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새로운 시즌맞이 (3)
조이의 아버지 알렉스는 사라에게서 김도운이 한 부탁을 전해 들었다.
“돈이 그런 부탁을 했단 말이야?”
알렉스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 번 치면서,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나한테 맡기라고, 완벽한 연기를 보여줄 테니까.”
그 모습을 보며 사라는 생각했다.
‘불안한데···.’
*
폴린과 파스칼은 펍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둘은 가게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짐을 놓고, 주문을 위해 바(bar)로 다가갔다.
“하, 하, 하, 어서오십쇼! 두 분 참 잘 어울리십니다.”
“저희 그런 사이 아닌데···.”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의 말에 파스칼이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퍽, 소리와 함께 덩치 큰 남자주인이 몸을 숙인다. 어느새 가까이 온 여자주인의 팔꿈치에 옆구리를 맞은 모양이었다.
“사라, 왜!”
“···이럴 줄 알았어. 당신은 너무 오버해서 문제야. 내가 주문받을 테니까 요리나 해.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사이 좋은 부부 같아 보였다. 파스칼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주문했다.
“예··· 피쉬 앤 칩스 두 개요.”
“네! 여행 오신 건가요? 처음 보는 분들인데.”
“아, 아뇨. 여행은 아니고 저기 노팅엄 FC에서 일자리 제안을 받아서요.”
“정말요?”
사라는 정말 깜짝 놀랐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서비스를 줘야겠네요!”
*
“맛있게 드세요!”
“어··· 감사합니다.”
폴린과 파스칼은 서비스 음료를 받았다.
이 펍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라가 떠난 후에 둘은 이야기를 나눴다. 파스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일하기로 결정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하네요.”
“알아서 준 서비슨데요. 뭐 어때요.”
“그런가요.”
파스칼은 음료를 한 번에 반 정도 마셨다. 레몬 향이 나는 달달한 음료였다.
둘은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노팅엄 FC와 사장 김도운에 관해 알아보는 건 다 먹고 하자고 합의했다.
피쉬 앤 칩스를 맛본 폴린이 말했다.
“생각보다 맛있네요. 영국 음식은 맛이 없기로 유명하던데.”
“지난 시즌에 구단에서 먹었던 식사에 비하면 환상적이네요.”
“와, 저도 저희 구단 식사랑 비교해서 말한 건데. 제가 있던 구단도 정말 맛없었거든요.”
지난 시즌 수습 스포츠 치료사였던 둘은 금방 공감대를 찾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계속되던 와중 폴린이 푸념하듯 말했다.
“마사지나 얼음찜질은 그렇다 치는데, 테이핑이 정말 어렵지 않아요? 이론대로 잘 붙여줘도, 좀 있으면 들뜨고 그러던데.”
“아, 그건 말이죠. 테이핑할 때 선수의 팔이나 다리에 직접 대어보고, 약간 짧게 잘라서 길이를 맞추고 붙이면 좀 더 잘 붙습니다.”
파스칼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스포츠 치료사들에게는 여러 임무가 있다. 그중 그들의 대표적인 임무에는 스포츠 테이핑이라는 피부에 테이프를 붙여 통증을 완화 시키고 운동능력을 향상하는 기법과 운동 후 지친 근육을 달래주는 얼음찜질과 마사지가 있었다.
“그리고 테이핑을 한 후에 그 부위를 탁탁 두드려주면 피부에 열기가 생겨서 착 달라붙죠.”
“와아, 저 잠깐 필기 좀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적으세요. 대단한 것도 아니고요.”
“저한테는 대단해요! 지난 구단에서는 선임 스포츠 치료사가 맨날 알아서 하라고 구박해서··· 제대로 배운 것도 없거든요. 선수들한테 욕만 잔뜩 먹고.”
폴린은 실전에서 궁금했던 것들을 몇 가지 더 물어봤고, 파스칼은 더듬거리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해줬다. 폴린은 자신의 기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알려주는 파스칼이 고마웠다.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저도 뭘 알려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폴린의 말에 파스칼은 지난 시즌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떠올렸다. 최소한의 교육만 받고 실전에 바로 투입됐던 그에게는 이론적인 면이 부족했다.
“그럼 혹시 몸의 무게중심이 틀어진 선수를 어떻게 치료해줘야 하는지 아십니까? 마사지하거나 도수치료를 해 줘도 그대로라···.”
의사의 치료가 필요한 부상이 아닌 몸에 이상이 생긴 정도는 대부분 스포츠 치료사가 맡아서 관리해줘야 했다. 파스칼은 지난 시즌에 이런 해결방법을 알 수 없는 문제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다.
“그건 제가 알아요!”
폴린은 실전경험이 부족한 대신 지식이 풍부했다. 폴린은 자신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최근에 세미나에 참석했었는데요, 무게중심을 맞추는 건 치료로 되는 게 아니라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해요.”
“운동이요?”
“그게 말이죠. 교정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냥 보내드릴까요? 메일 알려주실래요?”
“예!”
폴린과 파스칼은 끊임없이 대화하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난 후에는 맥주까지 추가로 시켜 와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가 벨기에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되고 더 친밀해진 그들이었다.
세잔 째를 비웠을 때, 폴린이 파스칼을 보며 웃었다.
“우리, 서로 배울 게 많네요.”
“그러게요.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파스칼 또한 마주 보며 웃었다.
둘은 눈을 맞춘 채로 서로를 보다가, 거의 동시에 슬며시 눈을 피했다. 둘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큼, 큼. 그러고 보니 원래 여기 온 목적이 있었는데.”
“그, 그러게요.”
*
사라와 알렉스는 일하는 틈틈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너무 좋은데요···?”
“영입조작단이 아니라 연애조작단이 되게 생겼네.”
처음에는 그냥 어색해 보였는데, 지금은 핑크빛 분위기를 만든 채로 어색해하고 있었다.
“핑크빛 분위기네, 핑크빛이야.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그렇지 사라?”
“이번에도 긴장해서 더듬거리면 새빨간 분위기가 될 줄 알아요.”
사라의 서늘한 말에 알렉스는 괜히 천장을 올려다 봤다.
“응···.”
“지금이 좋을 것 같아요. 가요.”
*
“저기, 잠깐 합석해도 될까요?”
파스칼과 폴린은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일에 치였던 파스칼과 고된 훈련과 학업에 치였던 폴린 모두 연애라고는 해본 적 없는 모태솔로들이었다.
둘은 이런 분위기가 처음이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가게 주인들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것이다.
원래 목적이었던 노팅엄 FC에 관해서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파스칼은 흔쾌히 그러라고 답했다.
“저는 사라 우드, 이쪽은 제 남편, 알렉스 우드라고 해요.”
사라는 폴린 옆에, 알렉스는 파스칼 옆에 앉았다.
“아까 서비스 주신 거 맛있게 마셨어요.”
“고마워요. 노팅엄에서 일자리 제안을 받았다는데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거든요. 제 딸이 노팅엄 FC에서 일하기도 하고.”
사라의 말에 폴린과 파스칼이 눈을 맞췄다. 둘은 생각했다. 운이 좋았다. 구단 내부자랑 관계가 있는 가게였다니.
폴린이 말했다.
“그럼 구단에 관해 잘 아시겠네요.”
“다른 사람들보단 많이 알죠.”
사라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폴린이 직접 물었다.
“노팅엄 FC는 어떤 구단인가요? 지난 시즌 승격했다는 건 알겠는데···.”
“직원 복지 좋고, 팬들도 많고, 선수단 영입도 알차게 하고, 사장도 유능한 잘 될 일만 남은 구단··· 윽!”
알렉스가 허겁지겁 대답하던 와중, 사라의 팔꿈치가 알렉스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호호, 당신은 구단을 너무 좋게만 봐서 탈이라니까.”
“하, 하. 그런가?”
“우리 구단이 괜찮긴 한데, 알렉스가 좀··· 과할 정도로 팀을 좋아해서요.”
팬이 구단 욕보다 칭찬을 먼저 하는 건 보기 힘든데, 파스칼은 그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최근에 승격해서 그런가요?”
“그것도 그렇고··· 팬들을 위해 이것저것 많이 해 주거든요.”
사라는 <노팅엄 푸드 리그>, <노팅엄 푸드 코트>, <노팅엄 TV> 등 몇 가지 예를 들며 간단하게 설명했다.
“작년에 부임한 사장, 미스터 킴이 주도한 일이에요. 다 성공적이었고요. 2부 리그 때만큼은 아니지만, 팬들이 많이 돌아왔죠.”
파스칼과 폴린이 다시 눈을 맞췄다.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사람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에는 폴린이 물으려는데, 사라가 선수를 쳤다.
“제가 여기 합석한 이유가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폴린이 대답했다.
“두 분 다··· 구단에서 제안을 받았다고 했죠?”
“예, 사장님이 직접 찾아오셨었어요.”
“어머, 정말요?”
사라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헤 벌어지려는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이어 두 사람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우리 팀에 꼭 와 주세요.”
“예?”
“미스터 킴이 선택한 직원이나 선수들은 모두 노팅엄에서 성공했거든요. 최근에 도르트문트로 직행한 칼 슈나이더도 그렇고···.”
사라는 김도운이 사람을 기가 막히게 뽑는다는 말을 이어서 늘어놓았다.
“미스터 킴이 직접 선택한 분들이라면 틀림없이 능력 있는 분들일 거 아녜요. 여보, 서비스 좀 더 가져와. 이분들한테 뇌물 좀 줘야겠어.”
사라가 농담 투로 말했고,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짜로 가려고 했다. 폴린과 파스칼은 자신들을 인정해준다는 사실에 부담 반 기분 좋음 반을 느끼며 손사래를 쳤다.
파스칼이 말했다.
“아우, 괜찮습니다. 근데 그 미스터 킴이라는 분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에요?”
처음 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대접을 해 줄 정도로?
“예, 우리 노팅엄의 팬들은 선수들만큼이나 미스터 킴을 신뢰하거든요. 망하기 직전의 팀을 여기까지 올려놓은 분인데요.”
사라의 눈동자와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파스칼과 폴린은 노팅엄 FC에 취업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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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셨어요.”
-내가 알렉스 때문에 못 살아 정말. 적당히 바람만 잡으라고 했는데··· 바람 잡기는커녕 바로 들킬 뻔했다니까.”
“하하하, 알렉스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요.”
나는 사라에게서 임무를 완수했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파스칼과 폴린은 그 대화 이후 술에 취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노팅엄이 살기 좋은 도시냐고 물어봤다고 했다.
다행히도 펍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했고, 사라를 통해 노팅엄 FC에 곧 취직할 수도 있는 스포츠 치료사들이라는 말까지 들은 후에는 격하게 환영했다고 했다.
“살기 좋냐고 물어본 거면 다 끝난 거네요. 수고하셨어요. 사라.”
내 말대로, 다음 날 오전 파스칼과 폴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계약하겠다고.
*
선수들이 휴가에서 복귀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은 정말 많았다.
일단, 지난 시즌 팬 포럼에서 나왔던 아이디어인 ‘경기장 내에서의 공연’을 실행하기 위해 한 음악프로그램에서 PD를 맡았던 분을 모셔 한 시즌 동안만 계약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었다.
아마추어 음악가들에게 공연할 장소를 제공하고 싶다는 내 말에 감복한 그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주도하에 경기장 앞, 경기장 내 복도, 그리고 필드 위에서 공연할 수 있게 조립형 스테이지들을 사들여야 했다. 또한, 음악가들을 모집하는 공고도 여러 매체를 통해 전달했다.
친선경기 일정도 잡아야 했다.
절반 정도의 선수들이 3부 리그에서는 뛰어본 적 없었기에, 템포에 적응하기 쉽도록 잭슨과 상의해 2부, 3부 리그 위주로 친선경기를 잡았다.
1부 리그 팀은 일부러 잡지 않았다. 괜히 사기만 떨어질까 봐.
선수들이 휴가에서 돌아올 날부터 일주일 동안은 친선경기를 잡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아, 바람이 시원합니다.”
나와 잭슨은 가이드를 대동한 채로 무인도 답사를 왔다.
잭슨이 지난 시즌부터 강력하게 원했던, 전지훈련을 할 장소였다. 선수들이 위험하지 않도록 일반인에게도 무인도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무인도를 선정했고, 안전요원들도 고용했다.
선수들은 프리시즌 첫 주에 이곳에서 생존을 위해··· 힘내야 할 것이다.
“정말 이런 게 도움이 됩니까?”
“이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팀 스피릿을 얻을 수 있죠.”
나는 훈련소 시절, 처음 보는 동기들과 함께 훈련받고, 짬밥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전우애를 떠올렸다.
그것의 확장판 정도 되는 걸까.
“이해는 되네요. 감독님이 완전 악역이 되겠지만···.”
“좋은 성적만 낼 수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처음 만나는 선수들끼리도 금방 친해질 수 있고요.”
나는 바로 다음 주로 다가온 선수들의 휴가 복귀일을 떠올리며, 두 손을 모아 선수들의 안녕을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