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황혼 (1)
“캡틴!”
바비의 외침에 상대 수비와 몸싸움하던 알렉산더가 고개를 흘긋 돌렸다.
바비가 자신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수비수를 등지며 바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 전개과정이 알렉산더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바비에게 원터치로 패스를 돌려주고, 몸의 중심을 낮춘 채로 반 바퀴 돌아 수비수를 따돌리며 달린다.
그러면 바비가 타이밍에 맞게 패스를 찔러줄 것이다.
타겟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 간의 전형적인 2:1 플레이였다.
예상대로 바비는 알렉산더에게 패스했고, 알렉산더는 공을 원터치로 돌려준 후 상대 수비수를 지지대 삼아 몸을 반 바퀴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그렇게 느리면 못 가지.”
상대 수비수가 어느새 자신의 이동 경로를 막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침투에 실패하자 바비는 머뭇거리다가 공을 뒤로 패스했다. 그제야 몸에 힘을 푼 수비수가 알렉산더에게 시비를 걸었다.
“2부 리그 출신에 지난 시즌 팀 내 득점 2위라더니 별거 아니네. 다 칼 슈나이더 덕분이었나?”
알렉산더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트래시 토크였다. 상대 수비수는 그렇게 말하고, 수비 자리로 먼저 돌아갔다.
알렉산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 수비수를 따라갔다. 자신이 오늘 맡은 역할은 이 수비수와 끊임없이 경합해서 공을 따내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알렉산더의 속은 괜찮지 않았다.
‘분명히 뚫었어야 했는데.’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이 많아졌다. 분명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다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몸싸움이 예전 같지 않았고, 반응속도도 확연히 느려져 경기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은퇴가 가까워진 선수가 겪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지난 시즌에도 비슷한 현상이 찾아왔지만, 더 세심한 훈련으로 극복했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그렇게 되질 않았다.
4부 리그와 3부 리그의 격차 때문인 걸까, 아니면 자신이 1년 더 늙어서인 걸까.
알렉산더가 씁쓸해하는 동안에도 경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다시 공을 잡은 바비는 알렉산더 대신 왼쪽의 요한에게 패스했다. 요한은 페널티박스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할리의 머리를 향해 공을 찼다.
할리는 상대 수비수보다 머리 하나 높게 점프해 알렉산더의 발밑으로 패스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에게 수비수가 몰리게 하고, 수비수가 없는 공간에 자리잡은 바비에게 패스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
알렉산더의 당황스러운 음성과 함께 공은 상대 수비수에게로 넘어갔다. 분명 패스를 하려고 했는데, 상대 수비수가 낚아채 버렸다. 허무하게 득점 찬스를 날려 버렸다.
할리가 공을 다시 뺏어오기 위해 슬라이딩 태클을 했지만, 공은 아쉽게도 엔드라인 밖으로 넘어가 버렸다.
알렉산더는 노팅엄의 진영으로 돌아가면서 느릿느릿 걷고 있는 바비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다. 두 번 다 좋은 기회였는데 살리질 못했어.”
“아니에요. 제가 너무 뻔하게 패스해서 그런 거예요.”
“아니야. 남은 시간 동안은 날 미끼로 쓰고, 할리나 요한을 계속 노려라.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 것 같다.”
“예···.”
삐익!
그때, 심판이 교체를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교체될 것 같다는 직감에 대기심이 들고 있는 교체 판을 확인했다.
예상대로였다. 자신의 등 번호 19번이 적혀있었다. 자신을 대신할 선수는 또 다른 공격수인 감자 머리 알버트였다.
알렉산더는 감독 잭슨을 보았다. 잭슨은 무표정한 눈으로 어서 벤치로 돌아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터치라인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은 젊은 할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알버트 만큼 안정된 플레이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느려졌다.
그런데, 노팅엄은 공격수를 두 명만 쓰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경기 이후로 자신은 확실히 후보선수가 될 것이다.
‘또 다른 훈련법을 찾아야 하나.’
2부 리그에 팀을 돌려놓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시즌의 훈련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는 훈련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제 쉬어도 되지 않을까.’
알렉산더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알버트가 알렉산더를 대신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알버트는 교체 투입 이후 두 골을 넣었고, 경기는 노팅엄의 승리로 끝났다.
**
경기 후, 치료실에 들어온 선수들이 서로를 앞으로 떠밀고 있었다.
“라이언, 네가 먼저 해.”
“싫어. 네가 먼저 해.”
할리와 라이언이 서로의 뒤로 서기 위해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 스포츠치료사 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1분만 참으면 되는데 프로선수들이 뭐 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너무 차가울 것 같은걸요···.”
할리의 말에 선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앞에는 커다란 이동형 욕조가 있었고, 그 안은 얼음과 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감독의 피드백을 들은 후, 감독의 지시에 따라 선수단 전체가 치료실로 왔는데, 폴린이 이곳에 들어가라는 얘기를 해서 지금의 상황이 된 것이었다.
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감자 머리 선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동안은 장비가 없어 얼음찜질이나 찬물 샤워로 대신했지만, 얼음 욕조에 들어가는 게 신체 회복, 그러니까 ‘근육의 회복’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된다고요.”
폴린은 근육의 회복이라는 단어에 강한 악센트를 넣었다.
폴린의 말을 듣자마자 감자 머리들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왔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형제여(bro). 내가 한 걸음 더 빨랐다고. 양보해.”
“형제들, 내 손이 가장 빨랐어.”
여섯 명의 감자 머리들은 얼음물에 먼저 들어가겠다고 다퉜고, 폴린의 지시에 따라 차례로 입수했다.
다른 선수들도 눈치를 보며 감자 머리들의 뒤에 섰다.
“그냥 보면 바보들 같은데··· 이해할 수가 없네. 어떻게 저 여섯 명이 다 잘할까?”
“팬들 사이에서 우리 단장님한테 초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돈다더라.”
로드와 할리가 이야기를 나눴다.
둘의 말대로 이번 시즌 데려온 감자 머리들은 알버트를 제외하고 전부 풀타임 선발출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대활약으로 노팅엄 FC는 10월 중순인 현재까지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시즌 시작 후, 노팅엄의 활약이 우연이라고 헐뜯었던 언론들은 하나둘 찬양기사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옆 동네 노츠 카운티 또한 ‘운이 좋을 뿐이다. 우릴 만나면 다를 거다.’라고 했다가 4-0으로 얻어맞고 조용해졌다.
또한, 팬들은 칼 슈나이더에 의존했던 지난 시즌보다 훨씬 더 균형 있는 선수단을 가지게 됐다고 좋아했다.
그래서 노팅엄의 선수들 사이에서는 감자 머리들을 따라 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잘 나가는 동료 선수를 흉내 내는 건 프로 세계에서 흔한 일이었다.
“로드.”
“네!”
그때, 치료실 밖에서 알렉산더가 로드를 불렀다.
로드는 줄에서 이탈해 치료실 밖으로 빠져 나왔다. 알렉산더는 자신과 비슷한 키의 로드를 보며 차분하게 물었다.
“경기가 끝나면 심판들에게 인사하라고 하지 않았나?”
“아··· 맞다. 죄송해요.”
“심판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다음 경기에서는 절대 잊지 마라.”
“네!”
로드는 이번 시즌 알렉산더에게 주장이 챙겨야 할 것들을 배우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경기 중에 우리 팀의 선수들을 더 살피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치료실을 흘끗 보고 말했다.
“그럼, 가 볼 테니까 선수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줘라.”
“네? 그건 원래 캡틴이···.”
“이제 네가 해.”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차갑게 들렸다.
로드는 최근 알렉산더가 툭하면 혼자 생각에 잠긴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경기력도 갑자기 떨어져서 선수들 사이에서도 무슨 일 있는 게 아니냐, 은퇴할 때가 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었다.
로드는 알렉산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캡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무 일도 없다. 그럼, 먼저 퇴근하겠다.”
로드는 왠지 모르게 쳐져 보이는 알렉산더의 어깨를 한참 동안 보다가, 이제 네 차례라는 할리의 외침에 치료실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런 알렉산더를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
알렉산더와 로드의 대화를 엿듣게 된 건 우연이었다.
나는 잭슨과 겨울 이적시장에 데려올 선수에 관한 얘기를 하며 복도를 걷고 있었고, 복도 중간에서 알렉산더와 로드가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나는 힘없이 복도를 떠나는 알렉산더를 보며 잭슨에게 말했다.
“잭슨이 볼 땐 어때요?”
잭슨은 알렉산더가 복도에서 사라진 후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스터 킴의 말대로였습니다. 은퇴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30년가량 감독 일을 해 온 잭슨의 말이었다. 나는 알렉산더가 사라진 빈 복도를 가만히 보다가 잭슨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내일 얘기해도 될까요?”
“예. 어서 가시죠. 알렉산더는 샤워를 빨리하거든요.”
잭슨은 내가 뭘 하러 가겠다고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당연히 알렉산더를 쫓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잭슨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경기장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
“이제 와요?”
알렉산더의 차에 기대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검은 정장이라 잘 보이질 않았는지, 알렉산더가 흠칫 놀랐다. 이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꼬마야. 놀랐잖아.”
“하하. 전화를 안 받으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괜히 찾으러 갔다가 길이라도 엇갈리면 어떡해요.”
내가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이자, 알렉산더는 그제야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내 전화가 왔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렇군. 무슨 일이냐? 나 오늘 피곤한데.”
평소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알렉산더의 얼굴에는 귀찮음이 잔뜩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단장으로서 볼일이 있어서요. 음··· 좋은 곳에 가서 얘기 좀 하실래요? 시간 괜찮죠?”
*
“좋은 곳이 여기냐?”
알렉산더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나는 익숙한 소파에 앉으며 와인을 한 잔 따랐다. 이곳은 훈련장에 있는 내 사무실이었다.
“네. 좋은 술이 있는 곳이 좋은 곳이니까요. 이건 제임스가 프랑스 거래처에서 받아온 아주 비싼 와인이에요. 자요.”
“난 시즌 중에 술 안 마셔.”
알렉산더에게 잔을 내밀자 알렉산더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딱딱하게 거절했다.
나는 그런 알렉산더의 앞에 잔을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요?”
내 말을 들은 알렉산더는 순간 표정이 굳어지더니, 와인잔을 들고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와인은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닌데···.”
“한 잔 더 줘.”
“네.”
나는 군말 없이 와인을 따랐고, 알렉산더는 한 번에 마셨다. 나는 계속 알렉산더의 잔을 채워줬다. 알렉산더는 그동안 어떻게 참아왔었는지, 아니면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계속해서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제임스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먹겠다고 다짐했던 와인병은 텅 비게 됐다. 나중에 같은 거로 꼭 사다 놔야지.
나는 빈 와인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알렉산더를 보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이제 다음 계단을 오를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렇죠?”
알렉산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얘기했다.
“코치 공부를 시작해 보는 건 어떠세요? 모든 과정과 금액은 구단에서 다 부담하겠습니다.”
그제야 알렉산더가 고개를 들었다.
“코치?”
“네, 다음 시즌부터 전력분석팀을 만들 계획인데, 전력분석 코치로서 그곳의 리더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선수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최근까지 현역에서 뛴 선수였기에 공부만 더해진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 제안이었다.
알렉산더가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보더니,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나이가 나이잖아요.”
“그런가···.”
곧 알렉산더는 만으로 서른여덟 살이 되기에 이상하게 들릴 대답은 아니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늘 좋은 건 아니라는 생각을 최근 몇 달 동안 했다. 선수의 노화처럼 막을 수 없는 일을 기다리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나빴다.
“코치 연수를 받는 동안은 지금 주급과 똑같은 주급을 드릴게요. 선수 겸 코치 아시죠? 감독님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겠다고 했어요.”
“같은 주급이라··· 무리하는 거 아니냐?”
“캡틴은 우리 팀의 상징이자 전설인걸요. 제대로 대우 안 해 주면 팬들이 욕해요.”
알렉산더가 내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상징이자 전설이라··· 낯간지럽군.”
“사실인걸요. 이 팀에 인생을 바치고, 수많은 제안을 받아도 팀에서 떠나지 않은 노팅엄 그 자체에요. 캡틴은.”
알렉산더의 헛웃음 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자조하듯 말했다.
“과대평가야. 나는 그런 대단한 선수가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