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황혼 (2)
나는 알렉산더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침묵을 유지했다.
예상대로 알렉산더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꼬마야. 너는 그거 모르지?”
“뭘요?”
“내가 11년 전에 카디프 시티로 이적하겠다고 감독과 구단주랑 대판 싸운 거.”
“그랬었어요?”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내가 알고 있는 알렉산더는 팀에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선수였으니까.
심지어 11년 전이라면 알렉산더가 리그 득점 2위를 하고, 노팅엄은 리그 최종 3위로 프리미어 리그(잉글랜드 1부 리그)행이 달린 플레이오프에서 아쉽게 탈락한 시즌이었다.
그 시절 노팅엄의 팬들은 알렉산더가 우리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거라고 확신했었다. 그런 대활약 후에도 알렉산더는 프리미어 리그 팀에서의 제안마저 다 거절하고 팀에 남았었으니까.
하지만, 알렉산더의 입에서 나온 사건의 전말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나는 그 시절 폼이 절정에 올랐었다고 생각했었던 젊은 선수였다. 그래서 프리미어리그나 2부 리그의 최상위권 팀에서 꼭 뛰고 싶었다. 그때, 마침 카디프 시티가 제안을 해 오더구나. 날 주전으로 쓰겠다면서 말이다.”
“왜 안 갔어요?”
알렉산더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쪽에서 다른 선수를 구했다며 제안을 철회했거든. 구단주와 감독에게 이적을 허가해달라고 강하게 주장했던 나는 그렇게··· 얼간이가 됐지.”
“아···.”
흔한 일이었다. 축구 클럽에서 이적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한 선수만 목표로 하지 않는다. 여러 선수와 동시에 협상을 진행하고, 많은 조건을 따져 그중 하나를 택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선택받지 못한 선수는 기존 구단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
“하지만, 그때의 감독님은 날 다시 받아주겠다고 했다. 이 팀에서 한 시즌 더 뛰고, 올바른 과정을 거쳐서 떠나라고 했다. 나는 내 실수를 깨달았다. 현 구단에 대한 존중이 없었던 거지.”
“그랬군요.”
“거기에 구단은 내가 이적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기자가 퍼뜨리려는 것까지 막아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은 구단을 위해서였겠지만, 나는 그때 정말 고마워했었다.”
그 시절의 사람 좋았던 감독님과 구단주가 차례로 떠올랐다.
“한데··· 하필이면 그때, 프리미어 리그의 한 하위권 팀에서 제안이 온 거지. 우리 팀에서 주전 경쟁을 해 보지 않겠냐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맞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 소식은 기사로 나가서, 지금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거지.”
알렉산더는 이번 시즌에 좋은 활약을 펼쳐 다음 시즌에 나가겠다고 구단에 얘기했다.
구단은 받아들였고, 새로운 시즌이 시작됐었다.
하지만, 그 시즌에 알렉산더는 자잘한 부상을 입었고, 전 시즌보다 못한 활약을 펼쳤다.
프리미어 리그 팀의 제안은커녕 2부 리그 상위 팀의 제안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한 시즌 더 남게 됐다.
“그러면서 차츰 깨닫게 됐다. 나는 딱 2부 리그에서 평균 정도의 선수일 뿐이라고.”
이후 알렉산더는 팀에 오래 있던 만큼, 자연스럽게 주장을 물려받았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그저 성실하게 경기를 뛰었고, 주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점점 날 좋아해 주더구나. 나도 이 팀이 점점 집 같이 느껴져 다른 곳에 간다는 생각조차 못 하게 돼 버렸다.”
나는 가만히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충성심이 넘쳐서 이렇게 오랫동안 팀에 남았던 게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다. 그러니까 나를 구단의 전설이니 뭐니 부르지 마라. 과분하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내 말을 끊으며 토해내듯 말했다.
“나는 1부 리그의 부름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저 2부 리그의 선수일 뿐이다. 2부 리그까지 팀을 되돌려놓겠다고 했지만, 기량이 떨어져 내 손으로 그걸 못 하는 늙은 선수일 뿐이라고.”
나는 알렉산더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늘 강해 보이던 알렉산더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이곳에서 어떤 선수였는지 모르겠다.”
알렉산더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귀를 기울여야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는데 은퇴라니···.”
내가 의도적으로 피하던 단어가 알렉산더의 입에서 나왔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깨달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 술병과 잔을 꺼내 왔다. 그리고 알렉산더에게 술로 가득 찬 잔을 내밀었다.
다음날 새벽, 알렉산더는 내게 공개 기자회견을 열어달라고 했다.
나는 밤을 새고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기자들을 모았고, 알렉산더는 그 자리에서 이번 시즌이 끝나고 은퇴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
알렉산더의 은퇴 선언 이후, 노팅엄의 드레싱 룸에는 의식이 하나 생겼다.
경기 시작 전, 노팅엄 TV의 한 영상을 배경음처럼 틀어놓는 것이었다. 영상의 제목은 <캡틴, 알렉산더 샌더스의 은퇴 기자회견>.
리그 경기가 있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시작 전, 드레싱 룸에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기자 : 그럼 2부 리그 승격 약속은 이번 시즌에 지켜지는 건가요?
알렉산더 : 그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으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손으로 꼭 이루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죄송합니다.
알렉산더는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저 동영상을 드레싱 룸에 틀어놓은 주범, 로드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걸 보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알렉산더가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 후, 노팅엄의 주장 단에는 큰 개편이 있었다.
주장은 알렉산더가 그대로 맡고 있었으나, 알렉산더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저 두 부주장 뒤에서 조언만 해 줄 뿐이었다.
첫 번째 부주장은 기존의 부주장이면서 5부 리그부터 함께했던 베테랑 선수, 두 번째 부주장은 이번에 새로 임명된 로드 테일러였다.
로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의 강력한 추천으로 부주장이 되었다.
그에 화답하듯 로드는 주장으로서 정말 열심히 했다.
선수들을 북돋기 위해 수시로 농담도 던지고, 그 무서운 감독에게도 말을 걸어댔으며, 훈련에 미친 감자 머리들만큼이나 열심히 하기도 했다.
다만, 선수들을 북돋기 위해 저 동영상을 수시로 틀어놓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기특하잖아. 봐 줘.”
“그래야죠. 늙고 힘없는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성인팀 코치 스티븐 에반스의 말에 알렉산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선수들에게 멀어져 코치진 쪽에 가깝게 섰다.
말만 선수 겸 코치지 감독은 알렉산더를 교체 명단에도 잘 넣지 않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자연스럽게 팀 훈련 외의 훈련을 하지 않게 됐고, 늘 코치진과 붙어 다니며 일을 배우고 있었다.
스티븐이 말했다.
“그래도 저 인터뷰 영상이 효과가 있긴 있더라. 주장이 은퇴하는 데 목표는 꼭 이뤄줘야 하지 않겠냐면서 선수들이 너 없을 때 의기투합하는 걸 본 적 있거든.”
“그렇습니까.”
고마운 녀석들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목표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따뜻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시험 준비는 잘 돼가?”
“나쁘지 않습니다. 천천히 하려고요.”
“알겠어. 아무튼, 공부하다 막히는 거 있으면 내가 됐든 감독님이 됐든 편하게 물어보라고.”
“알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경기장으로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자신이 없다는 게 어색했지만, 알렉산더는 적응하는 과정이라며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스티븐과 천천히 걸어 나갔다.
필드 위에서도 알렉산더는 느긋하게 공을 찼다. 알렉산더의 스트레칭을 도와주는 중인 스티븐이 물었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훈련을 그렇게 줄여도 돼? 교체 선수로 나갈 땐 어떡하려고.”
“어차피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감각만 유지하는 정도만 하려고 합니다.”
“뭐···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예, 그리고···.”
알렉산더는 적극적으로 몸풀기에 임하는 선수들을 보았다. 격하지는 않지만, 큼직큼직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로드가 선수들에게 무언가 말하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없더라도 괜찮을 겁니다. 다들 잘하고, 열심히 하니까요.”
알렉산더가 우울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지, 스티븐이 어색한 티가 나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공부라도 열심히 하던가. 요즘 뭘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야? 혹시 연애?”
“아닙니다. 지금은 선수 신분이니··· 선수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어서 단장에게 부탁한 게 있거든요.”
*
‘선수들이 참가해야 하는 행사에 최대한 다 나가고 싶다. 자잘한 행사도 전부.’
은퇴를 결심한 알렉산더의 부탁이었다. 연말에는 유난히 그런 행사가 많이 있었고, 팬들을 위한 행사에 인기 선수와 비인기 선수를 적절하게 배분해야 하는 직원들은 알렉산더의 말에 구원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알렉산더는 정말로 사소한 행사에도 다 참여해 줬다.
훈련 시간을 줄이는 만큼 다른 선수들의 시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었다. 덕분에 다른 선수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나는 로드에게 몰래 이 얘기를 전해줬고, 선수들도 알렉산더의 의도를 알고 더 열심히 뛰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노팅엄은 11월 내내 전승하며 아직도 1위였다.
이번 시즌 승격을 목표로 하긴 했지만, 지나칠 정도로 좋은 순위였다.
“노팅엄 어린이 병원 방문부터 노팅엄 대학, 트렌트 대학교도 다 가겠다고요? 괜찮겠어요? 하나 정도는 빼도 되는데.”
나는 내 앞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알렉산더는 술을 마신 그날 이후로 뭔가 초탈한 듯한 모습이었다. 딴생각을 하는 일이 많아졌고, 얼굴 어딘가가 늘 불편해 보였다.
은퇴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힘들지 걱정되었지만,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하겠다는데 말리기가 참 어려웠다.
내 말에 알렉산더는 역시나 이렇게 답했다.
“이런 거라도 해야지.”
**
알렉산더는 로드와 사무엘(감자 머리 2호기)과 함께 트렌트 대학교의 한 천연잔디 운동장에 나와 있었다.
“오늘 재밌게 즐겨 봐요!”
모처럼 알렉산더와 함께하게 된 로드가 프로 선수들을 만난 대학생보다 더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팬들과의 만남’을 위해 이곳에 나와 있었다. 운동장에는 트렌트 대학교의 축구 클럽 인원이 전부 나와 있었다.
알렉산더와 두 선수는 이 대학생들에게 약 두 시간 동안 번갈아 가며 축구 레슨을 해줬고, 추첨을 통해 대학생 클럽 사이에 끼어 함께 경기를 뛰기도 했다.
물론 로드와 사무엘은 부상을 생각해 가볍게 뛰었다. 부상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알렉산더는 열심히 뛰었고, 대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수들과의 10분간 1:1 트레이닝 기회와 함께 그 선수의 애장품을 주는 행사를 시작했다.
행사는 골포스트(골대) 챌린지라는 게임으로 진행됐다. 지원자를 뽑아 페널티킥을 차는 자리에서 골포스트를 맞추는 게임이었다. 골포스트를 가장 정확히 맞추거나, 골포스트에 가장 가깝게 찰 수록 순위가 높아진다고 했다.
그중 1위부터 3위에게 선수들과의 시간과 애장품을 받을 수 있었다.
축구 클럽에 소속된 대학생들은 너도나도 골포스트 챌린지 도전했다. 최고 기록은 땅볼로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거였다. 골대 상단을 노리는 슛은 다 빗나갔다.
점점 지원자가 뜸해지자, 사회자가 행사를 구경 하고 있던 대학생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그중, 노팅엄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여학생을 말이다.
“거기 학생분도 해 보시지 않겠어요? 노팅엄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해보고 싶긴 한데··· 제가 공을 잘 못 차서요···.”
“괜찮습니다. 이런 행사에서는 초심자의 행운이 정말 많이 작용하거든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마, 마야 메이라고 해요.”
사회자의 말에 휩쓸린 마야는 필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공 앞에 섰다.
“누굴 선택하고 싶나요? 아, 뻔한 질문을 했네요.”
사회자의 말에 참가자들, 구경꾼들이 와하하 웃었다.
주근깨 많은 여학생, 마야가 입은 노팅엄의 유니폼에는 19번, 샌더스라고 적혀있었다. 알렉산더의 유니폼이었다.
마야는 사회자의 신호에 맞춰 뻣뻣한 도움닫기 후, 어색하게 발을 휘둘러 공을 찼다.
발에 공이 제대로 맞지 않아 공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마야는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이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느리고 힘없이 굴러간 공은 골대를 정확히 맞고 골라인을 넘었다.
골포스트 챌린지 최고 기록이었다. 마야는 믿을 수 없는지 멍한 얼굴을 했고, 그런 마야에게 알렉산더가 다가갔다.
그리고 주저앉아 있는 마야의 손을 잡아 일으켜줬다.