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노팅엄 팬 포럼 (1)
스포츠 구단들이 팬 포럼을 개최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팀 성적의 부진을 해명하기 위해서다. 나도 회귀 전에 팀이 6연패를 하는 바람에 팬 포럼을 열었다가 맞아 죽을 뻔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팬 포럼은 일반적으로 ‘팬 서비스’ 및 ‘팬들을 위한 서비스 개선’을 위해 치러진다.
지금의 우리처럼.
“참가자들한테 메일 다 보냈어.”
“경기 시작 3시간 전, 드레싱룸 맞지?”
“응.”
조이와 나는 팬 포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마실 건? 특히 맥주.”
“아빠한테 말해 놨어.”
“좋아. 어린이들을 위한 건? 네 명이었지?”
“문제없어. 쿠키부터 오렌지 주스에 각종 탄산음료까지, 완벽하다고. 킷 매니저(장비관리사, 선수들의 유니폼, 축구화 등을 관리한다)에게 드레싱룸 미리 경기 전 상태로 준비해놓으라고 전달도 했고, 네가 준 자료로 팸플릿도 만들었어. 너야말로 준비는 많이 했어?”
팬 포럼은 드레싱룸에서 열기로 했다. 팬 20여 명에 나와 알렉산더를 포함한 구단 측 인원이 6명 정도라서 의자 몇 개만 놓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경기 날 열리는 만큼 선수들이 오기 전의 드레싱룸을 보여준다는 팬 서비스도 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었다.
“걱정 마, 매일 생각하고 매일 보는 것들인데. 지금도 줄줄 말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팬 포럼에서 남은 시즌 구단 행사와 다음 시즌 계획을 간략하게 발표하기로 했다.
노팅엄 TV에 올릴 거라 노팅엄의 모든 팬에게 전달한다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이번에도 잘 해보자.”
“오케이.”
조이는 나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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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넥타이 제대로 맸냐?”
“괜찮다니까, 몇 번을 말하냐.”
“도니는 못 믿겠어. 조이?”
“나한테도 네 번째야. 작작 좀 해라.”
오늘은 팬 포럼 날이었고, 곧 일찍 도착한 팬들이 들어올 시간이었다.
나와 조이는 우리 사이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구단주 제임스를 보며 웃다가 눈이 마주치고 크게 웃었다.
“조이? 돈? 왜 웃어요?”
“제임스 꼴이 웃겨서요. 구단주가 가장 긴장하고 있는 게 말이 되나.”
정장 차림으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마리아였다. 마리아의 트레이드 마크인 오렌지 색 단발머리는 어느새 어깨 아래까지 길어져 요즘에는 하나로 묶고 다니고 있었다.
묶은 머리를 보고 있으니 문득 벌써 한 시즌이 끝나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셋이 이렇게 함께 일할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다.”
조이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일 년이 다 돼 가네. 우리 4월 말에 파티할까? 도니가 돌아온 날에.”
조이의 말에 긴장을 푼 건지 제임스가 재잘대고 있었다. 조이는 당연히 좋다고 했다.
뭐, 시즌 말이고 지금도 열심히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제임스와 조이의 말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팀도 정말 잘하고 있잖아. 무려 5위야 5위. 이대로면 플레이오프에도 나갈 수 있고, 거기서 우승하면···.”
“승격을···.”
“야.”
나는 다급히 제임스를 불렀다.
제임스가 자기 입을 바로 막았다.
“그 입 좀 다물어, 부정 탄다니까.”
“하하하. 좋은 걸 어떡해.”
어느 분야에서든 설레발은 필패다. 최근 운영진들과 직원들, 그리고 선수들 사이에서는 ‘승격’이라는 단어가 금기어처럼 되어 있었다.
실제로도 너무 들뜨면 좋지 않다. 긴장이 풀어져 실수가 나오니까.
그때, 열려 있는 드레싱룸의 출입구에서 얼굴을 빼꼼 내미는 여자가 보였다. 주근깨가 많고, 웃는 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이었다.
“저기··· 여기에서 팬 포럼을···.”
“맞아요. 들어 오세요.”
*
“안녕하세요. 사장 겸 단장 김도운이라고 합니다.”
김도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마야는 조금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마, 마야 메이라고 해요. 트, 트렌트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와아, 미래의 의사 선생님이셨네요.”
“아니에요.”
“의사 선생님이 될 분이라고? 안녕하세요. 저는 제임스 휘팅엄이라고 합니다. 도니가 하는 거 구경만 하는 구단주예요. 나중에 우리 구단에서 팀 닥터로 일해볼래요?”
“어어어··· 생각해볼게요.”
“생각해본대!”
“야야, 적당히 해. 부담스러워하시잖아.”
“아, 죄송해요.”
정신없는 구단주까지 다가와서 한층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 둘이 끝이 아니었다.
“저는 행정팀장 조이라고 해요.”
“노팅엄 TV를 담당하고 있는 마리아 로스예요. 반가워요. 혹시 촬영이 불편하면 말해줘요. 알아서 편집할게요.”
“보안팀의 펠릭스라고···.”
“네에에···. 반갑습니다···.”
엄청나게 부담스러웠지만, 대접받는다는 느낌만큼은 확실히 받았다.
이어서 들어오는 팬들에게도 이들은 일일이 인사했다.
어느 정도 차분해진 마야는 팬들 속에서 익숙한 얼굴 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웨인? 휴고!”
“어라? 마야?”
휴고가 쪼르르 달려와 마야의 옆에 앉았다. 웨인은 마야와 제대로 인사하고 휴고 옆에 앉았다.
“고든은요?”
리처드 삼대 중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마야의 물음에 웨인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추첨에서 떨어졌죠.”
“어떡해, 실망하셨겠다.”
“근데 혼자 왔어요? 친구들은요?”
“시즌권을 산 건 저밖에 없었거든요.”
“아하.”
그때, 김도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야라고 했죠. 거기까지 잘 들려요?”
“아, 네!”
“다들 시간보다 빨리 와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알렉산더까지 오면 시작할게요.”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정장을 입은 알렉산더가 드레싱룸 안으로 들어오다가 잠시 멈칫했다. 제시간에 왔는데도 벌써 사람들이 다 모여있어 당황한 것 같았다.
평소 트레이닝복이나 유니폼만 입은 모습을 봐서 마야는 더 관심 있게 알렉산더를 바라봤다. 팬들의 표정이 전체적으로 밝아졌다. 김도운 같은 직원들보다는 아무래도 매주 보는 선수가 더 익숙하니까.
“캡틴, 여기 앉아요.”
“고맙다.”
알렉산더가 김도운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다시 한번 인사드릴게요. 저는 이 구단의 단장 겸 사장, 김도운이라고 합니다.”
드레싱룸에 모인 팬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김도운은 팬들을 하나하나 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여기 와서 팬 포럼은 처음 열어보네요. 원래는 1월 말에 열 생각이었는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런 분위기에서 팬 포럼을 열었다가는 제가 엄청 욕을 먹거든요. 축구에나 신경 쓰라고. 그래서 오늘로 미뤘어요. 제가 그런 걸 무서워해서.”
김도운이 익살스러운 얼굴로 양손으로 양팔을 감싸 쥐는 시늉을 했고, 마야를 비롯한 팬들이 모두 웃었다.
“먼저 남은 시즌 동안의 행사계획과 다음 시즌 계획을 제가 간략하게 발표할 거예요. 발표가 끝나면 그에 대한 질문이든 다른 질문이든 팬 여러분이 궁금했던 점이나 이랬으면 좋겠다··· 싶은 걸 자유롭게 말씀해주시면 돼요.”
김도운은 손에 든 작은 리모컨을 눌렀다.
드레싱룸 벽에 걸려있는 디스플레이가 켜졌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4월에는 팬들이 뽑은 올해의 팀, 올해의 선수,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골키퍼 상에 관한 투표를 시즌권 소지자들을 대상으로 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오오.”
김도운이 리모컨을 한 번 더 눌렀고, 팬들 사이에서 작은 소요가 일었다.
화면에는
<2023-24 노팅엄 푸드 페스티벌>
이라고 적혀 있었다.
“작년에 이어 노팅엄 푸드 페스티벌을 마지막 경기에 또 개최할 거예요. 선뜻 투자해주신 우리 구단주님께 박수!”
이번에는 정말 큰 박수가 드레싱룸을 채웠다. 제임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가게 사장님들과도 협의 끝나서 이 행사는 확정이에요. 포럼이 끝나는 대로 공식 홈페이지와 SNS에도 공지를 올릴 겁니다.”
김도운은 페스티벌에 추가로 섭외할 음식의 종류를 추천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페스티벌을 마지막으로 이번 시즌 일정이 끝납니다. 그리고, 다음 시즌 영입계획은··· 두 가지 준비돼 있습니다. 그에 따른 선수 명단도 다 정리돼 있죠.”
“왜 두 가지인가요?”
한 팬이 손을 들고 물었다.
“원래는 즉시 전력감이 될 수 있는 선수들의 명단을 준비했어요. 다음 시즌에도 이 리그에 머무를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이번 여름 이적시장에 그 선수들을 영입해 다음 시즌에는 압도적인 1위로 3부 리그로 올라간다는 게 제 계획이었는데··· 시즌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우리 노팅엄 FC는 리그 5위를 달리고 있죠.”
마야는 김도운의 말을 이해했다.
바로 3부 리그에 올라갈 수 있는 리그 3위와도 승점이 4점밖에 차이가 안 난다.
플레이오프도 7위 안에만 들면 참가할 수 있다. 4~7위 팀 간의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해도 3부 리그로 갈 수 있고.
“그래서 2부리그를 대비할 수 있는 유망주의 명단도 다 정리했습니다. 벌써 접촉하고 있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팬분들이 저와 스카우트팀을 믿어주시기만 한다면 이번 시즌이 끝난 후에 어느 팀보다도 빨리 팀을 정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김도운은 이어 다음 시즌에 개선될 점들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노팅엄의 한 디스플레이 업체에서 후원을 받아 경기장 복도에 대형 디스플레이들을 설치한다고 했다.
위치는 가게들 사이의 중간지점, 이곳에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푸드 코트를 이용하는 동안에도 경기를 볼 수 있게 한다고 했다.
현재 폐쇄돼있는 만 석을 재개장하는 건 논의 중이라고 했다.
아예 좌석 수를 줄이고 프리미엄 좌석을 만드는 걸 고려 중이라고 했다.
“푯값은 1.5배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신 테이블이 있고, 의자 사이의 간격도 넓어서 훨씬 더 편하게 경기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가능하면 경기장 내에서 고기를 구울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김도운은 더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야는 김도운의 계획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일반 좌석에서는 음식을 먹기가 정말 불편했다. 맥주잔을 따로 놓을 곳도 없어서 손에 든 채로 경기를 봐야 했다.
그래서 프리미엄 석을 만든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고기까지 구울 수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마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왜 안 되는 건가요?”
“축구 협회와 시에 문의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안전장치를 해 두어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왜요?”
“어떤 기구를 쓸지는 모르겠지만, 고열을 내는 장비가 경기장 안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아···.”
“대신, 경기장의 관중과 접촉할 수 없게 투명한 벽으로 막아놓은 공간이라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건 비용대비 효용성 문제 때문에 당장 다음 시즌 도입은 어려울 것 같고···.”
김도운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머리에 다 들어있는 건지 어느 순간부터는 화면을 넘기지도 않고 다 말로 하고 있었다.
“구단 원정 버스가 아주 낡아서 새 버스를 사거나 빌릴 계획입니다.”
알렉산더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코치진을 확충할 계획이며, 유소년 아카데미 단장도 새로 뽑을 계획입니다. 한동안 노츠 카운티에게 뺏겼던 지역 유망주들을 다시 노팅엄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와와!”
“그리고···.”
선수들이 경기와 훈련 후, 컨디션을 유지하기 쉽도록 스포츠마사지사를 데려오겠다고 했고, 돈이 남는다면 스포츠과학자와 함께 아이스 체임버나 수영장 같은 시설을 설비해놓고 싶다고 했다.
처음에 신나서 듣던 팬들은 점점 질린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김도운이 앞으로 하고 싶은 걸 계속 늘어놓고 있었다.
마야는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는 웨인을 불러 작게 귓속말했다.
“구단 운영비가 잘못 쓰일 일은 없겠네요. 우리 단장님이 돈 생길 때마다 다 써버릴 것 같아요.”
마야의 말에 웨인이 웃었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김도운은 정말 신나 보였다. 열정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수준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은 웨인이 마야에게 귓속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만 둔다면, 우리 구단을 틀림없이 더 좋게 만들어 줄 것 같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