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포레스트 (3)
《라이언은 우리의 작고 친절한 친구지. 하지만! 그는 역겨운 노츠 녀석들에게는 무서운 사자가 된다네~.》
노팅엄의 소규모 서포터즈, 파인스(Pines)의 리더 벤자민은 <노팅엄 치어 배틀>에서 승리하기 위해 가장 앞에서 열심히 노래하고 있었다.
응원가는 곧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일반 팬들이 자신들이 시작한 응원가를 따라 불러주고 있었다.
응원가는 자연스럽게 한 소절 더 돌았고, 어느새 수백 명의 팬이 함께 노래하게 됐다.
‘이 맛에 서포터즈를 하는 거지.’
경기가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됐는데 목이 반쯤 쉬었다. 경기 시작 전부터 다른 서포터즈의 기선을 제압하겠다고 소리를 빽빽 질러댔기 때문일 거다.
벤자민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경기장 전체에서 응원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팅엄 치어 배틀>이 성공하든 말든, 참 절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응원가가 뒤섞여 알아듣긴 힘들었지만, 선수들을 향한 끊임없는 함성이 계속되고 있었다.
선수들은 자극받았는지 다들 힘이 넘쳐 보였다.
주변의 일반 팬들만 봐도 무척 신나 보였다. 평소 경기를 보는 게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직접 그 영화에 참여한 느낌이 들 거다.
“오크스···.”
파인스의 정 반대편에서는 서포터즈 오크스가 응원을 펼치고 있었다.
오크스는 노팅엄이 5부 리그로 떨어진 후에도 팀에 남았던 대단한 서포터즈였다.
벤자민은 오크스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수십 년간 응원한 팀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언제 올라갈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는 데 계속 경기장을 찾는 건 보통 멘탈로는 버티기 어렵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경기장을 찾아오는 걸 포기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파인스에 소속된 회원들 대부분도 경기장을 찾지 않았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저들에게 이겨보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 아니.”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그 일이 잘못됐었다는 건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저들도 큰 상처를 받았을 거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떠나가는 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는 것조차 실례 같았다.
파인스의 목표는 하나였다.
남았던 서포터즈들에게서 ‘파인스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구나.’라고 인정받는 것.
처음에 벤자민은 남았던 서포터즈들에게서 비난받는 데 지쳐 회원들에게 그냥 일반 팬으로 돌아가자고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평범하게 응원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벤자민과 회원들은 한 회원의 말에 마음을 돌렸다.
‘숨어서 응원한다니, 부끄럽잖아. 미안한 게 있으면 직접 말해야지.’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를 시도했었다.
하지만, 사과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이 날 뻔했다.
노팅엄의 팬들에게 있어 노팅엄은 종교였다. 그리고 서포터즈는 광신도였다. 저들에게 자신들이 배교자로 취급받는다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파인스의 일원들은 김도운에게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주다니.
남은 건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벤! 뭐해? 다음 응원가 시작해야지.”
회원의 말이 벤자민을 상념에서 끌어냈다.
벤자민은 적어 놓은 응원 프로그램을 확인한 후, 마침 근처로 온 로드 테일러를 보며 외쳤다.
《로드 테일러에겐 아빠가 있지! 아빠가 있지!》
다른 서포터즈들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로드 테일러에겐 아빠가 있지!》
《알렉산더!》
로드가 찌릿하고 이쪽을 흘겨보았다.
서포터즈를 비롯한 팬들이 와하하하 하며 웃었다. 로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라이언이 옆에서 키득댄다.
팬들과 선수들의 호흡. 응원을 주도하는 서포터즈가 만들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서 경기장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벤자민은 보통의 팬이었다.
벤자민은 나이를 먹을수록 서포터즈가 정말 멋져 보였다. 서포터즈는 팬들이라는 악기를 지휘하는 지휘자 같았다.
그래서 벤자민은 10대 중반에 서포터즈에 들어갔다.
서포터즈로 활동하며 더 열심히 응원했고, 선수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었다.
하지만, 그때 왜 자신과 파인스는 팀을 떠났을까.
후회되는 만큼, 벤자민은 큰 목소리로 다음 응원가를 시작했다. 자신들과는 반대의 행보를 걸은 선수의 응원가였다.
파인스의 일원들이 벤자민이 선창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친구를 만났네. 십 년 만이었네.》
《친구가 나한테 물었지.》
《‘너희 팀의 주장은 누구야?’》
《알렉산더 샌더스!》
《아직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서 파인스는 샌더스! 샌더스! 라며 열심히 노래했다.
응원가는 전반전 중반까지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됐다. 파인스의 회원들이 오늘을 위해 매일 퇴근 후에 연습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호응이···.”
응원가는 반복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고, 파인스의 회원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했다.
경기에 집중할 때에는 응원가를 부르지 않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충분할 거라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응원가가 계속되어야 하는 타이밍에 같은 응원가만 반복하니 주변 팬들이 질려 하기 시작했다.
응원가의 종류가 턱없이 부족했다.
과거의 노팅엄은 소규모 서포터즈들이 총 서포터즈 리더의 응원에 따라 번갈아 가면서 응원을 주도했었기에 이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른 서포터즈들도 응원가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말았다 했다.
다들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크스를 비롯한 팀이 망했을 때 남았던 서포터즈들은 준수한 응원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전반전이 끝날 무렵에는 파인스 근처의 팬들마저 오크스의 응원가를 따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나자마자 파인스의 서포터즈가 벤자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후반전은 어쩌죠?”
“이런 식이라면 다음 두 번도 질 텐데···.”
김도운은 <노팅엄 치어 배틀>을 딱 세 번만 해 보자고 제안했다.
오늘 최고의 서포터즈를 가리고, 다음 홈경기에서 그 서포터즈가 주도해 응원전을 한다. 그리고 그다음 홈경기에서는 다시 최고의 서포터즈를 가린다.
팬들과 서포터즈의 반응이 좋으면 계속할 거라고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트렌트 대학교의 동아리 밴드, Small room의 공연이 있겠습니다!]
어느새 장내 아나운서가 하프타임 공연 안내를 하고 있었다.
“자, 집중하자. 다른 서포터즈와 협력하는 건 어때? 그럼 레퍼토리도 풍부해질 거고···.”
잠깐 필드 위의 밴드에게 시선을 보냈던 파인스의 회원들이 다시 의논을 시작했다.
[저는 Small room의 리더이자 보컬, 트렌트 대학교의 코피 히메네즈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우리가 원래 준비했던 노래가 워낙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전반전 동안 새 곡을 급히 준비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사 좀 보면서 부르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밴드 리더라는 사람의 말에 와하하하 하며 팬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파인스의 회원들은 여전히 고민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연주하는 드럼과 기타에서 익숙하고 친근한 멜로디가 들리자 파인스의 회원들은 필드 아래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같이 불러 주세요! 글로리! 글로리. 노팅엄 F~C!]
“응? 쟤네 응원가 부르네?”
그동안의 공연자들이 자기가 만든 곡을 한다던가, 부족한 연주 솜씨로 귀를 시끄럽게 했던 것과는 달랐다.
지금 나와 있는 밴드는 가볍고 쉬운 응원가를 부르며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내고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공식 응원가이면서 토트넘 등 여러 구단에서도 사용되는 응원가의 구단명에 노팅엄 FC만 집어넣은 곡이었지만, 익숙한 멜로디와 간단한 가사에 화장실이나 푸드 코트에 가지 않고 관중석에 남은 관중들이 노래를 따라 불러주고 있었다.
첫 번째 응원가가 반절 가량 진행됐을 때, 키보드를 치는 단발머리 여자의 자연스러운 변주를 시작으로 다음 응원가가 시작됐다.
그렇게 응원가 메들리가 계속됐다.
밴드는 오늘 나왔던 응원가들을 짜깁기해서 부르고 있었다.
빠른 템포의 응원가에서 점점 느린 템포로.
밴드는 마지막 곡으로 축구팬들이라면 다들 아는 리버풀과 도르트문트, 셀틱의 응원가 YNWA를 선택했다.
경기장의 절반가량의 관중이 이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밴드와 팬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에 파인스의 회원들은 취해 있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며 팬들이 지르는 함성에 정신을 차렸다.
[감사합니다!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봐요!]
밴드는 그렇게 물러갔다. 다음 공연자는 이전 공연자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노래를 선곡했기에 반응이 시들해졌다.
그리고, 파인스의 한 회원은 터널로 사라지는 Small room 밴드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벤자민의 물음에 그 회원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 벤자민. 방금 공연했던 대학생 밴드 있잖아요.”
“응.”
“우리보다 유명한 노래도 많이 알고, 작사·작곡도 우리보다는 잘 할 수 있겠죠?”
“그렇겠지?”
회원이 한 차례 더 뜸을 들였다. 그들이 사라진 터널을 보는 걸 보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공연한 것도 전반전 동안 급히 준비했다고 했으니까··· 실력도 좋을 거예요.”
“그래서?”
회원이 말했다.
“도움을 청하는 건 어떨까요. 저 학생들에게.”
**
피곤에 찌든 몸을 이끌고 퇴근하려던 찰나, 조이가 손에 서류를 들고 나타났다.
나는 조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 프리시즌 계약 건은 다 처리했어.”
“그래, 잘했어.”
“FA에 서류까지 다 보냈다고. 완벽하게.”
“그래그래.”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통하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답은 정공법뿐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좀 쉬면 안 될까.”
조이가 생긋 웃는다. 저건 절대로 안 된다는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조이에게 물었다.
“대체 뭐야? 1부 리그까지 쓸 수 있는 골키퍼를 영입했고, 기존 골키퍼를 처분하고, 새 피지컬 코치와 골키퍼 코치를 영입하느라 졸려 죽을 것 같은 나한테 생긴 업무가···?”
“진짜 피곤한가 보네.”
“응.”
사흘 전, 제1회 <노팅엄 치어 배틀>을 무사히 마치자마자 지난 시즌이 끝날 때부터 진행하던 계약을 마무리하느라고 한숨도 못 잤다.
코치를 데려오기 위한 위약금 처리를 하느라 이틀 낮 동안 진을 뺐고, 골키퍼를 데려오기 위해 상대 팀 단장과 밤에 최종 협상을 하느라 말이다.
조이는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보았다. 혹시 쉴 수 있을까 작은 기대가 생겨났지만, 바로 사라졌다. 조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거든.
“아쉽지만, 넌 회의에 참석해야 해. 투표집계가 완료됐거든.”
“하아···.”
내가 말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기에 절대 빠질 수 없었다.
“아이고, 착하다.”
“그래도 피곤하거든.”
“10분 정도 무릎베개라도 해줘? 좋아하잖아.”
“됐습니다.”
나는 조이와 시답잖은 농담을 더 나누며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직원들이 꽤 모여있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제1회, <노팅엄 치어 배틀>에서 승리한 서포터즈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역시나네요.”
예상대로 5부 리그에 떨어진 후에도 서포터즈를 이끌었던 오크스가 1등이었다.
오크스와 함께 남았던 플라타너시스, 젤코바스가 차례로 2, 3등을 차지했고 나머지 서포터즈의 순위는 고만고만했다.
“미스터 킴, 서포터즈에서 건의사항이 들어왔어요.”
한 직원이 말했다.
“뭔데요?”
“버치스와 버즈가 합치겠다고 해요. 그리고 또···.”
제1회 <노팅엄 치어 배틀>에 참가한 서포터즈는 총 여덟 곳이었다. 그리고 대회에서 한계를 실감했는지 서로 힘을 합치겠다는 건의사항이 구단에 들어왔다.
그래서 총 네 개의 서포터즈만 남았다.
오크스와 파인스는 그대로, 젤코바스는 플라타너시스와 합쳐지고, 나머지 서포터즈는 버치스에 합쳐지는 거로.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서로의 필요성을 깨닫고, 더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도 이 프로젝트의 장점이었다.
그런데, 다음 건의사항은 예상치 못한 게 나왔다.
조이가 묻는다.
“파인스에서 하프타임에 공연했던 대학생 밴드의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데. 이건 어떻게 할까?”
파인스는 8개 서포터즈 중 6위를 한 서포터즈인데 버치스와 힘을 합치지 않았다.
“밴드와 협업을 하려는 걸까?”
회귀 전에 이 이벤트를 진행한 구단에서는 현재의 우리 팀과 같은 공연자들이 없었기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잠깐 고민하고, 정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대학생 밴드에 연락해서, 의사를 묻고 알려줘도 된다고 하면 알려줘.”
“오케이. 그럼 건의사항은 끝.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일을 해 볼까.”
조이의 말에 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많은 직원이 모인 이유는 이번 이벤트를 진행하기 위해 우리 구단의 여러 팀에서 힘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보안요원들의 배치 논의, 서포터즈 위치 조정 권유, 오크스가 다른 서포터즈를 잘 끌고 갈 수 있게 어떤 방식으로 지원할지 등 여러 가지를 회의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서포터즈에게 이번 대회의 결과를 알려주는 역할은,
“오크스가 1등을 했다는 건 제가 전달할게요. 서포터즈의 리더들도 모아서 한 번에.”
내가 맡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