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40화 (40/245)

14. 포레스트 (1)

노팅엄은 다른 팀들보다 프리시즌을 일주일 빨리 시작했다. 덕분에 무인도에 다녀온 시간을 빼도 훈련시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상하다···.”

그런데도, 노팅엄 6개월 차 신입 선수인 바비는 지금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한 달 전만 해도 상대 팀인 베리는 단단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위협했던 팀이었다.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칼이 아니었더라면 이 팀을 이기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저쪽은 지난 플레이오프의 복수를 위해서인지 분명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했다만, 노팅엄의 경기력이 훨씬 압도적이었다.

“나이스 패스!”

컨디션이 특별히 좋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선수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무인도에 다녀온 후, 패스와 움직임 위주의 훈련을 하긴 했다. 그래도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지난 시즌과 달라진 점은 딱히 없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무인도에 다녀온 후 다른 선수들과 잡담을 많이 나누고,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을 조금 더 자세히 보게 됐다는 것밖에 없었다.

“받아!”

라이언의 패스를 받기 전, 바비는 주변을 둘러보며 동료들과 적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적의 중앙수비수가 만든 라인에 겹쳐진 채, 가만히 서 있는 할리가 보였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바비는 본능적으로 공을 찼다. 수비와 수비 사이 공간을 향해, 공의 살짝 윗부분을 차 바닥에 깔린 채 나아가는 패스를 했다.

그리고 그 공은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뛰쳐나간 할리의 발에 무사히 도착했다.

공이 살짝 길긴 했지만, 근처에 수비수가 없었고 골키퍼는 막 달려 나오기 시작했기에 컨트롤 할 여유가 많았다.

할리는 볼을 잘 다뤄 놓고, 골대 상단 구석으로 강슛을 꽂아 넣었다.

<와아아아아아!>

프리시즌 첫 골이었다.

실제 시즌처럼 격한 세레머니는 없었다. 할리는 경기장 전광판과 연결된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해 보이고는 바비 쪽으로 달려왔다.

“좋아. 역시 내 청탁이 먹혀들었네.”

“우연이야. 운도 좋았고.”

할리가 촐싹이며 말했다.

“너도 이제 이 천재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됐구나! 대신, 다음부터는 좀 더 뒤에 줘. 방금은 너무 앞으로 가서 컨트롤하기 힘들었어. 나라서 받은 거지.”

할리의 자신만만한 말에 바비는 생각을 집어치웠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네가 느려서 그런 거야. 가브리엘 제주스는 그런 패스도 쉽게 받았다고.”

맨시티와 브라질의 주전 스트라이커의 이름이 나오자 할리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좋아. 앞으로도 그렇게 패스해. 다 받아줄 테니까.”

라고 말할 뿐이었다.

할리는 놀리거나 도발할 때마다 반응이 즉각 나타나는 선수였다. 그리고 은근히 자신의 승부욕을 긁곤 했다.

바비는 해야 할 일만 마치면 얼마든지 쉬거나 놀아도 된다는 철학을 갖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시즌에도 훈련장이나 경기장에서는 적당히 지냈었다. 한데 무인도 때부터 할리와 엮이면 어느새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패스해 줄 거야 말 거야?”

뭐, 그게 크게 나쁜 건 아니었기에 바비는 할리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임대 동안 심심하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더 빠르게 보낸다?”

“좋아.”

*

“와아아···.”

마야는 선수들의 색다른 움직임에 감탄하고 있었다.

지난 시즌, 노팅엄의 전술은 무척 간단했다.

긴 패스로 희대의 천재 칼 슈나이더나 주장 알렉산더에게 패스한다. 둘은 개인 기량이든 주변 선수들이든 이용해서 어떻게든 전진하고, 페널티박스 안에 들어가서 마무리한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선수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체가 된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물론 프리시즌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중간마다 맥이 끊기기도 했지만, 가끔 터져 나오는 환상적인 콤비네이션이 마야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지금도 그렇다.

바비는 라이언과 원투패스를 한 후, 왼쪽의 요한에게 쓰루 패스를 찔러줬다.

요한은 공을 잡아 잠시 멈춰두다가, 왼쪽 측면으로 마중 나온 할리에게 패스하고 중앙으로 들어갔다.

할리는 패스를 잡아놓지 않았다. 할리는 발바닥을 사용해 요한이 달리는 방향으로 공을 밀어줬다. 그리고 요한은 공을 잡아두지도 않고, 페널티박스 안으로 침투하는 바비에게 패스를 찔러줬다.

바비는 침착하게 공을 잡아두고, 골키퍼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정확하게 슛을 했다.

두 번째 골이었다.

“와아···.”

<오오···.>

지난 시즌에 보여준 적 없는 색다른 모습에 관중이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도 재밌겠다, 마야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다가 막 옆자리에 앉은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

피부색으로 보아 동양인으로 보였고,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수염은 가짜 같았다.

어디서 본 사람 같아 쳐다보는데, 마침 그 사람도 고개를 돌리다 마야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에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쉿, 쉿.”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야는 그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살짝 벗으며 자신의 눈을 보여줬다.

틀림없다. 그는 노팅엄 FC의 사장 겸 단장, 김도운이었다.

**

“뭐 하세요···?”

관중석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나는 조금 많이 당황한 상태였다.

마야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팬들 관찰을 하고 있죠···?”

나는 팬들이 경기를 어떻게 즐기는지 보고 싶어서 분장한 채로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겸사겸사 불편한 점은 없나, 실제 시즌에 발생할 문제의 싹은 없나 찾아보기도 했다.

실제 시즌에 들어가면 변화가 어렵지만, 프리시즌 때는 문제가 있으면 큰 변화도 가능했으니까.

다행히 마야는 내 짧고 어리숙한 말로도 내가 왜 이러고 다니는지 알아준 모양이었다.

“진짜 열심히 하시네요··· 존경스러워요.”

“하, 하. 고마워요···. 그럼 겸사겸사···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렇게 된 거, 작은 팬 포럼을 즉석에서 열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대일로.

“경기 전에 경기장 밖, 복도, 필드에서 공연했잖아요. 어땠어요?”

“어··· 그냥 그랬어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어요.”

미묘한 반응이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경기장 구석구석을 돌며 지켜본 팬들의 반응도 그러했다. 몇몇 사람만 서서 지켜보지 대부분 흘긋 보고 지나갈 뿐이었다.

“확실히, 예상보다 공연에 참여하려는 공연자가 적어요. 그래서 공연자들의 수준도 낮고··· 스테이지가 텅 비어있는 경우도 있고···.”

이게 현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공연장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마야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곧 더 나아지지 않을 까요?”

“곧이요?”

“네, 아직 트렌트 대학교와 노팅엄 대학이 방학 중이잖아요. 그래서 제 친구들도 여기 못 왔고.”

“아.”

마야가 계속 말한다.

“방학이 끝나면 공연하고 싶은 학생들이 잔뜩 늘어나지 않을 까요···? 만 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공연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없어요. 수준 높지는 않아도 다양한 공연이 될··· 거예요.”

그녀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분명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안 될 가능성도 컸지만, 나는 기대한다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그렇네요. 기다려 봐야겠네요.”

“네! 제 친구들한테도 미리 연락해 볼게요. 둘 다 밴드에 들어가 있었거든요. 지금 경쟁자가 적다는 걸 들으면 당장 달려올지도 몰라요.”

“좋아요.”

나는 고개를 들어 전광판의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 너무 오래 있었네요. 슬슬 가봐야겠어요. 아직 반도 못 돌았거든요.”

“그래요?”

아쉬워하는 마야에게 나는 지갑을 꺼내서 늘 갖고 다니는 교환권을 네 장 건네줬다.

“친구들이 넷이죠? 팬숍에서 원하는 유니폼이랑 교환할 수 있는 교환권이에요. 덕분에 힘을 얻어가네요.”

“와아··· 감사합니다.”

나는 마야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른 관중석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모두 마야 같은 팬만 있으면 얼마나 편할 것인가.

골키퍼 뒷자리, 그러니까 응원을 주도하는 골수팬들인 서포터즈가 응원하는 관중석에 도착한 나는 아주 곤란한 장면과 맞닥뜨렸다.

“이 비치(bitch, 욕) 같은 버치(Birch, 자작나무)들아. 팀이 좀 살만해지니까 돌아오는 거냐?”

“야, 우리 버치스(Birches)는 너희 오크스(Oaks, 참나무들)를 존중한다고. 너희가 대단한 거지 우리가 나쁜 게 아니라니까? 이제부터 열심히 응원하겠다고 했잖아. 아까는 알겠다더니 술 취해서 맛이 갔네.”

팀이 5부 리그까지 떨어졌을 때, 자리를 지켰던 서포터즈와 오랜만에 경기장을 찾은 서포터즈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 팀의 서포터즈를 총칭해 ‘포레스트(Forest, 숲)’라고 부른다. 노팅엄시의 상징인 로빈후드 전설이 살아 숨 쉬는 셔우드 숲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서포터즈의 총칭이 포레스트니, 그 안의 소규모 서포터즈 집단에는 나무 이름들이 붙었다. 오크스, 버치스, 파인즈 같이.

오크스는 팀이 몰락했을 때도 계속 골대 뒤를 지켜준 공장 노동자 위주의 서포터즈였다. 이들은 노팅엄을 정말로 사랑해주는 고마운 분들이었다. 펍에서 만나면 내게 공짜 술을 사줄 정도로 좋은 분들이기도 했다.

다만, 조금 과격하다.

다행히 옆에 앉아서 그들의 불평을 받아주고 있는 게 그들과 비슷한 직종에서 일하는 버치스였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사고가 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포터즈석을 이십 분 넘게 지나다니며 서포터즈들을 관찰했다.

우리는 한 번만 더 승격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뭐, 경기장의 소유권도 다시 사 와야 하고, 그때만큼의 재정은 아니겠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떠났던 서포터들이 많이들 돌아온 모양이었는데··· 이십 분 동안 보안요원들이 싸움을 막은 것만 네 건이었다.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

“···이런 일이 있었어. 다들 어떻게 생각해?”

나는 내 사무실에 제임스와 조이, 마리아를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리아가 묻는다.

“돈은 기존의 서포터즈나 돌아온 서포터즈나··· 둘 다 갖고 싶은 거죠?”

“네, 양쪽의 입장 모두 이해가 가서요.”

“일단은 경비 인원을 늘려야겠네. 홈 서포터즈 석 위주로. 서포터즈 간의 위치 배정도 우리가 관여해야 하나?”

“경비 인원을 늘리는 건 찬성. 위치 배정은 고민해보자.”

“오케이.”

조이는 스마트폰에 무언가 적었다.

이후, 우리 넷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 아이디어 저 아이디어 다 던져봤는데 마땅해 보이는 게 없었다.

“지금 상황을 그대로 이용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대로?”

“응,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서포터즈끼리 싸움을 붙인다던가?”

무슨 개소리냐가 먼저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제임스의 말에 회귀 전에 있었던 한 구단의 사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서포터즈 간의 갈등을 아예 이벤트로 만들어버렸던 사건을.

“좋아. 그럼 이거 어때?”

나는 내 앞에 놓여있는 빈 종이에 빠르게 글자를 휘갈겼다. 이 아이디어를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이벤트 이름이었다.

<노팅엄 치어(cheer, 응원) 배틀>

“골수 서포터즈들을 경기장 곳곳에 배치한 후, 응원 대결을 하는 거야. 평균 데시벨이든 투표든 해서 승부를 가리는 거지. 싸울 거면 건전하게 싸우게 해 주자고.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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