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25화 (25/245)

8. 노팅엄의 12월 (3)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은 꼭 골을 넣어야 해요. 무득점 경기하면 절대 안 돼요. 다들 이해했··· 저기요? 울어요?”

경기 직전 라이언이 선수들을 모았고, 노아와 한 약속을 공유했다. 그 과정에서 노아를 어떻게 만났고, 어떤 대화를 했는지 전달했을 뿐이었는데···.

노팅엄의 유니폼을 입은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죄다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우, 운다니, 그럴 리가! 근데 너는 당사자가 왜 그렇게 덤덤하냐. 안 슬퍼?”

한 선수의 외침에 다른 선수들도 수긍했다. 알렉산더마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울면 힘 빠지잖아요. 힘내야죠. 오늘 상대가 만만한 것도 아니고.”

오늘 노팅엄의 상대는 리그 5위, MK돈스. 노팅엄이 아무리 리그 3위라지만 승점도 딱 1점 차고, 상대는 객관적으로 더 풍성하고 화려한 선수단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MK돈스는 4부 리그 최소 실점 팀이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할리가 허공에 주먹을 뻗어 보였다. 라이언은 그렇다고 말했고, 할리가 눈을 반짝였다.

“빌어먹게 멋있네. 골은 내가 넣고 그 세레머니도 내가 대신 할 거다.”

“뭐?”

할리의 말에 라이언이 당황했다.

가장 많이 울고 있던 로드가 아직도 울음기가 낀 목소리로 라이언이 말하기도 전에 끼어들었다.

“···누가 넣든 상관··· 없으니까, 다 같이 하자고···.”

“오, 그것도 좋다.”

“좋아!”

선수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MK돈스의 선수들이 왜 저러냐는 얼굴로 노팅엄의 선수들을 쳐다봤지만, 알 바 아니었다. 선수들은 계속 소리쳤다.

“가자!”

“가자고!”

노팅엄 선수들의 가슴에 노아와의 세레머니를 위해 골을 넣어야 한다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가자! 노팅엄!”

알렉산더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선수들은 몸에 힘을 잔뜩 불어넣은 채, 자신의 포지션을 향해 달려갔다.

*

노아를 비롯한 어린이 병동의 아이들이 관계자석에 도착했다.

나는 가장 앞서서 걸어오고 있는 노아에게 물었다.

“라이언이랑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한 거야?”

수염을 떼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얘기했다. 노아 또한 노인 흉내가 아닌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밀이에요.”

“치사한데.”

“음··· 약속 하날 했어요. 더는 못 말해요.”

내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제임스와 조이, 그리고 마리아는 노아의 말에 나와 함께 갸웃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며 노아는 킥킥 웃었다.

“더 궁금해지네. 대체 무슨 약속을 한 걸까? 나한테만 몰래 알려줄래? 혼자 알고 있을게. 응?”

“···안 돼요.”

마리아가 노아를 꼬드겨 봤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는 붉어진 노아의 얼굴을 보며 웃다가, 관중의 탄식 소리에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벌써 슈팅 세 개 째야? 오늘 평소보다 더 열심히 뛰는 것 같은데.”

경기가 시작하고 오 분가량 밖에 안 지났는데, 선수들은 경기 중반처럼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정말. 기합이 들어간 것 같아 보이네.”

이 분 후에 또 슈팅. 이번에는 골대 위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할리가 평소보다 훨씬 더 격하게 아쉬워하고 있었다.

곧 골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허리에 힘을 주고 경기장을 내려다 봤다.

하지만 전반전에는 한 골도 들어가지 않았다.

노팅엄의 과격한 공격에 MK돈스가 당황한 것 같긴 했지만, 노팅엄 선수들은 지나칠 정도로 과감하게 슈팅을 때렸고, 10개가 넘는 슈팅 중 유효슈팅은 한 개도 없었다.

“괜찮아. 아직 절반밖에 안 지났잖아. 노아야, 아이스크림 먹을래?”

나는 경기가 계속될수록 점점 시무룩해지다가 아예 허리에 힘을 빼고 자리에 누워버린 노아를 위로해주려 애썼다.

**

하프타임, 노팅엄의 드레싱룸에 앉아있는 선수들은 실형을 선고받기 직전의 죄인들처럼 침통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은 큰 외침이 드레싱룸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들 앉아!”

선수들은 이미 앉아있었다. 하지만 감독 잭슨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에는 지금 화가 너무 나 있기도 했다.

잭슨은 경기장이 그려진 자석 판을 거칠게 치며 소리쳤다.

“다들 왜 그래? 전반전의 너희들은 쓰레기 같았어, 쓰레기! 정신 안 차려? 돈 내고 경기장에 찾아온 팬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아?”

선수들은 침묵했다.

선수들 또한 자신들이 너무 흥분해서 전술에 어긋나는 플레이, 슈팅 상황이 아닌데 무리한 슈팅, 쓸데없는 태클 등 아마추어나 할 실수들을 연발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잭슨은 선수들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자, 수석코치에게 눈짓했다. 수석코치와 코치는 급히 자석 판에 상대 선수와 선발 선수들의 자석을 붙였다.

그리고 그때, 손을 든 선수가 있었다.

잭슨은 속으로 놀랐다. 늘 “예”라고만 말하던 라이언이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입니다.”

“너 때문이라고?”

“예, 제가 경기 전에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말을 해서···.”

그때 로드가 말했다.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제대로 집중 못 한 우리 책임···.”

“로드, 아직 라이언과 얘기 안 끝났다.”

“예. 보스.”

로드는 곧장 입을 다물고 자리에 반듯이 앉았다. 잭슨은 호랑이 같은 두 눈으로 라이언을 노려봤다. 라이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짧게 요약해서 1분 내로 얘기해. 뭔 얘길 했길래 그러는 건데.”

잭슨의 분노에 찬 얼굴은 라이언과 노아의 사연을 들을수록 점점 기분을 파악할 수 없는 무표정으로 변했다.

옆에서 잭슨을 살피던 수석코치 존만이 잭슨이 열심히 표정 관리 중이라는 걸 눈치챘다.

“···여기까지입니다.”

하프 타임의 1분 1초를 소중하게 여기는 잭슨이 입을 다문 채 거의 30초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배경으로 쌓이는 긴장감에 선수들은 모두 잭슨의 눈치만 봤다.

잭슨이 입을 여는 순간, 선수들의 시선이 전부 모였다.

“그럼 그딴 식으로 경기하지 말고···.”

당장 때려치워, 라는 말이 나올까 봐 모든 선수가 걱정했다.

팡!

잭슨이 칠판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존, 필립스 교체다. 브라운, 케인이 들어가.”

“예!”

이어서 잭슨의 전술 지시가 시작됐다. 자석 판에 붙어있는 선발 선수들의 위치도 막 바뀌기 시작했다.

“적의 중앙수비가 단단해, 알렉산더, 칼과 포지션을 바꿔 중앙이 아닌 측면에서 공중볼을 따낸다. 골을 넣는 게 아니라 볼배급이 목표다.”

“예!”

“칼, 알렉산더의 자리에 들어가, 하지만 네 판단에 따라 포지션을 벗어나도 좋다.”

“알겠습니다!”

“할리, 중앙에서 멈추지 말고 뛰어라. 너는 오늘 축구선수가 아니라 마라톤 선수야. 알겠어? ···수비수 끌고 뛰라는 거야. 정말 그냥 뛰기만 하지 마. 알겠어?”

“이해했습니다!”

잭슨의 말이 줄줄이 이어졌고, 선수들은 그 내용을 머리에 넣으며 크게 대답했다.

선발로 나선 선수 중 열 명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라이언.”

“예!”

잭슨은 라이언의 이름이 적힌 말판을 움직여 상대 페널티박스 안에 집어넣었다가 원래 포지션으로 돌렸다가를 반복했다.

“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할리와 칼이 만든 공간으로 침투해라. 그리고 오늘, 무조건 골을 넣는다. 못 넣으면 한 달 동안 특별 훈련이다. 알겠나?”

그제야 잭슨의 의중을 선수들이 깨달았다.

라이언뿐만 아닌, 모든 선수가 동시에 대답했다.

“예! 보스!”

문 뒤에서 대화를 훔쳐 듣던 김도운이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

“어디 갔다 와?”

“드레싱룸.”

내 말에 제임스가 정어리 파이를 통째로 먹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분위기 나쁘지.”

“아니, 최고야. 오늘 무조건 이길 거야. 애들이 먹고 싶은 거 다 사 줬어?”

“응, 같이 오신 의사 선생님이랑 협상해서 최대한 원하는 거로 사 줬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아이들은 다양한 음식들을 들고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후반전 휘슬이 울린 후에도 먹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는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노아만큼은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쥔 채로 경기장만 보고 있었다.

“도니, 포메이션이 왜 저래?”

제임스의 물음에 요약해서 대답해줬다.

“잭슨과 선수들이 노아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선물?”

후반전의 경기 양상은 전반전과 완전히 달랐다.

마구잡이로 공격하던 전반전과 달리, 선수들은 체계적으로 MK돈스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슈팅을 때리는 위치도 골대와 훨씬 가까워졌고, 날카로운 공격에 MK돈스의 수비수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곧 골이 터질 것 같은 기대감에 눈을 떼기 어려웠다.

그렇게 10분이 흘렀고, 노아는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경기에 빠져 있었다.

수비수 알렉스가 상대 팀의 롱패스를 헤딩으로 끊었다. 떨어진 공은 로드가 잡았다. 로드는 후반전에 계속 보여주던 날카로운 롱패스로 우측면에 있는 알렉산더의 머리를 향해 공을 띄웠다.

알렉산더는 측면 공격수로 뛰고 있었다. 상대 풀백이 키가 작은 걸 이용한 미스매치였다. 알렉산더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 작은 선수를 쉽게 누르고 헤딩을 따냈고, 공은 중앙에서 측면으로 나온 칼이 받았다.

칼의 상대 또한 발이 느린 중앙수비수, 이것 또한 잭슨의 노림수였다.

알렉산더가 전달해 준 공을 이어받은 칼은 빠른 발을 이용해 중앙수비수를 가볍게 제쳐냈다.

<오오오오!>

노팅엄의 팬들이 또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팅을 때려도 좋고 패스를 해도 좋은 각도였다.

칼은 슈팅할 것처럼 과감하게 발을 움직이다가, 공 바로 앞에서 급격히 속도를 줄이며 공을 뒤로 뺐다. 경기장의 모두를 속인 환상적인 슛 페이크였다.

칼의 동작에 완벽하게 속은 남은 한 명의 중앙수비수와 골키퍼가 휘청거리는 사이, 라이언이 상대 미드필더를 등에 단 채 페널티박스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칼은 망설임 없이 라이언의 앞 공간으로 패스했다.

슛을 차기 직전, 몸싸움에 밀린 라이언이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하지만 라이언의 발은 공을 임팩트한 후였다.

라이언이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공 또한 잔디를 데굴데굴, 빠르게 굴러 텅 비어있는 골대 안으로 들어간다. 골망이 흔들렸다.

<이야아아아아아!>

함성, 열기, 격려, 흥분 온갖 것이 경기장을 채웠다.

골이 들어간 걸 확인한 라이언은 벌떡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도 있는 힘껏 라이언의 뒤를 쫓아 달렸다.

달리고 계속 달려 중앙선, 그러니까 우리가 앉아있는 관계자석까지 달려왔다.

라이언이 이쪽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어느새 난간에 매달린 노아가 마주 주먹을 뻗고 있다.

무뚝뚝한 알렉산더도 환하게 웃는 할리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칼도, 왠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것 같은 로드도, 다른 모든 선수도 라이언과 똑같이 주먹을 뻗고 있었다.

유치하다. 아주 유치해.

조이와 제임스가 눈물을 훔친다. 마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노아와 라이언을 찍고 있었다.

전광판도 선수들과 노아의 주먹 인사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미리 말해놓길 잘했다. 이런 건 나만 보기 아깝거든.

전광판을 본 일부 관중이 세레머니의 정체를 깨달았다. 함성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환상적인 광경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있어 축구는, 그깟 공놀이가 아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나도 포함해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