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은 (2)
노팅엄은 무려 5-0으로 대승했다.
노팅엄 더비에서 패한 노츠 카운티의 선수들은 필드를 도망치듯 떠났다.
칼은 네 골을 넣었고, 알렉산더의 마지막 골을 어시스트했다.
흠잡을 데 하나 없는 몹시 만족스러운 경기였다.
자신의 대활약 덕에 노팅엄은 최소 몇 년, 길면 수십 년 동안 노츠 카운티를 놀릴 수 있는 대승을 했다. 분명 노팅엄 팬들은 이 경기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칼 슈나이더는 열광하는 원정 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칼에게 선수들이 다가왔다.
“역시!”
“역시야!”
칼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할리와 로드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린 채 실실거리고 있었다.
“역시 뮌헨에서 찍은 남자!”
“역시 도르트문트··· 헉.”
할리와 로드는 최근 칼을 놀리는 걸 즐기고 있었다. 칼은 벌떡 일어나 황급히 도망치려는 둘의 유니폼을 붙잡았다.
“으악, 할리가 시켰어!”
“거짓말 마. 로드, 네가 칼 놀리는 거 꿀잼이라고 같이 하자고 했잖아.”
“이 자식들이.”
칼은 둘을 쭉 당겨와 양팔로 둘의 머리에 헤드록을 걸었다. 할리와 로드는 순순히 붙잡혔다.
“잘못했어.”
“살려줘, 아파.”
그때 라이언이 다가왔다. 라이언은 근육통 때문에 오늘 출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였다. 라이언은 고통스러워하는 할리와 로드를 보며 한쪽 입가만 올린 채로 물었다.
“또?”
“어, 얘네는 진짜 구제 불능이야.”
“야, 라이언. 근데 솔직히 오늘은 얘 뮌헨에서 찍은 남자답지 않았냐? 아악!”
“할리···.”
칼은 음산하게 말하며 할리의 작은 머리를 더 세게 조였다. 항복, 잘못했어라는 말이 나온 후에야 칼은 할리와 로드의 머리를 풀어주고, 그대로 둘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셋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됐다.
칼이 말했다.
“다리에 힘없으니까 잘 부축해.”
“넵.”
“옙.”
그때 어느새 근처로 온 알렉산더가 이들을 불렀다.
“그만 놀고 빨리 와라.”
“예!”
로드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할리는 여전히 느릿하게 걷고 있었기에 중간에 낀 칼은 휘청거려야 했다.
칼과 할리는 로드를 어이없다는 듯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드와 칼, 할리는 속도를 맞춰 걸었고 원정석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수들은 환호하는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칼이 도착하자 경기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이 쏟아졌다.
<와아아아아!>
<칼 슈나이더~ 칼 슈나이더~ 우리에겐 칼 슈나이더가 있지~>
칼은 이어지는 응원가를 만족스럽게 듣다가, 응원가를 능글거리는 투로 따라 부르기 시작한 선수들에게 인상을 썼다.
이윽고 원정석 앞에 선수들이 다 모였다.
“자, 다들 자리 잡아.”
카메라를 든 마리아의 요청에 선수들이 원정 팬들을 배경 삼아 나란히 섰다.
이렇게 모인 이유는 칼의 제안 때문이었다.
*
며칠 전, 칼은 알렉산더를 찾아왔다.
“캡틴, 경기가 끝나고 팬들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는 건 어떨까요?”
“지금도 가끔 찍는데?”
“경기마다··· 아니, 이길 때마다 찍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런 게 하나하나 쌓이면 좋을 것 같은데··· 안 될까요?”
시즌 초반의 칼은 스스로 외톨이가 되려고 하던 외국인이었다.
그랬던 칼이 어느새 영어를 써서 팀을 위한 의견을 내고 있었다.
‘젊은 선수들은 정말 빨리 변하는군.’
알렉산더는 칼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줬다.
칼이 훈련장을 떠난 후, 알렉산더는 김도운을 만나러 갔다.
“···칼이 이런 제안을 했어.”
김도운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김도운이 물었다.
“자기 나름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네요.”
“그렇지.”
“아쉽네요. 캡틴은 어때요?”
“어쩔 수 있나. 그동안 한두 명 떠난 것도 아니고··· 앞으로 잘 되길 빌어줘야지. 칼은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알렉산더의 말에 김도운은 쓸쓸하게 웃었다.
“아무튼, 이렇게 된 거 칼이 떠난 후에도 경기 후에 서포터들 배경으로 사진을 찍죠. 칼 말대로 모이면 앨범으로 만들어도 좋고, 사진 하나하나가 팬들에게 기념이 될 수도 있고.”
*
“바비, 좀 더 활짝 웃어야지. 라이언, 좀 더 옆으로 붙어.”
마리아에 주문에 따라 선수들이 움직였다. 뒤의 팬들도 사진 안에 들어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찰칵.
기념사진을 찍는 건 금방이었다. 선수들은 다 같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드레싱룸으로 향했다.
“칼, 뮌헨이랑 계약할 거야 도르트문트랑 계약할 거야?”
“아직 얘기도 안 해 봤어.”
“응? 왜?”
“계약논의는 시즌 종료 후로 미루겠다고 했거든. 플레이오프에 간다면, 플레이오프까지 끝나고 하기로 했어.”
라이언의 물음에 칼이 답했다.
로드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어차피 여름에 이적하는 거 지금 계약서에 도장 찍어버리지.”
“그렇게 되면 남으면 돼.”
“와우, 쿨해, 멋져.”
칼의 대답에 할리와 로드, 라이언이 추임새를 넣었다.
“남은 경기에나 집중하자. 지금 기세대로라면 승격 직행도 가능하잖아?”
“노츠 카운티가 3위로 내려왔고, 우리랑 승점이 4점 차니까··· 노츠 카운티가 미끄러져 주기만 하면 가능하겠다. 우리도 다 이겨야겠고···.”
최종경기인 46라운드까지 다섯 경기가 남았다.
칼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일단 다 이기고 생각하자.”
**
“하하하하하하하.”
“올라갔다고! 올라갔어! 승격이야! 우리는 3부 리그로 간다!”
45라운드 종료 직후, 노츠 카운티의 구단주와 CEO가 구단주실에서 격하게 기뻐하며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망할 노팅엄 녀석들에게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냈다.
구단주는 지난번 더비 경기가 끝나자마자 드레싱룸에 찾아갔었다.
그리고 기운 빠져 있는 선수들에게 일갈했었다.
‘오늘 경기는 잊어! 대신, 리그는 절대로 지면 안 돼! 더비 경기에서 한 번도 못 이겼는데, 리그 순위까지 노팅엄 애들보다 떨어질 거야? 너희도 선수로서 자존심이 있잖아!’
선수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조건까지 덧붙였었다.
‘노팅엄 FC보다 높은 순위로 시즌을 마감하면 계약서에 명시된 보너스를 두 배로 주지.’
일갈이 효과적이었는지 조건이 효과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츠 카운티의 선수들은 노팅엄에게 당한 대패를 금방 잊고 네 경기 연속으로 승리했다. 괜히 1위를 달리던 팀이 아니었다.
노팅엄도 마찬가지로 4연승이었지만, 남은 한 경기로는 승점 4점 차를 좁힐 수 없었다. 1승으로 얻을 수 있는 승점은 3점이니까.
순위표로 볼 때는 고작 한 단계 차이었지만, 4부 리그에서 3위와 4위의 차이는 아주 컸다.
1위와 2위, 3위는 바로 3부 리그로 승격하고, 4위부터 7위까지는 플레이오프를 통해 한 팀만이 승격할 수 있었다.
4위와 7위, 5위와 6위 팀끼리 홈&어웨이 방식으로 두 경기를 치러 이긴 팀들끼리 웸블리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러야 했다.
서로가 만만한 팀이 아니었기에 리그 4위가 아닌 6, 7위가 승격하는 일도 아주 빈번했다.
노츠 카운티의 구단주는 진심으로 노팅엄이 올라오지 않길 빌었다.
분명 3위를 했는데도 노팅엄에 두 판 다 지는 바람에 노츠 카운티 팬들의 인심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문제로도 팬들의 불만은 많았다.
팬들의 불만 때문에 특히나 고생했던 CEO가 외쳤다.
“이제 팬들도 알아주겠죠. 노팅엄처럼 시설에 투자하는 것보다 선수단의 질을 향상하는 게 더 낫다는 걸!”
노츠 카운티의 운영진은 팬들의 의견을 메일로 받고 있었고, 팬들의 메일은 이번 시즌 내내 노츠 카운티의 CEO 스콧을 괴롭히고 있었다.
[노팅엄은 제대로 된 음식을 경기장에 들여놓았는데, 우리는 뭐냐?]
[노팅엄처럼 제대로 된 뮤튜브 채널을 만들어 달라. 우리도 노츠 카운티 선수들의 일상이 궁금하다. 지금 있는 채널은 유익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책임자를 갈아엎어라.]
[노츠 카운티 선수들도 노팅엄 선수들처럼 스토리가 있을 거 아니냐. 우리도 알고 싶다.]
[노팅엄은···.]
노팅엄은, 노팅엄은. 그놈의 노팅엄은!
스콧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노팅엄 노이로제에 걸렸다.
노팅엄의 사장 김도운이 뭔가 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메일함은 가득 찼고, 머리는 후두둑 빠졌다.
그래도 스콧은 착실하게 팀을 운영했다. 스콧은 김도운을 따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여유자금은 전부 선수단에 투자했고, 확실한 결과를 얻었다. 이번 시즌도 무려 3위로 3부 리그로 승격하지 않았던가.
연고 팀인 노팅엄과의 끊임없는 비교로 자신의 성과를 폄하 당한다는 느낌을 늘 받았지만, 이제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경기에서 팬들이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앞으로도 자신의 방식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스콧에게 구단주가 날벼락을 내렸다.
“선수단도 좋지만, 우리도 이제 시설과 엔터테인먼트에 투자해야지.”
“예?”
“노팅엄에게 아무것도 질 수 없어. 팬들이 즐길 거리를 원하면 만들어야지. 그게 우리 경영자들이 해야 할 일 아니겠나.”
김도운을 흉내 내는 것처럼 보일 텐데.
하지만 스콧은 노츠 카운티에서 잘리고 싶지 않았다. 조금 과격하고 무서운 구단주가 있긴 하지만, 이 직장은 월급도 많고 자유로웠다. 자신이 노츠 카운티의 팬이기도 했고.
그래서 스콧은 이렇게 말했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당연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오늘부터 열심히 준비할 것이다.
“오? 그래?”
“예! 다음 시즌도 기대해 주십시오. 노팅엄보다 더 대단한 팀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좋아좋아.”
노츠 카운티의 구단주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노츠 카운티의 CEO, 스콧도 따라 웃었다. 오늘은 구단주가 따라 웃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
제2회 노팅엄 푸드 페스티벌은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2만 객석이 가득 찼고, 팬들은 음식과 음료를 마시며 경기를 편하게 즐기고 있었다.
23-24시즌 마지막 라운드.
이 경기를 지든 이기든 노팅엄 FC의 순위는 확정됐기 때문이었다. 4위로.
“정말 아쉽다···. 노츠 카운티 이 지독한 놈들. 어떻게 한 번을 안 지냐. 저번 주에 떴던 그 인터뷰만 보면 아직도 열불이 나···.”
나 또한 그 인터뷰를 보자마자 업무도 다 때려치우고 제임스, 조이와 온종일 술을 마셨다.
[“더비에서 이기면 뭐 하나? 앞으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노츠 카운티 CEO, 스콧 라이트]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부상에서 좀 더 일찍 돌아왔더라면, 경기력을 빨리 회복했더라면, 선수단을 더 탄탄하게 다졌더라면.
원래 목표는 잔류였지만, 막상 승격 직행에 실패하니 후회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한다면 승격할 수도 있지만, 플레이오프는 워낙 변수가 많아서 걱정이었다.
팬들도 몹시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인터넷 커뮤니티나 뮤튜브 댓글, 그리고 경기장에서는 선수들에게 수고했다는 얘길 많이 해 주고 있었다.
“슬슬 내려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다녀올게.”
벌써 하프타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작년 페스티벌 때 했던 것처럼 짧은 연설을 하기로 했다.
계단을 내려가 필드 위에 도착했다. 직원이 건네주는 마이크를 받아 하프타임이 되길 기다렸고, 하프타임이 된 후에는 필드를 나오는 선수들과 감독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리고 필드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김도운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작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함성이 내게 쏟아졌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네요. 기쁩니다.]
팬들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작년은 18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는데, 이번 시즌은 몇 위죠?]
<4위! 4위! 4위!>
[평균관중은 5,000명을 목표로 했는데, 13,766명이나 와 주셨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번 시즌은 대성공입니다.]
이만 명의 시선 대부분이 내게 꽂혀 있었다. 관심도 없어 보이던 작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이번 시즌에 와줘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이번 시즌의 성과를 짧게 얘기했다. 팬들은 내 말이 끝날 때마다 환호했다. 마치 인기 프로레슬러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이번 시즌, 제 목표는 잔류였습니다. 선수들은 제 기대를 초월했어요.]
[팬들의 기대를 넘기도 했을 겁니다. 이번 시즌 정말 행복하지 않으셨습니까?]
팬들이 그렇다고 소리쳤다.
[그렇다면 남은 45분, 목이 터질 때까지 응원해 주세요.]
[그리고 다가오는 플레이오프에도 많은 관중이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수들에게 정말 큰 힘이 되니까요.]
원래는 남은 플레이오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온다 해도 선수들에게 박수를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팬들이 직접 결정할 문제다. 무엇보다 우리 선수들과 감독은 최선을 다할 거다. 지든 이기든 박수를 받아낼 것이다.
[남은 플레이오프, 저도 한 명의 팬이 돼서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후반전도 재밌게 즐기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