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은 (3)
“우리 팀이 축구의 성지에 오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도니, 대체 이게 얼마 만이야.”
제임스의 기쁨에 찬 말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무려 9만 석이라는 좌석을 가진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경기장, 뉴 웸블리 스타디움에 와 있었다. 축구의 성지는 이 경기장의 별명이었다.
“도니? 긴장돼?”
“당연하지.”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관중은 4만 명.
평소와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한 함성 속에서 우리 선수들이 투지 넘치는 모습으로 뛰고 있었다.
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FA컵 결승전, 리그 컵 결승전 등 잉글랜드의 중요한 경기들이 열리는 장소였다. 상위 리그로의 승격을 결정하는 플레이오프 최종전 또한 이곳에서 열린다. 그렇다. 우리는 플레이오프 최종전을 치르고 있었다.
플레이오프 1차전의 상대는 7위 팀 모컴이었다. 리그에서도 쉽게 이겼던 팀이었기에, 우리 팀은 공격적으로 나섰고 우리는 홈 경기와 원정 경기 모두 한 골도 실점하지 않고 쉽게 이겼다.
하지만, 이번 경기의 상대는 리그 5위 팀인 베리. 리그에서의 상대전적은 1승 1패로 비슷한 전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팀이었다. 또한, 이들은 지난 시즌에 플레이오프를 치렀던 경험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칼 슈나이더를 가지고 있다지만, 베리의 선수단은 전체적으로 경험도 많고 조직력도 좋았다.
그래서 선수들이 저렇게 헤매고 잭슨이 소리를 꽥꽥 지르고 있는 것이다.
“제발, 한 골만···.”
제임스의 간절한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오늘 경기에서 특별한 활약을 못 보여주고 있는 칼 슈나이더를 바라봤다.
**
칼이 패스를 받았다.
<와아아아아!>
감독은 오늘 경기장을 찾은 팬이 4만 명이라고 말했다.
노팅엄의 2만 명이 넘는 팬이 런던까지 원정을 온 거라고, 오늘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성토했었다.
칼은 감독의 말에 깊이 동감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앞으로 달리려는데 전방, 10시 방향, 좌측에서 베리의 선수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반복된 패턴이었다.
강한 압박에 칼은 어쩔 수 없이 뒤로 패스해야만 했다.
자신이 공을 놓자마자 일제히 흩어지는 베리의 선수들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 같았다. 칼의 패스를 받은 로드는 왼쪽으로 긴 패스를 보내 공격 방향을 바꿔봤지만, 왼쪽의 요한은 오히려 베리의 선수들에게 공을 빼앗겨버렸다.
“빌어먹을···.”
칼은 재빨리 수비진에 합류하기 위해 달렸다.
*
“다들 뭐 하는 거야? 전반전에 두 골을 먹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끔찍한 경기력이었어! 슈팅을 한 개 밖에 못 한 게 말이 돼?”
하프타임, 노팅엄의 드레싱룸은 마치 감독 잭슨 혼자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선수들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축구화만 보고 있었다.
“쟤네는 리그 최종 5위고, 우리는 4위야. 우리가 더 나은 팀이라고!”
칼은 코치에게서 체력 충전을 위한 바나나를 받았다.
전반전에 아무것도 못 한 게 너무 화가 난 칼은 괜히 바나나를 몇 번 더 씹어서 완전히 갈아버린 후에야 삼켰다.
잭슨의 말은 계속됐다. 칼은 잭슨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또, 이곳에 어느 팀의 팬이 더 많지?”
“우리 팀의 팬이 더 많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너희들! 정신 안 차려?”
칼의 대답에 이야기를 계속하려던 잭슨은 주변을 둘러보다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칼은 주변 선수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자신과 알렉산더 말고는 전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있어도 잭슨이 아닌 허공을 보고 있었다.
마치 패잔병들처럼.
그때였다.
“다들 고개 들고, 감독님을 똑바로 봐라. 너희는 혼자 경기할 생각이냐? 고개 숙이고 있으면 경기장에서도 혼자 뛰게 된다. 집중해라.”
알렉산더의 무겁고 굵은 목소리에 선수들이 하나둘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고맙네, 캡틴.”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칼 또한 괜히 더 집중하게 되었다.
잭슨은 가장 먼저 칼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정신 차리고 있는 게 너와 캡틴뿐이다. 전반전에 계속 막혔었지?”
“예.”
“더 막혀도 되니까 계속 드리블해.”
“예?”
칼의 물음에 잭슨이 단호하게 말했다.
“스스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넌 아직 긴장이 덜 풀렸어. 긴장을 풀기 위해서는 더 과감한 움직임이 필요해. 어차피 오늘 경기 뛰고 한동안은 푹 쉴 수 있잖아? 평소보다 두 배로 뛴다고 생각하고 뛰어. 그리고 알렉산더와 원투패스를 자주 시도하고. 너는 그거면 된다.”
“알겠습니다.”
잭슨은 이어서 선수들 하나하나를 붙잡고 간단한 지시만 했다.
대부분 칼에게 말했던 것처럼 한 발자국 더 뛰라는 얘기였다.
모두에게 지시를 마친 잭슨이 다시 경기장이 그려진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중요한 경기라는 건 잘 안다. 상대 팀의 컨디션이 무척 좋은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긴장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니까!”
이제 땅을 보는 선수는 없었다. 아직 눈이 불안해 보이는 선수들은 남아있었지만, 그들 또한 잭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시킨 것만 해라. 지든 이기든 다 내가 책임질 테니. 알겠나?”
“예!”
칼은 힘차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속으로 ‘평소보다 두 배로 뛰자.’라는 주문을 외우며 알렉산더의 등을 따라 다시 필드로 돌아갔다.
*
후반전 초반은 전반전과 매우 흡사했다.
노팅엄의 공격은 막혔고, 베리의 공격은 슈팅까지 이어졌다.
칼은 상대 팀 공격수의 슈팅이 빗나가는 걸 보고 안도했다.
“네가 해 줘야 한다.”
그때 뒤에서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은 말없이 알렉산더를 올려다 봤다. 알렉산더는 한 마디를 남기고 몸을 돌렸다.
“부탁한다. 내게는 시간이 별로 없어.”
칼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등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줬을 뿐이었다.
서른일곱 살의 알렉산더가 승격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는 충분히 느꼈다.
“칼! 부탁해요!”
우연인지, 알렉산더와 똑같은 말이 관중석에서 들려왔다. 칼은 관중석을 올려다 봤다. 한 붉은 머리 여자 팬이 자신의 이름을 외쳤고, 주변 사람들도 따라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응원가로 변했다.
<칼 슈나이더, 칼 슈나이더, 우리에겐 칼 슈나이더가 있지. 너희들이 어떤 팀이든 상관없어. 우리에게는 칼 슈나이더가 있으니까.>
칼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손뼉을 쳐 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몸 상태에 특별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죽을 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는 생각이 칼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헉, 허억···.”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칼은 후반전 내내 했던 드리블을 또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칼이 공을 잡자 수비수 세 명이 다가왔다.
칼은 망설이지 않고 가운데 수비수와 오른쪽 수비수의 사이 공간으로 치고 나갔다.
“막아!”
칼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못한 타이밍에 상대 수비수 둘이 칼의 양쪽으로 몸을 부딪쳐왔다.
결국, 몸싸움에 밀린 칼은 비틀거리며 공을 빼앗겼다.
“됐다!”
상대 수비수가 신나서 외쳤다.
이번 시즌 최고의 플레이어인 칼 슈나이더를 자신들이 아무것도 못 하게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방심이 칼에게 기회를 줬다.
칼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안 됐다.
칼은 다시 속도를 높였고,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 공을 가진 수비수의 다리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다.
“어?”
“막아!”
최고 속도에 도달한 칼은 계속 달렸다.
미드필더 하나가 다급히 쫓아왔지만, 하나 정도는 쉬웠다.
칼은 페널티박스 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바꿨고, 상대 미드필더는 휘청이며 멀어졌다.
할리는 먼 쪽 포스트에서 침투를 노리고 있었고, 알렉산더는 자신을 바라보며 수비수를 등지고 있었다. 칼은 망설임 없이 알렉산더에게 패스하고, 페널티박스 안으로 침투했다. 칼은 골키퍼와 남은 수비수들의 위치를 살폈다. 알렉산더를 볼 필요는 없었다.
툭.
당연히 자신의 발 앞에 패스해 줄 테니까.
골키퍼와의 일대일 찬스.
골키퍼는 순식간에 벌어진 노팅엄의 공격에 일대일을 막기 위한 곳도 아니고, 중거리 슛을 막기 위한 곳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었다. 칼은 최적의 슛 경로를 찾아냈다.
칼은 좁게 발을 여러 번 디디며 발끝으로 공의 아랫부분을 툭 찼다.
공은 골키퍼의 손에 닿지 않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골라인을 넘어갔다. 골망이 부드럽게 한번 철썩이고 가라앉았다.
칼은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양 주먹을 꽉 쥔 채로 소리쳤다.
“으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팬들의 함성이 쏟아졌고, 노팅엄의 선수들이 쏟아지듯 칼을 덮쳤다.
최고야, 멋졌어, 너밖에 없어 등 노팅엄 선수들은 진심 어린 칭찬을 하며 칼의 머리를 헝클고 어깨와 등을 두들겼다.
선수들이 세레머니를 마치고 하나둘 떠나간 후, 로드가 말했다.
“역시 도르트문트야!”
로드의 장난스러운 말에 칼이 로드의 다리를 툭 쳤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몇 분 남았어?”
“지금은 딱 90분이네. 추가시간은 5분! 내가 어떻게든 지켜볼게! 넌 정말 최고야!”
“좋아··· 어어?”
“아이고.”
비틀거리는 자신을 로드가 잡아줬다. 칼은 로드의 어깨에 손을 얹어 부축받았다.
마치 혼의 일부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집중했다니.
처음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뛰어본 건.
어떻게 이렇게 집중할 수 있었을까.
그저 경기 감각을 쌓기 위해 온 팀이었다.
목표는 이뤘다. 이곳에서 거의 모든 경기를 뛰었다. 도움왕, 올해의 선수상까지 받았다. 빅클럽의 제안까지 받았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을 여기서 얻었다.
김도운의 조언에 조금 더 어른이 되었고, 길거리에서 자신을 반겨주는 팬들을 만났다. 또한, 이렇게 어깨동무하고 걸을 수 있는 동료도 많이 생겼다.
존경하는 주장도 있었고, 감독에게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은 이곳을 정말로 아끼고 있었다.
“계속 뛸 수 있겠어? 코치들이 물어보는데?”
감독과 스태프들이 터치 라인에 바짝 서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칼은 오늘 끝까지 뛰고 싶었다. 이 유니폼을 입고 경기 종료 휘슬을 듣고 싶었다.
칼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응, 끝까지 뛸 수 있어.”
*
삑, 삑, 삐이이이이익!
심판의 힘찬 휘슬소리가 울리자마자 노팅엄의 스태프들과 교체 선수들이 필드 위로 뛰쳐나갔다.
관중석에서도 갖가지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야는 차오르는 희열을 즐기며 친구들의 반응을 살폈다.
“으아아! 이겼어! 이겼다고!”
손민국은 이름도 모르는 옆의 팬을 끌어안고 방방 뛰고 있었다.
“힝, 히잉···.”
히메나는 훌쩍이고 있었다.
“잘했다! 잘했어! 너희들이 최고야!”
코피는 의자 위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주변의 팬들 또한 다양한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다. 누군가는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저 이 광경을 눈에 담기 위해 애쓴다. 마치 자신처럼.
뒷사람이 흘린 맥주에 맞아도 헤실헤실 웃는 사람들, 그들은 진작 쉰 목소리로 응원가를 불러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곳에 모인 노팅엄의 팬들은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선수들이 정말로 자랑스럽다고.
“받아라!”
갑자기 코피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코피가 자신에게 맥주를 뿌리고 있었다.
맥주 범벅이 된 마야는 찝찝하기는커녕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황당하긴 했지만.
“이게···.”
“와하하하! 축제야 축제!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즐기라고! 억울하면 너도···.”
“받아랏!”
“으억!”
결승 골을 넣은 칼에게 모이는 선수들을 보며, 마야 또한 이 기쁨의 축제에 함께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