 희열을 허공에 큰 어퍼컷을 날리며 풀고 있었다. 어설픈 세레머니였지만, 골을 축하하기 위해 달려온 동료들에게 파묻혀 곧 보이지 않게 됐다.

“축하한다!”

“잘했어!”

“그렇게 하는 거지!”

“악! 아파! 아프다고!”

다들 등을 한 대씩 때리고 갔다.

로드는 비명을 질러대며 분명 내일이면 시퍼렇게 멍이 들겠구나 생각했다.

선수들의 격렬한 축하가 끝나고 원래 진영으로 돌아가는 길, 자신을 알렉산더가 기다리고 있었다.

로드는 낯간지러운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짧게 한마디를 했다.

“등 번호 꼭 주세요.”

“19번을 탐내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한마디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로드는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줄 거예요, 말 거예요? 당신 번호라면 영구결번될 수도 있단 말이에요.”

“노팅엄에 계속 남을 거냐?”

“당연한 거 아녜요?”

로드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알렉산더가 씩 웃었다.

“그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알렉산더가 자신의 왼쪽 팔뚝을 툭툭 쳤다. 그 자리에는 주장 완장이 있었다.

“이것도 같이 가져가.”

*

로드와 알렉산더. 둘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드가 웃고 있으니까 됐다.

알렉산더는 팬의 입장에서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지만, 완고한 그 태도만큼이나 둔하고 기억력이 나쁘기도 했다.

엊그제, 알렉산더와 저녁 식사를 하며 어린 로드를 기억하냐고 물어봤었다.

‘내가 걔 어린 시절을 어떻게 알아?’

애가 10년 동안이나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몰라주다니.

괜히 내가 섭섭해져서 알렉산더에게 첫 해트트릭하고 받은 공 기억나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그제야 알렉산더는 로드를 기억해냈다.

‘걔가 걔라고? 말도 안 돼.’

나는 로드가 알렉산더와 뛰기 위해 중앙 수비수를 선택했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 돌부처 같은 알렉산더라도 크게 감동한 것 같았다.

예전 얘기를 경기장에서 어떻게 꺼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자기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다.

중요한 건 이제 미래의 국가대표급 선수가 될 로드가 떠날 확률이 제로나 다름없게 됐다는 것.

더불어 로드가 제멋대로 내고 간 슈니첼 값을 이제야 치른 것 같아서 마음도 아주 편했다.

보너스까지 있었다.

“로드에게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경기 중 내게 알렉산더와 로드의 사연을 들었던 마리아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팬들이 알면 참 좋아하겠죠?”

“네! 틀림없이.”

알렉산더와 로드를 담은 마리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

트렌트 대학교의 한 강의실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너희 아직도 못 끝냈어?”

“네가 미친 거야. 마야. 어떻게 그걸 다했어?”

“수업 때 잘 듣고, 틈틈이 해 놓으면 되잖아.”

“자괴감 든다··· 이 부조리한 세상···.”

“그럼 나 혼자 가야 해?”

살인적인 과제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은 주말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여기 모여 있는 네 명은 노팅엄 FC의 홈경기가 있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꼭 경기장에 가곤 했다. 지난주에는 로드의 극적인 골로 승리하는 것까지 함께 봤었다. 하지만.

“레포트가 두 개에 퀴즈가 세 갠데··· 퀴즈밖에 준비 못 했어···.”

손민국의 비참한 말이 그들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코피.”

“하하하하하하하, 당연히 하나도 못 했지.”

“히메나는?”

체념한 얼굴로 웃고 있는 코피와 울 것 같은 눈으로 싱긋 웃는 히메나를 보며 마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은 답이 없고···.”

“너무해!”

히메나의 외침을 무시한 마야는 손민국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같이 가 주면 레포트 주제 두 개 줄게. 쓰는 것도 도와주고.”

“정말?”

“내가 갈래!”

“넌 퀴즈 준비도 안 했잖아.”

“으어.”

코피가 시무룩해지고 손민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초롱초롱한 손민국의 눈이 부담스러운지 마야가 변명하듯 말했다.

“혼자 가면 심심하단 말이야.”

“그래그래. 근데 맥주는···.”

“나만 먹을 거야. 넌 밤새워야지.”

“좋아. 가자!”

*

마야는 경기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을 좋아했다. 손민국은 어제도 밤을 새웠는지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지만, 마야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정류장마다 노팅엄의 팬이라는 걸 증명하는 머플러, 유니폼, 배지, 모자 등을 착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차근차근 버스를 가득 채웠다.

마야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일이었다.

참고로 첫 번째는 골이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노팅엄 TV 채널에 새 영상이 업로드되었습니다.

마야는 설렘을 느끼며 이어폰을 끼고, 영상을 틀었다.

‘당신은 이 선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 10년 전, 노팅엄에서 있었던 일.’

마야는 영상의 제목을 입 모양으로 읽어보았다.

헐렁한 유니폼을 입은 채 반듯하게 서 있는 어린 로드의 사진이 나타났다.

누군지 알아보기도 전에 본격적으로 영상이 시작됐다.

영상에는 조용한 음악과 함께 여러 사진과 나레이션만이 차례로 나왔다.

10년 전, 노팅엄 FC를 응원하던 어린아이가 있었다.

젊었던 알렉산더 샌더스도 있었다.

아이는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팀을 기적적으로 구해낸 그 날, 알렉산더에게 푹 빠지게 된 아이는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아이는 알렉산더에게 사인을 받으며 당신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고, 알렉산더는 그 보답으로 해트트릭 기념으로 받아온 공을 선물로 준다.

공을 품 안에 소중하게 안고 있는 아이와 알렉산더가 함께 찍은 사진이 몇 초 동안 나왔다.

아이는 다음 날 노팅엄 FC의 유소년 팀에 입단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바로 지난 경기에서 프로 데뷔 골을 넣었다.

아이의 이름은 ‘로드 테일러’였다.

나레이션이 끝나고 로드 테일러가 지난 경기에 상대 수비수를 밀어내며 헤딩 골을 넣는 영상이 나왔다. 중계 소리와 관중의 함성이 뒤섞여 현장감이 넘쳤다.

<열일곱 살의 로드 테일러가 데뷔골을 넣었습니다! 굉장한 활약입니다! 젊은 선수의 패기와 노련한 선수의 침착함을 모두 갖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팅엄 운영진이 저 선수를 지키려면 정말 열심히 일해야겠어요!>

마야도 저 현장에 있었고 저 골을 보았었다. 그때는 마냥 기뻤었는데 지금은 뭉클함도 함께 생겨났다.

로드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괜히 상상하게 돼서.

이어서 화면에 알렉산더가 나왔다.

알렉산더 : 처음에는 몰라봤습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는 있었죠. 제 첫 해트트릭 공을 선물한, 저를 닮고 싶다고 한 당돌한 꼬마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어서 할리가 나왔다.

할리 : 아침에 막 초인종을 누르더니 저보고 축구를 하자는 거예요. 글쎄.

[그래서 축구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할리 : 네, 둘 다 그때부터 시작했죠.

다음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로드가 나왔다.

로드 : 이런 영상 너무 부끄러운데···. 네, 정말 열심히 했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축구도 열심히 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가끔 마주칠 때나, 1군에 올라온 초반까지도 알렉산더가 못 알아봤다면서요?]

로드 : 네, 먼저 말할 수도 있었지만··· 먼저 알아봐 주길 바랐거든요. 근데 저번 경기에서 ‘그 공 잘 가지고 있냐?’라고 물어봤을 때··· 정말 기뻤어요.

마야가 이번 학기 교양으로 듣고 있는 스포츠마케팅에서 ‘선수의 이야기’는 정말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라고 배웠다.

퀴즈 때는 기계적으로 적어냈지만, 지금은 그 이론이 어떤 원리인지 몇 장을 써서라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상은 알렉산더와 로드가 10년 전 구도와 똑같이 찍은 사진으로 마무리됐다. 그때는 로드가 한참은 작았지만, 지금은 알렉산더와 비슷한 키였다.

영상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사진을 바라보던 마야는

“야, 야, 마야, 도착했어.”

“응.”

어느새 깨어난 손민국의 부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마야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손민국에게 말했다.

“우리 유니폼 사자.”

“엉?”

“세트로 맞추자.”

“···세트? 그, 그래. 그러자.”

부정적이었던 손민국이 세트로 맞추자는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마야는 유니폼을 사는 데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알렉산더랑 로드 유니폼 사자.”

“칼이 아니라? 둘은 왜?”

“이거 보면 알아.”

잠시 후, 팬숍 앞에 도착한 손민국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축구팬의 로망이나 뭐라나. 자신은 이제 로드를 응원하겠다고 했다. 마야는 그러면 자기는 알렉산더 유니폼을 사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Sold Out, Sold Out

다 팔렸다는 표식이 알렉산더와 로드의 유니폼이 걸려있었던 옷걸이에 붙어 있었다.

주변을 보니 이미 알렉산더와 로드의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대학생 팬들이 보였다.

마야와 손민국은 한숨을 쉬고, 로드와 알렉산더의 유니폼을 예약한 후 경기장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