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위기 속에서 피어나는 것들 (1)
-아빠! 큰일 났어요! (노팅엄 FC 공식 홈페이지로 연결되는 링크)
얼마 전부터 다시 노팅엄 FC의 팬이 된 웨인 리처드는 회사에서 아들의 다급한 메시지를 받았다.
웨인은 업무를 멈춰두고, 메시지에 첨부된 링크를 눌렀다.
그리고,
“할리, 이 머저리 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곱 명의 주전급 선수가 선수단에서 이탈했다는 소식과 함께 부상 경위가 적혀 있었다. 특히 샤워하다 자빠졌다는 할리의 부상이 가장 어이없었다.
“야, 웨인. 너희 선수들 다 부상이라며. 이제 어떡하냐?”
그때 같은 회사 직원이자 노츠 카운티의 열성 팬인 해리가 신난 얼굴로 사무실에 찾아왔다.
웨인은 앉은 채로 해리를 빤히 올려다 봤다.
“왜, 왜.”
“네 얼굴 보니까 스테이크가 또 먹고 싶어져서.”
그날의 지출을 떠올린 건지 해리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해리는 자신이 응원하는 노츠 카운티가 노팅엄 더비에서 패하는 바람에 내기에서 졌고, 웨인을 비롯한 노팅엄의 팬인 직원들에게 스테이크를 쏴야 했다.
“다음 더비 때도 또 내기해! 4월이었나?”
“맞아. 하자. 어차피 또 우리가 이길 테니까.”
“저번 경기에서는 운이 없었어. 노팅엄 FC의 홈이었고, 빗나간 중거리 슛이 우연히 알렉산더의 가슴에 맞았고···.”
많이 억울했던 건지 해리가 줄줄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웨인은 해리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부상 알림 밑에 달린 응원 댓글을 보며 자신도 하나 달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야, 내 말 안 듣냐.”
“져놓고선 말이 많네.”
웨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일부러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해리는 부들거리다가 너희는 잔류하고 우리는 승격할 거라는 말을 퍼붓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의 노팅엄을 응원하는 직원들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노츠 카운티를 응원하는 직원들은 입술만 삐죽 내밀었고.
웨인은 픽 웃고 다시 스마트폰의 화면을 봤다.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새 소식이 올라왔다.
단장 겸 사장 김도운의 짧은 인터뷰였다.
-장기 부상자도 몇 명 섞여 있으므로 최대한 빠르게 새 선수를 영입 혹은 임대해올 겁니다. 팀이 잠깐 휘청이겠지만, 믿고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단장은 확실히, 정말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불안한 마음은 가라앉았고, 웨인은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
겨울 휴식기 직후, 리그 1위 팀 상대로 패.
하위권 팀들을 상대로 두 경기 연속 무승부(리그 한 경기, 컵대회 한 경기).
3경기 연속으로 승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었기에, 경기장을 찾은 노팅엄의 팬들 사이에서는 우려 섞인 의견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잘 나가긴 했어.”
“지난 경기 기억나지? 알렉산더도 이제 늙은 것 같아.”
“체력에 한계가 온 거지.”
오늘도 경기장에 찾아온 트렌트 대학교 4인방 중 마야를 뺀 나머지는 이런 분위기가 처음이었기에 몹시 어색해하고 있었다.
“끔찍했어. 이제 은퇴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알렉산더가 마킹 된 유니폼을 입고, 노팅엄 앰블럼이 새겨진 머플러와 털모자까지 쓴 마야만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노팅엄을 응원한 것처럼 보이는 외양만큼이나 이번 시즌 각종 축구 서적과 영상, 자료를 탐독했기 때문이었다. 학교 수업보다 열심히.
“저기요.”
“잭슨의 전술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 응?”
“알렉산더는 괜찮았거든요? 지난번 경기랑 지지난번 경기에서 골을 넣은 건 벌써 잊어버린 거예요?”
“아, 아니 그게···.”
“또! 잭슨의 전술도 현 상황에서는 최선이에요. 애초에 우리 팀은 스쿼드가 얇은 게 약점이었잖아요. 공격 수단은 부상 악령에서 살아남은 한스와 칼이 이끄는 우측면과 침착하게 골을 넣어줄 수 있는 알렉산더밖에 없어요. 나머지 선수들에게 공격을 시켰다간··· 무승부도 못 했을걸요?”
“야, 야, 왜 이렇게 흥분했어. 죄송합니다.”
반년 전에는 축구를 거의 모르던 마야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걸 보고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손민국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마야를 뜯어말렸다. 나머지 친구들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경기장에서 주먹질은 아주 쉽게 오간다. 보안요원들이 이쪽을 주시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야의 타겟이 되었던 배가 늘어난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 셋은 경기장에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말하고, 마야에게 물었다.
“아가씨, 우린 40년 동안 노팅엄을 봐 왔어. 축구에서 3이라는 숫자는 아주 중요해. 3연승을 하면 기세가 잔뜩 오르고, 3연속으로 승이 없다면 팀의 분위기가 추욱 쳐진다고.”
마야 또한 침착하게 의견을 말했다.
“지난 시즌 우리 팀이 강등권이었던 건 잊어버린 거예요?”
“기억하긴 하지만.”
“지금은요?”
“리그 7위지···.”
원래 3위를 1점 차로 쫓는 4위였으나 2무 1패로 7위까지 떨어졌다. 팬들은 성적이 더 떨어질까 걱정하고 있었다.
“저는 믿고 지켜볼 거예요. 아저씨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마야는 그렇게 말하며 경기장에서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마야의 눈에는 선수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누구보다 불안한 건 마야였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팬이 된 만큼 팀이 위기에 빠져 팬들도 불안해하고, 선수들의 얼굴이 나빠지는 걸 본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마야의 눈앞에 찰랑거리는 맥주를 담은 플라스틱 잔이 나타났다. 옆에 앉은 남자가 잡고 있었다.
“얘기 잘 들었어요. 이거 마시고 기분 풀어요.”
구불구불하고 살짝 붉은 머리, 볼에는 주근깨가 조금, 그리고 뿔테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향의 남성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댁은 누구세요?”
마야의 옆에 앉은 손민국이 급히 끼어들었다.
남자는 얼떨떨해 보이는 마야와 손민국을 한 번씩 보고는 능글맞게 웃었다.
“오해한 것 같은데··· 휴고.”
“아빠, 왜요?”
남자의 몸에 가려져 있던 꼬마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남자와 똑같은 붉은 머리에 젖살이 빠지지 않은 탱탱한 볼이 매력적인 꼬마였다.
“이만한 애도 있는 사람인데, 젊게 봐 줘서 고맙네요. 웨인 리처드라고 합니다. 제 아들은 휴고 리처드, 그리고 저 할아버지는 고든 리처드입니다.”
“할아버지라니! 아직 육십밖에 안 됐어!”
“아무튼, 좋은 얘길 들어서 맥주를 선물하고 싶었거든요. 여러분은 트렌트 대학교나 노팅엄 대학의 학생들이죠?”
손민국은 자신이 과민반응 했다는 걸 깨닫고, 부끄러워진 나머지 사과하고 바로 자리에 쪼그라들어 다른 친구들의 놀림을 받았다.
마야는 맥주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네, 트렌트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그럼 이번 시즌부터 응원을 시작한 건데···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분위기가 안 좋을 때는 경기장에 오기 쉽지 않은데.”
“오늘은 잘하지 않을까 싶어서···.”
마야의 말에 웨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야를 보니 자신의 십 대 시절이 떠오른 웨인이였다.
“처음부터 그런 마음으로 응원하면 오래 못 가요.”
“네? 그럼···.”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즐기면 돼요.”
“어떻게요?”
“놀면서요.”
*
“하하하, 먹혔네요. 멍청한 놈들. 그럼 다 같이.”
“Cheers!”
경기는 전반 중반에 들어섰고, 팀은 막 골을 먹힌 참이었다.
하지만 마야 무리와 리처드 삼대의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맥주 한 잔을 단숨에 비운 마야가 말했다.
“아으, 이러다 취할 거 같은데.”
“술 말고 이거 마시면 돼요.”
“어음··· 하하하, 맥주 먹을래요.”
웨인이 가리킨 건 아들 휴고가 꾸역꾸역 마시고 있는 건강 주스였다. 집에서 만들어 온 이 건강 주스는 초록빛 자태를 내뿜으며 자신을 마시면 얼마나 건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만 이거야··· 힝···.”
어린 휴고는 술을 마실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걸릴 때마다 이 주스만 마셔야 했다.
“이거 재밌네요. 선수들이 실수할 때 열도 덜 받고.”
“창단 때부터 노팅엄을 응원해온 우리 리처드 가(家)에 내려오는 비법이랍니다.”
리처드 삼대와 마야와 친구들은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각자 선수들을 하나 선택하고, 그 선수가 실수하면 한 잔씩 벌칙 음료를 마시는 거였다. 만약 골을 먹히면 다 같이 마셔야 했다.
좋은 플레이를 할 때는 푸드 코트에서 사 온 음식들을 안주처럼 먹을 수 있었다. 당연히 골을 넣었을 때는 다 함께 먹을 수 있고.
이들은 축구 경기를 이용해 일종의 술자리를 즐기고 있었다.
유쾌하게 노는 이들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야와 가볍게 다퉜던 40대 아저씨 3인방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도 해 볼까?”
“따라 하는 것 같아 찜찜하긴 하지만···.”
“저 아가씨 말대로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네.”
경기장을 찾은 노팅엄 팬들에게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
현재 스코어 1-0.
침묵에 잠긴 드레싱룸의 선수들은 잭슨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잭슨이 들어온 지 1분, 잭슨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잭슨은 오늘 꼭 이기고 싶었다.
팀을 찾지 못한 나이든 자신을 받아주고, 최고의 감독이 될 거라고 매일 말해주는 김도운에게 승리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전 세 경기에서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상대 팀을 분석해 어떻게든 무승부를 만들어냈다. 절반 이상이 사라진 스쿼드로 승리까지는 어려웠다.
하지만 잭슨은 무승부가 아닌 승리를 원했다.
전반전에는 투입하지 못했던 선수들을 보며 잭슨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이들을 오늘 써도 되는 걸까.
자신의 선택에 따라 만 명이 넘는 팬들이 즐거워할 수도, 슬퍼할 수도 있기에 잭슨은 최대한 냉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김도운은 어제 세 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프리미어리그 최상위 팀, 맨체스터 시티 유망주 중 훌륭하다고 손꼽히는 바비 스미스라는 중앙 미드필더와 2부, 3부 리그에서 주로 뛰었던 경력을 가진 두 선수였다.
셋 다 적어도 3부 리그급 기량은 된다. 영입 전, 영상으로 어느 정도 파악한 선수여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수에 대한 파악이 부족했다. 선수 간의 호흡도 거의 맞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 선수진 그대로 둬도 무승부까지는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잭슨의 감이 이들을 투입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한, 4연속 무승은 안 된다. 부진은 최대한 빨리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잭슨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들이 칼과 유소년들처럼 김도운이 선택한 선수라는 사실도 함께.
결국, 잭슨은
“바비, 알버트, 사무엘 후반에 들어간다.”
“예!”
신뢰해보기로 했다.
*
“아가씨, 아까는 미안했어. 이름이 뭐야?”
“마야, 마야에여. 갱차나여. 우리는 하나자나여. 노팅엄이자나여.”
하프 타임, 40대 아저씨 셋은 마야와 친구들에게 다가와 사과했다. 그리고 마야와 친구들 옆자리 사람들과 좌석을 바꿔 이제는 리처드 삼대 – 마야와 친구들 – 40대 아저씨 셋 구도로 후반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히 좀 마시라니까.”
“알렉상더가 그럴 줄 몰랐쥐···.”
손민국의 핀잔에 마야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반전, 알렉산더는 평소보다 실수를 많이 했다. 자신의 술 게임을 위한 선수로 알렉산더를 고른 마야는 맥주를 수없이 들이켜야 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아직도 알렉산더가 괜찮은 것 같아?”
“예에, 알렉상더는 애초에 활동량이 많은 스트라이커가 아니자나요? 원래는 할뤼가 알렉상더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었는데, 근데! 할뤼가 멍청하게 사라졌으니 훨씬 더어어 많이 세 경기 동안 뛰어야 했자나여. 오늘 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죠오. 선수들이 매주 잘할 수는 없자나여.”
“이야, 마야한테 한 수 배워야겠네.”
“헤헤헤.”
그때, 필드 위에는 후반전을 위해 선수단이 다시 입장하고 있었다.
“어?”
“선수가 바뀌었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마야는 허리를 쫙 폈고, 세 명의 선수를 찾을 수 있었다.
어제 낮에 영입을 완료한 선수들이었다.
마야는 고개를 들어 관계자 석을 바라보았다.
김도운이 팔짱을 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