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새로운 시즌맞이 (2)
회귀 전, 축구계에서는 신의 손이라고 불리는 두 명의 스포츠 치료사(Sport Therapist)가 있었다.
먼저, 파스칼 블로켓.
벨기에의 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다양한 일을 해야 했다.
그중 하나는 마사지였다.
동네 사람의 마사지 가게에서 간단한 기술을 배운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파트 타임으로 일했다.
그는 195cm의 거한이며 손도 컸다. 큰손과 어울리지 않게 손기술도 좋았고, 타고난 체력까지 좋아 온종일 마사지를 해도 지치지 않았다.
파스칼은 점점 손님들의 호응을 얻었다.
자주 지명받았고, 팁도 점점 많이 받아서 주로 마사지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일하는 가게에 벨기에 2부 구단의 한 관계자가 마사지를 받으러 왔고, 이런 가게 말고 구단에서 일을 배워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훨씬 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여러 일을 전전하는 불편함을 떠올린 그는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구단에서 한 시즌 동안 보조 치료사 일을 하며 자격증을 따 정식 스포츠 치료사가 된다.
그가 정식으로 치료사 일을 시작한 시즌부터 그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수시로 알수없는 통증을 호소하며 경기를 드문드문 나서던 선수가 그의 마사지를 받기 시작하고 나서는 한 시즌을 부상 없이 뛰었다.
근육이 쉽게 피로해져 경기를 많이 뛸 수 없던 선수는 그의 손길을 받은 후, 1.5배 가량이나 경기를 더 뛸 수 있게 됐다.
그는 많은 선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차근차근 유명해졌고, 내가 회귀하기 직전에는 프리미어리그의 강팀, 맨체스터 시티에서 수석 스포츠 치료사가 된다.
그리고 현재 그는, 내 등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와, 아, 아윽. 으어··· 시원··· 하네요.”
“감사합니다.”
파스칼은 현재 벨기에 2부 리그의 한 팀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구단에 문의해본 바로는 막 스포츠 치료사 자격증을 따서 다음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으허헉.”
지금은 시즌 중이 아니고, 파트 타임의 급료는 무척 부족했기에 파스칼은 일반 마사지숍에서도 일하고 있었다.
“아으윽.”
진짜, 진짜로 대박이다. 우리 구단에 데려오면 매주 마사지 좀 해달라고 해야겠다.
“끝났습니다.”
“하아아, 감사합니다.”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잠깐 아프다 싶으면 몇 배는 시원해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쌓인 여행의 피로가 한 번에 풀렸다.
파스칼은 나가지 않고 날 멀뚱멀뚱 보고 있었다.
팁을 달라는 거다.
나는 걸어놓은 외투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제야 파스칼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나는 지갑 속에 있는 지폐 중에 가장 큰 단위인 100유로(약 13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파스칼은 내 돈을 바로 받지 않았다.
“···잘못 주신 것 같습니다.”
“제대로 준 거 맞아요.”
“···그럼 감사히 받죠.”
파스칼은 지나칠 정도로 큰 팁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지폐는 놓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나는 명함을 내밀었다.
“잉글랜드 3부 리그 축구단, 노팅엄 FC의 사장인 김도운이라고 합니다. 킴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네. 킴.”
“이 지역 연고지 팀에서 보조 치료사로 일하고 있죠? 이번 시즌부터는 정식 치료사로 일할 거고.”
분위기 파악이 느린 남자였다.
파스칼은 의문이 가득 찬 눈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당신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
또 하나의 신의 손을 가진 사람의 이름은 폴린 페린.
파스칼과 마찬가지로 벨기에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달리기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고, 집안의 지원을 받아 육상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국내대회에서 우승하고, 청소년 대표팀으로 나가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벨기에 육상계의 미래로 떠올랐었으나,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 생활을 그만둬야 하는 큰 부상을 당했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오래 좌절하지 않고 선수들의 컨디션을 유지해주고, 재활을 돕는 스포츠 치료사가 되기로 빠르게 결심하고 대학교에 가서 수석으로 졸업한다.
이후 벨기에의 한 1부 리그 구단에 취업해 스포츠 치료사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얼마 전 재계약에 실패해 새 구단을 찾고 있다고 그녀의 직장동료에게서 들었다.
-가능성이 정말 많은 아까운 인재에요.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쉬는 걸 못 봤다니까요. 꼭 데려가 주세요. 우리 구단은 치료사를 많이 고용할 돈이 없어서···.
내가 굳이 데려가지 않더라도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바르셀로나의 수석 스포츠 치료사가 되지만, 그 우여곡절 안에 우리 구단이 있어도 괜찮을 거다. 그 미래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지원도 팍팍 해 줄 거고.
“저기, 미스터 킴··· 맞나요?”
“반갑습니다. 미스 폴린, 노팅엄 FC의 사장 김도운입니다.”
“절 고용하고 싶으시다고···.”
“예.”
내 단호한 대답에 폴린은 머뭇거렸다.
“어··· 그럼 영국으로 가야 하는 거네요.”
“네, 당장 결정하시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먼저 노팅엄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동 비용과 식사와 숙소 전부 제공하겠습니다.”
**
회귀 전, 단장들 사이에서는 파스칼과 폴린을 모두 손에 넣으면 팀의 부상 발생률이 절반으로, 부상자의 회복 속도가 두 배로 빨라질 거라는 전설이 돌았었다.
아직 둘 다 최대치로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곧 그 전설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노팅엄 FC에서.
파스칼과 폴린은 어벙한 얼굴로 내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앞서 경기장의 치료실을 공사하는 걸 보여줬고, 지금은 훈련장의 치료실을 보여주러 데려왔다.
“경기장과 훈련장의 공간을 이만큼 할당해드릴 수 있습니다. 원한다면 다른 방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과 폴린은 공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원하는 스타일의 마사지용 침대도 얼마든지 구해 드리겠습니다. 얼음마사지용으로 제빙기도 사서 비치할 수 있고, 필요한 게 있으면 다 말해주세요. 아까 보여드린 치료실과 이 치료실을 원하는 대로 채울 수 있게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우리 같은 초짜들에게요···?”
폴린이 물었다. 폴린과 파스칼은 비행기를 타고 오며 어색하게나마 통성명을 한 사이였다. 그래서 서로가 스포츠 치료사로서는 거의 초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 이제 자리를 옮길까요.”
나는 폴린과 파스칼을 이끌고 내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는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가 있었다.
나는 나란히 앉은 둘에게 계약서를 내밀며 말했다.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싶으시다면 구단에서 지원도 해 드리겠습니다. 교육비를 지원받는 기간 동안 계약이 연장되겠지만요.”
폴린과 파스칼은 계약서를 든 채로 굳어져 있었다.
파스칼이 계약서에서 어렵게 시선을 떼고, 내게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만큼이나 준다고요···? 사기 치는 거 아니에요?”
이어서 폴린이 묻는다.
“4년 계약을 하자고요? 승격 시 주급 25% 인상? 승격 못 해도 매년 10% 인상이라고요···?”
“구단에서 집도 구해 드리겠습니다. 엄청 좋지는 않겠지만.”
“어···.”
“저는 두 분에 관해 많은 걸 알아봤습니다. 두 분은 현재도 훌륭하지만, 장래에는 세계적인 스포츠 치료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열심히만 하시면 말이죠. 저는 그 가능성에 투자하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스포츠 치료사 같은 전문 직업들은 1~2년 정도의 단기 계약을 하고, 갱신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구단의 성적이 나빠져 강등을 당할 때는 해고하기 쉽고, 승격하거나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더 실력 있는 스태프로 갈아치우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장기 계약을 아주 좋아한다.
마음 같아서는 10년 계약을 하고 싶었지만, 나를 사기꾼으로 오해해서 계약 안 할지도 모르니. 그리고 사람이 나태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어느 정도 타협한 거다.
“당장 계약서에 사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은 노팅엄에서 마음 편히 푹 쉬세요. 돌아가는 비행기는 말씀해주시면 준비해놓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
“미스 페린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뇨, 폴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이름이 편해요. 그쪽은 파스칼 블로켓··· 맞죠?”
“예, 저도 파스칼이라고 불러주세요. 그건 그렇고··· 정말 당황스럽네요.”
“저도요.”
폴린과 파스칼은 오늘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벨기에 구단에서 받던 급여의 다섯 배다. 집도 구해준다고 하니, 이만큼 조건이 좋을 수가 없다. 거기에 공부까지 시켜준단다.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기회라는 생각은 들지만, 조건이 너무 좋다 보니 찜찜하다는 게 문제였다.
찜찜함이라는 같은 감정과 같은 직업을 공유하고 있는 둘은 금세 대화를 틀 수 있었다. 그들은 김도운이 숙소로 잡아 준 호텔로 향하며 대화를 나눴다.
대화 주제는 대부분 둘을 여기로 데려온 김도운에 관해서였다.
폴린이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걸까요?”
“이 구단 사장이 맞긴 한 것 같던데. 직원들이랑도 다 인사하고.”
“돈 생각 안 하고 막 지르다가 망하는 구단 많잖아요. 계약서 썼다고 하더라도 구단이 망해버리면··· 임금 체납···.”
“음··· 미스 폴린 말이 맞네요. 으음, 그럼··· 알아보는 건 어떨까요?”
“알아봐요?”
폴린의 물음에 파스칼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폴린은 파스칼이 가리킨 간판을 봤다.
“펍?”
“예. 팬들은 자기 팀을 포장하려 하지 않죠. 욕을 하면 했지.”
펍의 간판 옆에는 노팅엄 FC의 엠블럼이 붙어 있었다. 틀림없이, 노팅엄을 응원하는 팬들이 모이는 장소다.
“그건 그렇죠. 좋은 생각 같아요.”
그들은 라는 이름의 펍 안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그들이 펍에 들어서기 한참 전에 김도운은 펍의 주인인 조이의 어머니 사라 우드와 통화를 했다.
-노팅엄시는 살기 좋은 곳이고, 너는 믿을 만한 사람이고, 구단은 잘 나가고 있다고 말해주면 되니? 다 사실이긴 하네.
“정확해요. 아마 펍으로 갈 거예요. 일부러 그쪽에 호텔을 잡았고,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있는 펍이니까요. 구단 엠블럼까지 떡 하니 붙어 있잖아요?”
-우리 펍 말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잖니. 내가 미리 다 얘기해놓을까?
사라는 조이처럼 눈치도 빠르고 똑똑했다.
“직접 하려고 했는데,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부탁드릴게요.”
-무슨 특수작전 하는 것 같아서 괜히 설레네.
“하하, 특수작전이라. 노팅엄 영입조작단이라고 불러볼까요.”
-괜찮네! 정말 무슨 조직 같아.
사라는 무척 신난 것 같았다.
-그 두 명이 무척 탐이 나나 봐?
“우리 구단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다른 구단으로 가더라도 비싼 몸값을 남길 거고요.”
-그런 일에 태어날 때부터 노팅엄 FC의 팬인 내가 빠질 수 없지. 좋아. 내가 꼭 임무를 완수해 줄게.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노팅엄 영입조작단, 작전 개시!
“개시···?”
사라는 첩보물을 정말 좋아하는 분이셨다.
어린 시절, 제임스와 함께 조이의 집에 놀러 오면 사라가 실제 총같이 생긴 물총을 빌려주면서 첩보 놀이를 하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 가끔 악당으로 참전하시기도 했었다.
그때는 사라의 놀이에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좀 많이 부끄러웠다. 사라는 육십 가까운 나이고 나는 서른이 넘었는데···.
-목소리가 작다. 노팅엄 영입조작단, 작전 개시!
젠장,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대답했다.
“라, 라저 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