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노팅엄의 12월 (1)
“명단 다 만들어 왔어.”
“고마워.”
조이에게서 서류를 받아 들었다.
“눈이네.”
벌써 12월이다.
창밖에는 드물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겨울에도 대부분 비가 내리는 영국에서는 눈을 보기 힘든데, 신기했다.
이 팀에서 본격적으로 일한 게 5월 초부터니 반년 넘게 이곳에서 지냈다.
“그러게, 눈이야.”
“차라도 마시고 갈래?”
“지금은 바빠서. 이따가 올게.”
“그래.”
“아, 그런데···.”
조이가 내가 들고 있는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말 너도 갈 거야?”
“응, 병원에 얼굴도장도 찍어야지. 구단 협력병원인데.”
축구팀과 그 지역의 병원은 대부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팀을 위한 전문 의료시설이 있는 일부 빅클럽을 제외하면, 팀닥터나 스포츠과학자 몇 명만 팀에 상주하면서 크게 다치면 응급조치를 취하고 병원에 데려가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또한, 우리 팀에는 메디컬 테스트를 위한 장비도 없어서 이번 여름에도 병원에 많은 신세를 졌다. 뭐, 돈도 따로 내는 기브 앤 테이크 관계긴 하지만.
“괜찮겠어? 너 우는 거 아니야?”
“내가 왜.”
“애들이 정말··· 보면 좀 찡하거든.”
“너나 울지 마. 아무튼, 이따 보자. 두 시에 사무실로 갈게.”
“응.”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있고, 크리스마스 전에는 영국 대부분의 축구팀이 같은 지역에 있는 병원에 봉사활동을 나간다.
특히, 몸이 아픈 어린아이들을 위한 병동은 축구팀이 반드시 방문해야 할 장소였다.
팀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도 좋고, 선수들의 정신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스포츠 선수들은 어린아이들의 우상인 경우가 많았기에 양측 모두 행복해지는 윈-윈 봉사활동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간단한 신상정보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를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
“너는 어떤 선수를 만나고 싶어?”
“칼 슈나이더요!”
“알렉산더요!”
“로드! 로드가 좋아요!”
병원장과도 인사했고, 아이들에게 내 소개도 했고, 이야기도 충분히 나눴다. 지금은 조이가 아이들에게서 와줬으면 하는 선수들을 묻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축구선수가 20명 넘게 병원에 들이닥치면 그것도 참 보기 나쁘다.
적당히 여섯 명 정도, 조를 두세 개로 나눠서 봉사활동 다니는 게 가장 깔끔하다. 다른 선수들은 다른 곳에 봉사하러 가면 되는 거고.
역시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칼, 알렉산더, 로드였다.
‘그 애는 어딨는 거지?’
봉사는 봉사고, 이 아이들과의 만남을 팬들에게 더 와닿게 보여줘야 했다. 누군가 내 생각을 뜯어볼 수 있다면 상업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 것을.
아무튼, 그러기 위해서 특별한 아이가 필요했다. 마음이 따뜻한 축구팬들은 아픈 아이와 축구선수와의 우정에 환장하니까.
“허허, 여기서 뭐 하십니까?”
“으어··· 깜짝이야.”
아이의 목소리인데 젠틀한 할아버지 같은 말투를 쓰는 아이가 어느새 내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모자를 눌러쓰고 하얀 수염을 붙이고 있었다.
“너 노아구나?”
“절 아십니까?”
못 알아볼 리가. 회귀 전의 나 또한 노팅엄의 팬이었기에 벨기에에서 일하는 틈틈이 노팅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봤었다.
노아는 회귀 전에도 이번 해 크리스마스 직전 경기에서 시축하는 아이였다.
“응, 예습하고 왔거든. 만나서 반갑다.”
나는 쪼그려 앉아 노아와 눈을 맞췄다.
노아의 나이는 열 살. 하지만 노아의 얼굴은 마치 노인처럼 주름져 있었다.
조로증, 어린 시절부터 급속히 노화가 진행되는 병으로 노아는 이 병과 싸우고 있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나는 노아의 작은 손을 마주 잡았다.
노아는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짜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사전조사한 대로다. 회귀 전과도 똑같다. 나는 싱긋 웃으며 노아에게 말했다.
“노아 할아버지. 초콜릿 좀 사왔는 데 같이 드시겠어요?”
“흠흠, 그럽시다.”
노아는 자신의 변한 모습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할아버지처럼 행세하는 아이였다. 회귀 전 인터뷰가 참 인상 깊었는데, ‘나는 내 모습이 부끄럽지 않아요.’, ‘내 얼굴에 맞는 얼굴과 행동을 하는 것뿐이에요. 재밌잖아요?’라고 씩씩하게 말한 게 기억에 선명하다.
언론에서 노아를 깊게 조명하는 이유에는 유쾌함과 안타까움이 공존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노아의 천재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노아는 원래 다른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었는데, 심심하다고 틈틈이 공부해서 여덟 살에 하버드 입학을 허가받은 아이였다.
하지만 노아는 그 이후 공부하지 않고, 노는 데에 집중했고 고향인 노팅엄으로 몇 년 전에 돌아왔다.
“어때요? 맛있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당신에게 축복이 있길···.”
컨셉을 과하게 잡는 것 같지만, 애니까.
조이가 나를 신기하다는 듯 보고 있는 게 무척 부끄러웠지만, 나는 노아와의 대화에 열중했다.
“노아 할아버지는 어떤 선수와 만나고 싶으세요?”
“음··· 말하면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선수가 큰 부상만 안 당한다면요.”
“오, 그럼 라이언 브라우니를 만나고 싶은데요.”
“응? 라이언?”
순간 공손한 태도라는 컨셉을 잊고 다급히 되물어버렸다.
이상했다.
회귀 전에는 알렉산더를 만나 뉴스까지 나왔었고, 알렉산더의 패스를 받아 시축했었는데.
“······안 되나요?”
노아도 어느새 컨셉을 반쯤 벗어던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되죠. 그냥 이유가 궁금해서요. 보통 알렉산더, 칼, 로드를 찾거든요.”
내 말에 안심했는지 노아가 다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노인 연기에 들어갔다.
“허허, 별다른 건 없고··· 제가 노팅엄 TV를 즐겨 보는데, 거기서 라이언의 이야기를 봐서요.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노팅엄 TV에 올라왔던 라이언에 관한 동영상을 떠올려봤다.
라이언 : 저는 어린 시절 심장병을 앓았었어요. 그래서 열 살까지 병원에서 살았고, 덩치도 작았죠. 지금도 큰 키가 아니지만요.
라이언은 지금도 잔병치레가 잦아 우리 팀닥터들의 1순위 보호 대상이었다. 잭슨 또한 라이언의 몸 상태를 신경 쓰느라 자주 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튼, 이유는 대충 알았다. 동질감을 느끼는구나.
“좋아요. 라이언은 책임지고 데려올게요.”
“정말이에요? 아, 큼큼. 정말입니까?”
귀여운 아이였다. 오래오래 보고 싶을 만큼. 이 아이가 이년 뒤에 죽는다니 슬플 뿐이었다. 조로증 환자들은 간혹 20대를 넘기는 예도 있지만, 대부분이 10대에 죽는다.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다가 노아가 회귀 전과는 다르게 알렉산더가 아닌 라이언을 골랐다는 게 떠올랐다.
그리고 아이디어가 이어서 떠올랐다.
나는 노아에게만 시축을 부탁하려던 계획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모두 바라보며 말했다.
“얘들아. 혹시 축구장에서 공 차보고 싶지 않니? 12월 23일에. 경기 전에. 다 같이.”
현재가 바뀌면 미래도 바뀐다.
우리 팀의 유소년 삼인방은 내 개입으로 더 훌륭한 감독을 만나 일 년이나 일찍 데뷔했다. 원래는 프로로 데뷔하지 못했던 라이언의 미래도 바뀌었다.
병으로 인한 결과를 바꾸는 건 몹시 어렵겠지만, 바뀌기 어려운 미래라면 현재를 많이 바꾸면 조금이라도 오래 살겠지. 즐거운 일이 많을수록 병이 늦춰진다잖아?
팬들에게 훈훈함도 주고, 감동도 주고, 혹시 모를 가능성에도 투자할 수 있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아이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훈련을 일찍 마친 노팅엄의 선수 여섯이 구단에서 준비해놓은 차 앞에 모여 있었다.
“아··· 나 이런 거 진짜 못하는데.”
아이들의 요청으로 노팅엄 어린이 병원으로 가게 된 여섯 명이었다.
알렉산더와 로드, 라이언, 칼, 그리고 기타 등등.
로드의 불평을 받은 건 여섯 명에 선정되지 못한 할리였다.
“나는 애들 좋아하는데.”
“탈락자는 훠이훠이, 저리 가.”
로드의 말에 충격받은 할리를 라이언이 위로해주는 동안 차 안을 살피던 알렉산더가 직원에게 물었다.
“애들용 유니폼은 어디 있습니까? 축구공은 보이는데.”
“어? 없나요?”
실수를 확인한 직원이 죄송하다고 말하고는 금방 다녀오겠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같이 다녀오자고 말하고, 직원과 함께 멀어졌다. 남은 선수들에게는 기다리라고 했다.
“역시 주장이야. 안 그렇게 생겨서 아주 꼼꼼해. 누구처럼 잔소리도 안 하고.”
“애들한테 인기 없는 공격수님, 어서 가시지요.”
“허, 내년에 두고 보자. 대체 왜 나 대신 네가 뽑힌 거야?”
“내 유니폼이 알렉산더에 이어서 두 번째로 잘 팔리는 거 몰라?”
로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턱이 보일 정도로 고개를 쳐들었다. 할리는 분하다고 중얼거리며 꼭 내년에는 자신이 뽑힐 거라고 말했다.
이들이 이러는 동안 라이언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대체 왜 뽑힌 거지. 가면 아무도 안 반겨주는 거 아냐.”
더비 경기에서 큰 활약을 했다지만, 라이언의 위치는 아직 로테이션 급 정도였다. 두 경기에 한 번 정도 출전하는 정도.
그런 라이언을 칼이 위로해줬다.
“걱정하지 마. 널 보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으니까 가는 거잖아.”
“그렇겠지?”
칼은 이제 영어도 퍽 능숙하게 잘했다. 발음만 보면 어눌했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때 어린이용 유니폼들을 챙긴 알렉산더와 직원이 돌아왔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