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노팅엄 팬 포럼 (2)
“야, 야. 시간 초과야.”
제임스의 만류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경기장 주변 부지를 확보해 외부까지 경기장의 일부로 만들겠다는 계획까지 늘어놓을 뻔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손에 쥔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제가 너무 신났었네요. 이제 팬분들의 의견을 들어볼까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점점 활발하게 손을 들고 이랬으면 좋겠다, 이게 불편하다 같은 의견들이 나왔다.
필요에 따라 조이가 대답하기도 하고 마리아가 대답하기도 하고, 내가 대답하기도 했다.
나는 팬 포럼을 좋아한다.
내가 놓칠 수 있는 것들을 깨달을 소중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물론 팬들의 의견을 무조건 따랐다가는 운영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보통 참고만 한다. 활용만 잘한다면 계획의 디테일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된다.
“팬숍의 기념품 규모를 더 늘렸으면 좋겠어요.”
“어떻게요?”
“지금은 한 가지 종류의 머플러밖에 없는데, 우리 팀의 색 패턴을 이용하기만 한다면, 다른 여러 문양도 가능할 것 같아서요. 통일감과 개성을 동시에 줄 수 있거든요.”
“좋은 의견이네요. 참고하겠습니다.”
노팅엄 대학에서 옷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는 학생의 말이었다. 저 학생은 연락처도 따로 확보해서 얘기를 더 해 봐야겠다.
알렉산더, 로드, 칼, 라이언 같은 잘 팔리는 유니폼들 또한 미리미리 확보해놔 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이어 했다.
“푸드 코트의 음식량이 많은 건 좋은데··· 작은 용기를 만들어서 한 손으로 편하게 쥘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커도 좋으니까 맥주잔을 끼울 수 있는 용기가 나와도 좋을 것 같은데.”
“와, 그거 괜찮네요.”
팬들이 서로 이야기하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잔을 끼울 수 있는 용기는 이번 페스티벌에서 실험해 볼 계획이었습니다. 작은 용기도 참고하겠습니다.”
내 말에 팬들은 만족스러워했다.
시즌권을 사면 구단에서 선물로 보내주는 기념품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쓸 일 없는 물건이 많다고 말했다.
나는 전 시즌 유니폼과 현 시즌 유니폼을 섞어 랜덤하게 보내주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고, 팬들은 좋아했다.
점점 질문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새 소재를 꺼내 들었다.
“축구 외적으로 즐길 거리에 관한 의견은 없을까요?”
아까 프리미엄 석 얘기에 열심히 호응해줬던 마야가 손을 들었다.
“트렌트 대학교와 노팅엄 대학의 클럽이 하프타임에 공연하면 어떨까요? 제 친구 중에 둘이 밴드 클럽에 들어가 있는데 공연 장소를 찾는 데 늘 애를 먹거든요.”
먼저 공연의 질 문제를 떠올렸다가, 금세 괜찮다고 판단했다.
이번 시즌도 시와 연계해서 취미 수준인 60세 이상 합창단이나 어린이들 밴드도 공연했었던 적 있었는데 뭐가 문젤까 싶었다.
“공연 스타일에 따라 경기 전 복도에서나 경기 밖 출입구 근처에서 진행해도 괜찮겠네요.”
“그러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대학교와 대학의 클럽뿐만 아니라 길거리 음악가를 수용해도 괜찮겠고··· 정말 괜찮네요. 잘 구성해서 다음 시즌에는 꼭 진행해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마야는 두 손을 불끈 쥐면서까지 기뻐했다.
*
“가장 재미있는 선수는 누구예요?”
“재밌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할리입니다. 저는 재미보다는 골치가 아파서 말입니다. 허허.”
경기장에서 늘 호통을 치던 잭슨의 부드러운 모습에 팬들이 어색해하고 있었다.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을 지나, 가벼운 질문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주로 알렉산더와 잭슨이 하고 있었다.
“저도 할리가 가장 재밌는 것 같습니다. 가끔 좀 귀찮을 때가 있긴 하지만, 할리 근처의 선수들은 늘 웃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말을 들은 팬들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휴고가 손을 들었다.
“캡틴! 아침에 뭐 먹어요?”
“콘플레이크, 계란후라이, 그리고 파프리카가 잔뜩 들어간 샐러드.”
“으··· 파프리카 너무 싫은데.”
“많이 먹으면 키도 쑥쑥 커.”
“정말요?”
팬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예요?”
“으음··· 난 우리 팀 선수들이 다 좋은데.”
“에이, 그런 대답은 언론용 대답이고요.”
이어지는 휴고의 말에 알렉산더가 당황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팬들은 소리 내서 크게 웃었다.
사소한 문답이 이어지다가 시간이 다 됐다는 조이의 말을 듣고, 질문 시간을 종료했다.
알렉산더와 잭슨은 드레싱룸에 선수들이 들어오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이야기해주며 사인과 함께 인증 사진을 찍어주었다.
슬슬 정리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오늘 유난히 눈에 띄었던 마야가 다가왔다.
“아까 못 물어본 게 있었는데요.”
“네. 물어보세요.”
“제가 축구팀을 응원하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데··· 이번 시즌이 끝나고 선수들이 많이 떠날까요?”
오늘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마야는 정말 그러면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이적에 관해서는 여기서 말하기 어려워요. 우리 구단만의 문제가 아닌 상대 구단, 에이전트, 선수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만약 전해야 할 소식이 생긴다면 빠르게 전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면피성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저번 시즌에도 열 명 넘게 방출하시고 그 정도의 선수를 영입한 거였죠?”
“예, 구단의 목표에 따라 선수단 구성도 달라져야 하니까요. 포럼 때 얘기했던 것처럼 추가 영입이 있을 겁니다. 선수단의 숫자에는 한계가 있으니 나가는 선수도 물론 있겠죠.”
“그런가요···.”
우리의 새 팬이 시무룩해졌다.
로드, 할리, 라이언은 잉글랜드 출신 열일곱 살짜리들이 프로 리그에서 뛰고 있었기에 아주 큰 관심들과 혹할 만한 제안들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이 셋은 이 팀과 지역에 애착이 많은 로컬 보이였다. 또한, 로드는 알렉산더와 라이언은 노아와의 관계 때문인지 눈이 돌아갈 만한 제안에도 꿈쩍도 안 했다.
할리도 계속 이 팀에 있고 싶다고 말했다.
셋은 곧 재계약을 할 예정이었다.
칼에게는 계약상 붙잡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제안이 들어왔고, 벨기에에서 영입해 온 다른 선수들에게는 생각보다 좋은 제안이 들어오지 않아 한 시즌 더 데리고 있을 생각이었다.
아무튼, 꽤 많은 선수가 그대로 남을 것이다. 마야를 시무룩한 채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많은 선수가 남을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 운영진도 힘낼 거고요.”
“아, 네.”
“처음 팀을 응원하시는 거라고 해서 말해드리는 건데, 선수는 떠나더라도 팀은 늘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이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보통 일반인이 서포터가 되는 과정은 ‘선수의 팬이 된다’ -> ‘팀의 팬이 된다’의 단계로 나아간다. 이 팬이 다음 단계를 확실히 밟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바로 나 같은 운영진이 해야 할 일이었다.
“팬 포럼에 와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재계약 소식부터 가져올게요.”
“아, 이런 자리 만들어주셔서 감사했어요.”
**
“칼! 받아!”
오스트리아의 주장, 다비드 알라바에게서 공을 건네받은 칼은 빠른 드리블로 상대 팀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노팅엄에서 우측 윙으로 뛰고 있는 칼은 오늘 성인 국가대표팀으로 데뷔전을 치르고 있었다. 포지션은 왼쪽 윙, 다비드 알라바와 왼쪽을 휘저어 놓으라는 게 국가대표팀 감독의 지시였다.
다비드 알라바는 칼이 움직여줘서 생긴 측면의 공간으로 달렸다.
칼은 무섭게 쫓아오는 스페인의 우측 윙 세바스티앙 로드리게스가 도착하기 전 곡선을 그리며 페널티박스 안으로 침투하는 다비드 알라바의 앞으로 패스를 보냈다.
다비드 알라바는 침착하게 공을 잡고, 각도가 없는 위치였지만 과감하게 슛을 해 스페인의 골망을 갈랐다.
최종 스코어 2-1. 선제골은 넣었지만, 결국 오스트리아는 졌다.
유럽 최강팀 중 하나인 스페인이 상대였기에 오스트리아를 비난하는 여론은 거의 없었다.
대신, 잉글랜드 4부리그에서 뛰고 있는 10대이자 전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 출신인 칼 슈나이더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훌륭한 경기력에 1어시스트를 더하며 자신의 가치를 전 유럽에 입증했기에.
*
경기 시작 전만 해도 우리는 무척 신나 있었다.
“이거 봐! 드디어 우리 구단에서 국가대표가 나왔어!”
“파머 아주머니한테 훈련 식단 오스트리아식으로 해 달라고 말해봐야겠다.”
“그거 좋은데?”
제임스와 나는 모처럼 집에서 입는 헐렁한 옷을 대충 입은 채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바로 유럽 최강국 중 하나인 스페인과 칼의 데뷔가 확정된 오스트리아와의 친선경기.
그리고 경기가 진행될수록 나와 제임스의 말수가 줄었고, 칼이 어시스트를 했을 때는 정말 기뻐하다가 금세 가라앉았다.
경기 후, 기자들이 칼을 따로 붙잡아 인터뷰하는 걸 보고 분명히 깨달았다.
칼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
스페인에서 런던으로는 비행기, 런던에서 노팅엄까지는 기차로.
긴 여정에 지친 칼 슈나이더는 졸다가 노팅엄역에서 못 내릴 뻔했다.
부랴부랴 일어난 칼은 잠에 방해될까 꺼둔 스마트폰을 집고, 캐리어를 끌어 노팅엄역 밖으로 나왔다.
“에휴···.”
스마트폰 배터리가 언제 다 됐는지 켜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뭐, 집에 가서 켜면 되니까. 여기서 집까지는 걸어서 40분밖에 안 걸렸기에 칼은 스마트폰도 캐리어에 집어넣은 후, 역을 나섰다.
스페인에 있을 때만 해도 괜히 긴장되고, 돌아다니기가 무서웠는데 여기는 달랐다.
익숙한 색의 지붕과 길이 칼을 반겨주고 있었다.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칼은 일단 주변을 살핀 후,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칼 슈나이더~ 칼 슈나이더~ 우리에겐 칼 슈나이더가 있지~.”
노팅엄 FC에서 뛴 지 다섯 경기 만에 서포터에서 만들어준 응원가였다. 자신이 활약할 때마다 들리는 이 응원가를 선수들이 옆에서 부르며 놀리기도 했지만, 칼은 솔직히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두 블록 더 가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간 후 번화가를 가로지르는 게 지름길이었다.
골목에 들어서고 나서야 자신이 이제 여기에 지도도 안 보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적응했다는 걸 깨달았다.
모자 아래 선글라스까지 눌러쓰고 있었지만, 번화가라 그런지 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와 작게 말을 걸었다.
“슈나이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사인 좀 부탁할 수 있을까요?”
“길 끝에 가서 해 드릴게요.”
“저는 사진 좀.”
“네.”
슈나이더가 사람들을 하나둘 몰고 다니기 시작하자, 이곳에 식사나 물건을 사러 자주 들르는 슈나이더를 알아본 사람들이 하나둘 인사했다.
“슈나이더! 오스트리아전 활약 잘 봤어!”
“감사합니다.”
“빨래 맡겨 놓은 거 언제 찾아갈 거야?”
“아, 맞다. 이따 에이전트랑 다시 올게요.”
“과일 하나 먹고 가.”
“감사히 받을게요.”
칼은 번화가를 간신히 빠져 나왔고, 어느새 사람들이 수십 명 몰려 있었다.
칼은 그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고 인증 사진을 찍어줬다.
“슈나이더는 늘 웃고 있어서 좋아요.”
“제가요?”
한 팬의 말에 칼이 되묻자, 그 팬은 방금 자신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 속 자신은 정말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웃고 있었던 건가 싶어 칼은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꼈다.
그러고 있으니 팬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이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한 팬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기, 슈나이더. 방금 이 기사 봤는데···.”
“기사요?”
독일의 언론에서 나온 두 개의 기사를 동시에 인용한 노팅엄 지역지였다.
내용을 확인한 칼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르트문트 마이어 단장 “칼 슈나이더는 차세대 마르코 로이스. 스카우트가 반 시즌 동안 관찰해 왔다. 우리는 뮌헨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바이에른 뮌헨 람 단장 “칼 슈나이더는 원래 우리 선수다. 그의 대표팀 동료이자 우리 팀의 레전드인 다비드 알라바가 강력하게 추천한 선수이기도 하다. 반드시 영입할 것이다.”]
독일 최고의 두 팀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